매체 속에 잠재하는 욕망

매체 속에 잠재하는 욕망

조광석(미술평론가)

   지난 20년간 우리 사회문화 현상에서 나타나듯이 문화적 보수와 급진주의의 거리는 좁혀지는 듯하게 보여지지만, 내부적으로는 상당한 거리감을 아직도 지니고 있다. 우리가 과거에 지니고 있던 자연환경이 도시화, 대중화를 통한 문화환경의 조성은 그 변화가 아주 빠르게 진행되면서 자연 혼란스럽고 불투명하게 나타나고있다. 또한 서구의 다른 나라들과 다른 전통문화를 지닌 우리가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급진적으로 전환되면서 본래의 가치관을 보존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여있다. 결국은 우리 사회가 자유경제 체제 아래서 새로운 경제력을 지닌 자들에 의해 주도될 것이며,새로운 세대의 의식 구조에 의해 변화될 것이다. 더구나 대중 매체를 핵심으로 하는 최근의 문화는 이전까지 유지되어 왔던 예술경험방식을 바꾸게 만들고 있다. 새로운 세대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자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게되고, 자신에게 최대한의 만족을 줄 매체를 선호한다. 이는 현실적 문화현상에서 흔하게 경험할 수 있는 실체이면서 우리 스스로가 그곳을 빠져 나오지 못하는 모순이다.

   소비를 목적으로 한, 즉 재화의 효용을 소멸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이러저러한 특정매체와 그것이 전파하는 이미지에 대한 소비욕구는 가치체계의 변화를 이루게되고 이제까지 예술작품이 누려왔던 인위적 가치를 소비하게된다.

  매체는 사물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으며 인위적 인식에서부터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초기단계의 사물에 대한 가치는 인식소와 상관없는 유용성과 연결되었다. 그것은 대상으로서 욕구와 관련을 가짐으로써 인식적 서열을 부여받게 되고 매체로 진화하게 된다.

작품의 탈신비화

   “오늘날 우리의 주위에는 사물, 서비스 및 물적 재화의 증가에 의해 이루어진 소비와 풍부함이라는 상당히 자명한 사실이 존재하는 데, 이것은 인류의 생태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풍요롭게 된 인간들은 지금까지의 어느 시대에도 그러했던 바와 같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사물’이 경제사회의 산물로 평가될 때 다양한 인식의 변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현대사회에서 점점 더 풍요해지는 물질적 욕구만큼이나 가속화된 경제발전, 사회변동의 결과 주체 스스로가 존재에 대한 장악력을 크게 하려 시도하게된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는 주체와 사물사이에서 주체가 추구하는 욕망의 중심이 사물로 옮기게 되는 역전의 결과를 보게된다. 주체의 욕망에 의해 사물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지닌 매력이 그것을 주관하는 주체의 사유를 지배하는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말한다. 예술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미에 대한 욕망이 서서히 호사스럽고 풍부한 것으로 전환되어지면서 작품을 질료화시키고 교환가치로 평가하게 되는 과정은 스스로 예술작품의 탈신비화를 초래한다.

    예술은 유토피아에 대한 공상적 비전을 지니고 있었으나, 이와 같은 물화의 과정에서 스스로의 꿈이 사라지게 만들고있다. 또한 예술작품의 수용은 미적 태도와 관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미학자들의 주장에서 나타나듯이 철학적 전제를 포기하고 있다. 예술작품은 이상적인 사용가치를 벗어 버리고 시장조건과 유행에 적응하는 ‘교환’가치를 수용하게 되어 의사소통보다는 가치평가가 가능하고 편리한 재화의 소유를 기대한다. 많은 사람의 관심은 미학으로부터 벗어나서 품위와 위신을 위해 수집을 하게되고 대상에 대해 무언가 실질적인 대가를 찾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적어도 개별적 특징을 음미할 수 있는 작품을 구사하지만 결국 수용에서는 다른 목적을 보이게 되고 육체로 체험할 수 있는 질료적 풍요는 탈신비화를 지속시키게 된다. 따라서 작가에 입장에서는 항상 주관적 사유를 동반하는 것에 대한 부담과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현실 사회에 실천적 활동으로서 작가가 취할 수 있는 것은 비판적 테제로서 그와 같은 ‘탈신비화’를 수용하게된다.

   직접적이며 비언표적이며 아무런 힘이 없던 사물자체가 의미구성체인 언어행위로서 매체가 된다. 사물은 풍요한 사회의 핵심에서 나타나게 된다. 사물은 사실이며 사물에 대한 제시자의 의도와 수용에 관해서는 수용자의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물에 의한 의미구성의 시도는 전통적으로 추구되어온 진리에 대한 假想이 와해되고 새로운 사유로 해방의 계기가 된다. 즉 사물에 대한 미메시스적 계기와 합리적 계기가 교체됨으로써 가상을 통한 정신의 위선적 도피를 파괴한다. 미메시스에서 간직하고 있던 진리에 대한 신화적 지식에의 집착이 약화되고 현실체험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는 스스로 해체하게 된다. 이제 사물은 실질적 만족감을 제공하고 항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개연성과 욕망을 충족시키는 경제적 가치로 정신을 지배하게된다. 이는 유토피아가 미래에 전개될 것이라는 기대보다는 지금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토피아의 실제성이 확산되는 현상은 사물이 매체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제작되지 않고 선택되어지는 것 Ready-Made의 사용은 작품에 대한 구조적 변화를 만들고 있다. 이제가지 작품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은 작가의 섬세한 손길에서 이루어지는 고유의 제작 방식과 그것을 다른 사람이 재현할 수 없다는 특수성으로 평가되어 왔었다. 따라서 작가 의도가 작품 내용의 해석에 따라 간접적으로 수용되는 암시적 제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상황이 된다. 작품들이 가치를 지니고있었던 것은 그것들이 기호로서 무한한 기의의 연쇄작용을 수용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호의 기능은 의미를 항상 불러내는 힘을 지니고있었으며, 그 작용은 항상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기호자신과 다른 기호와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주술적 행위처럼 자신이 만든 주문을 통해 스스로 변화와 역사를 제시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작품처럼 소통의 담론을 전제로 하여 스스로를 감추기도 한다. 사물에서 하나의 질서가 이루어지고 담론으로 혹은 담론에서 질서로 옮겨가면서 그것들을 위계화 한다. 그 질서는 사물과 작품 사이에 이어지는 상황과의 닮음이라는 체계를 말한다. 마그리트의 구체적인 형상이나, 클레의 기호들, 칸딘스키의 색채에서도 닮음을 전제로 한 질서가 있다. 그것이 단순한 재현이라는 의미와 함께 유추를 통해 기의로 미끄러진다. 현대적 기술이 무미건조하지만 유용한 형태로서 생기를 찾게되는 계기는 커뮤니케이션, 즉 접촉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소비사회를 특징짓는 의식의 부재가 아니라, 라디오의 쓸데없는 농담이나 퀴즈 프로그램도 교회의 미사나 미개사회의 번제와 마찬가지로 의식 중에 하나를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단적수용(communion)은 의식이 더 이상 종교처럼 상징을 통해서가 아니라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기술적 매체를 통해 분배되는 것은 더 이상 하나의 문화-살아있는 물체 집단의 현존, 지식도 아니다. 기호와 그것을 준거하는 희미한 기억과 지적 신호체계의 미묘한 집합체가 된다. 그것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어들임으로써 소비가 되고 경제적 효용이 나타난다. 근래에 두드러진 설치와 테크놀로지-아트는 그러한 질서가 역전되고 있다. 그것들은 사물들 가운데서 파생된 기호들이면서 그 기호가 우리의 사유를 지배하는 상황을 말한다. 새로운 기술은 우리의 사유 밖으로 빠져 나가고 있으며 우리는 주체를 못한 채 뒤쫓고 있는 실정이다. 그 유행은 우리 사회의 관심사를 잘 반영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이러한 현대 미술에서 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 기계화와 전자 정보 기술의 확장된 인식은 이미 20세기 초에 시작된 ‘미래파’의 기술에 대한 예찬과 순교자적인 예술의 죽음을 예견하는 ‘다다’와 무관하지 않다. 사진기와 영화와 같은 이미지 재생기술의 확산은 미술에서 간직하고 있던 숭고와 같은 엘리트적 전망을 볼거리로 진화시킨다. 또한 볼거리는 계속 볼거리를 요구하게 된다. 이제 시각 예술의 범위를 확장시킬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미술에 이러한 새로운 시각적 테크닉의 대중적, 총체적 도입은 대중과 좀더 가깝게 서게 된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출현과 물질적 풍요와 함께 나타난다. 그것은 사실과 시대성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갖고 있는, Ready-Made의 일상성을 통해 잘 확인된다. Ready-Made에서 ‘일상의 신화’들은 소비 사회문화와 Mass media, 기계 기술의 환상적 기대와 반항의 이중적 욕구와 함께 작품화되어 진다. 조금 더 구체적이며, 조금 더 사실적인 표현 방법으로 일상적인 사물(Object) 자체가 작품으로 직접 등장하게 되고, 작가들은 일상적인 사물(Object)들의 사용을 통해 현실과 대립하고 경제적인 사회에 대한 비판성을 나타내며, 다른 면으로서는 풍요의 확인을 통해 초현실적 과제-유토피아도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Ready-Made의 사용은 우리 삶의 일부가 과거의 미술 표현을 대신하면서 요즈음에 이르러서 더욱더 포괄적인 의미로서 사회 참여를 추구하고 있다. 새로운 미술은 그 영역을 점차 확산하여 모든 장르를 초월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아트가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기술 지상주의는 엘리트주의 미술을 나약하고 쇠약한 문화로 전락시킨다. 후기 산업사회의 특성으로서 등장한 Ready-Made는 이제 혼성모방을 넘어서 포식적이며 히스테리적인 과장으로 전환된다. 그 위에 순간적 재생능력을 보유한 비디오의 등장은 이미지 조작을 통해 대상이 없는 파생된 이미지를 생산하게된다. 또한 새로운 테크닉으로서 컴퓨터의 기능을 사용한 하이테크 작품에서 정보 사회적 관심을 표현하는 경우는 좀더 다른 차원에로의 전환을 이루게된다. 이제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는 테크놀로지는 제작되어진 기술이 아니라 반대방향으로 전환되어 진다. 즉 현대인의 사고에서 테크놀로지가 없이 추리가 불가능해 진 것이다. 최근까지 테크놀로지는 가상을 구체화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 예로서 테크놀로지를 대변하는 TV는 대중매체로서 지위를 확립함과 동시에 새로운 사물로 포괄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기존의 TV를 통해 제시되는 이미지는 정보의 지위를 벗어나 사유와 소비의 대상으로 나타나게 됨으로서 기성화 된 사물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TV에서 제공되는 영상 이미지는 사물의 밖에서 재생된 것이 아니라 물리적 실체로서 Ready-Made가 된다. 따라서 TV모니터는 하드웨어로서 Ready-Made, 비디오의 이미지는 소프트웨어로서 Ready-Made와 결합한다. 초창기 비디오아트에서 TV 모니터가 이미지 전달을 위한 단순한 매체로서 물감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Ready-Made로서 TV 모니터는 새로운 미술의 초기적 성향은 벗어나 전통적 회화 체계를 탈피하는 데 많은 관심을 두게된다.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해체하고 TV 모니터는 그것이 담고 있는 이미지와 동일화 한다. 따라서 작가들이 선택한 이미지는 TV 모니터들을 사용하여 연역해 낼 수 있는 사건과 관련되어지는데, 이미지 자체의 시각적 사실성과 의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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