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보그적 예술, 사이보그적 생태: 전자매체시대의 몸의 새로운 숙명

사이보그적 예술, 사이보그적 생태: 전자매체시대의 몸의 새로운 숙명

김원방(미술평론, 미학)

우리는 끊임없이 살아있는 형태 속에서 그 가변성의 극단적 한계를 추구한다. – H. G. Wells

유인원, 사이보그, 여성, 이들은 모두 서구의 진화론적, 기술적, 생물학적 서사에 있어 동요하는 위상 속에 있었다. 이들은 문자 그대로 ‘괴물’이다. 이제 괴물들은 ‘의미’한다. 우리는 예감에 차있고 소박하지만은 않은 이 괴물들이(에 관해) 만드는 지식들에 대한 생물정치학적, 생물테크놀로지적, 페미니즘적 이야기들을 다변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힘에 있어 차별화되고 고도로 배척되는 괴물들의 존재방식은 가능한 다른 세계들의 징표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분명 우리가 책임지고 있는 세계의 기호들이다. – D. Haraway

권력에의 의지란 차이를 수용하는 힘이다. – F. Nietzs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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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국내의 테크놀로지 관련 논의, 특히 미학적 논의의 장에 있어, ‘사이보그’란 개념은 좀 생소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 글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바는, ‘사이보그’라는 것을 미래 기술의 어떤 특수한 변종적 현상으로 다루거나, ‘Science Fiction’ 계통의 대중문화적 취향을 옹호 또는 비판하거나, 혹은 ‘테크놀로지’가 주도권을 잡고있는 현 예술과 문화의 흐름 속에서 ‘사이보그 예술’이라는 새로운 쟝르의 도래를 알리려는 것도 아니다. 이 글의 목적은, ‘테크놀로지-인간-예술’의 세가지 개념의 연쇄를 ‘사이보그적 생태성’이란 용어로 재정의하고, 그 세목을 살피고, 그럼으로써 한편으로는 기술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새로운 진화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사이보그 개념을 통해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던 미학과 세계관으로 회귀함으로써, 하이테크놀로지의 온갖 재현물들로 구성된 기이한 미래와 이제는 전혀 쓸모없어 보이는 과거를 이어주는 통로를 마련하는데 있다. 즉 우리는 사이보그란 것을 단지 공상과학이나 만화가 만들어낸 괴이한 구경꺼리가 아니라, ‘삶과 예술이 가능해지는 조건’이라고 하는 확장된 은유로 해석하려는 것이다.

‘사이보그(cyborg)’의 어원은 잘 알려져 있듯이 ‘cybernetic organism’으로부터 온 신조어이며, 인간의 지능에 의해 촉발된 인공적이고 확장된 육체에 적용되어 말하여 진다[1]. 즉 그것은 인간(유기체)과 기계가 결합되어 같이 작동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계-인간’의 결합적 상태에서 양자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은 많은 과학자들과 문학가들에 의해 일찌기 이야기되어 왔으며 맥루한(Macluhan)은 미래의 매체문화 속에서의 사이보그적 생태를 예견한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전자매체들의 일반화를 통해 우리는 이미 ‘사이보그적 생태계’의 깊은 곳에서 살고 있다. 습관적으로 우리가 지니고 다니는 물건들과 의복들, 그리고 헤드폰, 오디오, 휴대폰, 호출기, 캠코더, PDA, 모뎀, 계산기, 심지어 ‘Data glove’에 이르기까지, 이것들은 몸과의 통합체계 속에서 기능하며, 우리는 기계와 상호호환되고, ‘단백질’과 ‘실리콘’이라는 두개의 범주는 통합되어 버린다. 나의 신경계는 지속적으로 디지털망에 접속되고, 변형과 확장이 가능한 사이보그가 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더욱 더 의류와 비슷하게 된다. 전자매체적 환경 속에 동화된 이러한 존재를 인간인가 기계인가를 구별하는 것이 더욱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이보그적 존재는 “단순한 조합(일반적 도구의 경우에서와 같은) 이상의 상태이다. 사이보그는 기계란 것이 의식의 도움을 받지않고, 신체의 동질적 통제(homeostatic control)의 상태 속에서 작동하는 그러한 특이한 관계를 수반한다.”[2]소위 신체의 ‘morphing(변형)’, ‘borging(사이보그화)’ 등의 표현은 그러한 상호접합과 변형의 상태를 의미하기 위해 생겨난 신조어들이다. 사이버 문화에 있어 신체란 것은 외부성에 의해 침투가능하며, ‘근대적 신체’, 혹은 ‘비트루비우스적(Vitruvian) 신체'[3]의 통합성과 신성함은 티타늄 합금으로 된 무릅관절이나 ‘전자 팔’, 합성혈관 등의 보철(prosthesis)에 의해 침해당한다. 이러한 보철적 생태성은 의학적 대체물뿐만 아니라 건축적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어 나가며, 디지털 시대의 건축가와 도시설계가들은 주변의 공간이 바로 전자정보로 가득찬 보철행위의 영역, 즉 ‘사이보그적 공간’이란 관점에서 환경과 육체의 관계를 재지형화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를 맡게 되었다.[4]

대중문화의 영역에서는, 특히 80년대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SF영화들, 그 예로 영화 < 로보캅>, <론머맨>, <터미네이터>, <기억상실증에 걸린 죠니/Johnny Mnemoniac> 등을 통해 폭발적인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단지 음울한 사이버 펑크적 ‘테크노-디스토피아’를 ‘볼꺼리’화한 외양을 지니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화 속에서의 ‘후기인간(post-human)’의 출현에 대한 예감과, ‘변질된 인간’이 내포하는 상실의 멜랑콜리를 드러내주고 있다. 고전적인 SF문학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의 ‘사이버펑크 문학’ 속에서 사이보그적 존재들은 비록 오래된 패러다임으로부터는 벗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폭력적이고 남성중심주의적인 미래를 상정하며, 그러한 사이보그의 감정과 느낌은 ‘인간주의적’ 차원 속에서 함몰되어 버린다.

우리가 사이보그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로 삼고 집중적으로 참고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다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에 의해 정의된 사이보그인데, 그 이유는 비록 그것이 후기자본주의의 가장 암울한 기호전쟁 속에서 사이보그를 찾아내고 있긴 하지만, 이로부터 인간과 기계,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가장 급진적인 대화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고갈될 수 없는 정치적 행동의 가능성을 갱신해내기 때문이다.

[담론적 몸으로부터 사이보그적 몸으로: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우리가 몸이란 것이 삽입되고, 칠해지고, 쓰여진다 라고 말할 때, 그것은 몸에 대한 담론 – 즉 몸이 문화적 결정론의 맥락 속에서 재현되고, 몸이 문화적 기호의 매개체가 되는 과정에 대한 – 을 행함을 의미한다[5] . 서구문명을 통해서 여성은 너무나 오랜 동안 ‘객체화된 살’로 환원되어 왔으나, 후기구조주의와 페미니스트들의 몸 정치학에 대한 관심은 전통적 몸 개념을 ‘재현의 전투장소’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특히 80년대 초 이후로, 우리의 신체에 대한 지식이란 것은 몸이 자연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생산되는 것이라는 관점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성차화(gendered)된 몸의 문화적 구축’과 투쟁하려 한 페미니스트들의 시도는 다시 한번 과학과 기술에 의해 급격한 전환을 맞게 된다. 기술과 과학이란 것을 합리성의 남성적 숭배라고 비난하던 초기 페미니즘 비평들은 이제 “새로운 과학과 기술의 전개(유전공학 같은)와 그리고 지식과 진리의 사회적 구조화라는 철학적 프레임워크들이 얽혀 만드는 질문의 다발에 자리를 내주었다.” [6] 정보화시대의 여성적 신체와 기술의 접합을 응시하면서, 해러웨이나 나오미 울프(Naomi Wolf) 등의 페미니스트들은 몸 전반, 특히 ‘여성적 몸’에 대한 깊은 고정관념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몸(특히 여성의 몸)이란 것은 한때, 특히 80년대의 일종의 ‘광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속에서는, 담론의 재현적 효과로만 간주되고 종국에는 사라지는 단계에까지 이른 적이 있기도 했다. 이러한 ‘몸의 포스트모던적 사라짐’은 기술과 매체의 폭발 속에서 몸이 증발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아서 크로커(Arthur Kroker)의 맥루한적 설명을 따르면, 오늘날 ‘자연적 몸(natural body)’은 사라지고, 기술적으로 생산된 ‘모조물적 몸’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현재의 문화를 지배하는 바, 몸에 대한 광적인 문제의식 – Aids, 약물중독 등 – 은 통제와 안전에 대한 사회적 불안의 기호들로 나타난다. 그러한 ‘광적인 몸’은 “몸이란 것이 극단적으로 다시 부활되고, 가공적 주체성의 마지막 폭발처럼 나타나는 그러한 문화의 쇠락을 가르키는 징표이다” [7] . 그리하여 몸은 단지 ‘시대에 뒤떨어진(obsolete)’ 것이 되었고, 수많은 기술적 확장들에 의해 대치된다는 것이다. ‘광적인 몸’의 수사학적 범람은 기술적 장치에 의한 대체를 통해 자연적 몸의 사라짐으로 이어지고, 다시 그것은 ‘사회성(the social)’의 사라짐 – 즉 종말론 속에서 함께 일상을 살아나가는 데에서 생기는 사회적 유대성 – 의 최종적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A manifesto for Cyborgs, 1985)’은 우리 생활에서 이미 지배적인 신기술의 편재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기본 전제를 고수하면서도, 동시에 나아가 기술을 새로운 사회적 변화를 위해 차용하고 합병하라는 제안이다. 몇몇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테크놀로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울한 숙명론적 입장들과는 반대로, 더욱 진보적이고 정치적인 의제(agenda)로 짜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독해는 기본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것이 ‘후기자본주의논리의 문화적 지배인자’로 규정한 프레데릭 제임슨의 생각을 기본적으로 따르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전반기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은 공장, 파워 플랜트 등 하이모더니즘의 기념비들을 통해 시각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기술이란 것은 더이상 동일한 재현의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8] 전화, 라디오, 텔레비젼, 컴퓨터 네트워크에 이르기까지 퍼져있는 우리의 소통망을 ‘재현할 수 없음’, 이것은 곧 오늘의 다국적 자본주의의 전체적 세계시스템을 재현하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전체적 인식의 지도(cognitive mapping)를 발명하고 투사해야 한다는 과제가 새로이 주어진다”[9] .

해러웨이는 전통적으로 남성적(macho)이고, 군사산업적이던 사이보그에 대해 페미니즘 내부의 입장에서 보아도 매우 도전적이고 일탈된 읽기를 시도한다. 많은 기존의 페미니스트들, 예를 들어 클라우디아 스프링거(Claudia Springer) 같은 경우, 터미네이터나 로보캅 같은 존재는 단지 어떤 향수, 즉 남성적 우월성이 당연히 인정되던 시대, 기술이란 것을 단지 남근적 힘을 되찾기 위한 은유로서 필요했던 시대의 노스탈지어를 표현한다고 보았다[10] . 또한 문화이론가 스콧 버캣맨(Scott Bukatman)은, “로보캅이나 터미네이터 같은 존재들이 ‘인간의 쇠퇴’라는 불안의 지속을 내포하고 있고, 따라서 그 목적은 원래의 인간성을 재정의하려는 것이다. (…) 우리의 존재론은 표류한다”라고 말하면서 사이보그적 이미지의 역기능을 비판적으로 드러낸다.”[11]

사이보그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관점들에 대해 해러웨이는 선언한다: “사이보그는 우리의 존재론이며, 정치학이다.”[12] 로보캅이나 기타 무장한 사이보그들처럼 결국은 인문주의적 목적을 지향하는 군사산업적 목적의 사이보그와는 달리,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는 모호한 혼성적 융합과 차이의 지속에 의해 동요하는 ‘미래의 인격화(personification)’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기계와 유기체, 문화와 자연, 모조물과 원본, 공상과학과 사회적 현실을 한개의 몸 속에 화해시킨다. 잠재적이고 금기된 융합의 쾌락 속에서 태어나며, 부분성, 내밀함, 변태성을 단호히 수용하는 하나의 ‘유토피아적 괴물’로서의 해러웨이적 사이보그는 해결되거나 억압되기를 거부하는 차이(성, 인종을 포함한 모든 것의)의 살아있는 심볼이다[13] . 해러웨이가 “우리는 모두 사이보그이다”라고 선언할 때, 그녀는 이 말을 유기체와 기계 사이에 조합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학적 의미로,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리는 이제 통합된 산업적 사회가 아니라 다형태적(polymorphous) 정보시스템이 관통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라고 하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요약하면 기술이란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든 대립적 양극성을 전치시키고 있다는 의미이다.

“20세기 후반의 기계들은 자연과 인공, 마음과 몸, 자기발전과 외적 디자인, 그리고 유기체와 기계들에 적용되던 많은 구별들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기계들은 혼란스러울 정도로 생생하고,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정체해 있다. 우리의 과제는, 서구적 자아를 구조화하는 위계적 이원론의 대립, 그 안에서 가능했던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의 명료한 구분을 붕괴시킴으로써 잠재된 가능성들을 새로이 감싸는 작업이다.”[14]

이러한 기조 속에서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은 기술과 과학을 적대시하는 기존의 페미니즘들을 비판한다. 기존의 페미니즘들은 앞서 말한 이항대립의 억압적 구조를 전복하려 하였으되, 이것은 단지 각각의 대립에 있어 열등한 것을 복권시키려는 시도에 머물렀다. 소위 ‘Ecotopian 페미니즘’, ‘New Age goddess 페미니즘’, 그리고 카사 폴리트(Katha Pollitt)가 ‘차이의 페미니즘(difference feminism)’이라고 부르는 것 등, 여성의 ‘내재적’ 감성이나 특성들을 주장하는 페미니즘말이다. 여성이란 여기서 ‘어머니 대지(mother earth)’로서 상징화되고, 문화나 정신보다는 자연(몸)에, 합리성보다는 직관에 조율되어진다. 그러나 해러웨이에 의하면, 계몽주의적 의미의 자연이나 몸, 그 어느 것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 모두, 인공심장과 유전학적으로 개량된 옥수수의 시대에는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었다. 자연과 몸, 그리고 주어진 것들 모두를 문화적 구축물로 보는 20세기 후반의 기술논리(techno-logic)는 이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을 붕괴시킬 뿐만 아니라, 모든 기존의 유기체적, 자연적 입장들에 대한 재고를 요청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신 뿐만 아니라, 여신도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과학과 기술의 사회적 관계를 통해 내밀하게 재구조화되는 세계에서의 여성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기존의 페미니즘은 ‘反-과학형이상학’이나 ‘테크놀로지 악마이론’같은 것을 무력화시킬 수단을 제공할 수 없다.”[15]

“‘페미니즘적 체현(embodiement)’이란 것은 , 여성적인 몸이건 다른 것이건, 육화된 몸의 고착된 위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장(field)들의 매듭들, 운동의 내적 굴절, 물질기호학적 장에서의 의미의 차이들에 대한 책임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체현이란 것은 그어떤 의미있는 보철인 것이다. (…) 페미니즘은 다른 과학들과 테크놀로지를 사랑한다. 즉 해석, 번역 그리고 부분적 이해의 과학이나 정치 같은 것 말이다. 번역이란 것은 항상 해석적, 비판적, 부분적이다. 바로 여기에 대화와, 합리성과, 객관성의 바탕이 있게 된다. 그것은 권력에 예민한(다원주의적이 아닌) 대화이다. (…) 과학과 테크놀로지 역시, 폐쇄된 모델에 의해서가 아니라, 반박되고 반박할 수 있는 것을 그 규준적 모델로 하여 만들어져야 한다.”[16]

발라드(Ballard)는 이 말들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간략히 요약한다: “과학과 기술이란 것은 이제 우리들 주변의 모든 것을 다중화한다. 즉 우리가 말하고 사유하는 언어를 지배할 정도로 말이다. 우리는 그러한 언어를 사용하든지, 아니면 벙어리가 되어야 한다.”[17] 해러웨이가 강조하는 바, 테크놀로지와 과학의 사회적 관계들을 책임진다는 것은, “反-과학의 형이상학과 테크놀로지의 악마론을 거부함으로써, 일상의 경계들을 재구축하는 능숙한 과제를 떠맏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타자와의 부분적 접합(connection)과 우리의 부분들과의 소통을 통해서이다. 이 말은 과학과 테크놀로지만이 인간적 행복의 가능한 수단이거나, 지배의 모태라는 의미가 아니라, 사이보그적 이미지들이야말로 우리가 여태까지 자신의 몸과 도구를 설명해 온 이원론의 미궁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18]
사이보그는 허구의 문제이면서도 동시에 실제적 경험의 문제이다. 사이보그는 문화적 독해의 바탕을 이루는 지배의 관계들을 드러냄으로써, 그 어떤 텍스트화의 확실성도 전복한다. 그럼으로써 사이보그는 ‘물질적 몸’을 다시 긍정하고, 포스트모더니즘 내에서의 ‘몸의 사라짐’을 비판한다. 사이보그는 ‘담론적 몸(discursive body)’을 물질적인 몸과 ‘접속’시킨다. 결국 사이보그는 몸이란 것을 문화적 구축과 물질적 실제라는 두가지 지점으로부터 동시에 접근함으로써 기존의 페미니즘에 도전한다. 몸이 자연적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구축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몸이 단지 물질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면서도, 또한 역으로 몸이란 것이 단지 담론적으로 구축된 것 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19].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자연 대 문화’라는 대립의 붕괴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몸 테크놀로지 시대에 있어 여성에게 ‘부과된 몸’이란 것은 단지 다양한 의미의 체계로 이루어진 인공물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이버-사이보그적 생태성]

전자매체문화는 사이보그를 비롯하여 새로운 생태적 장의 열림을 수반한다. 사이보그란 인간과 그 자연적 환경 사이에 컴퓨터를 비롯한 기계가 개입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생태 속에서 유기성과 비유기성, 물질성과 비물질성, 인간의 지능과 인공적 지능들은 서로 합류하고 조합된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가변적인 몸의 시대를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생태학을 우리는 총칭하여 ‘사이버 생태학(cyber-ecology)’ 혹은 ‘사이보그적 생태학(cyborgian ecology)’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적 유기체와 인공적 유기체 사이에 일어나는 가변적 상호작용의 과학을 말한다. 캐서린 헤일즈(Katherine H. Hayles)에 따르면, “인간경험의 기본요소들이 변질되면서 그 경험들은 단지 구축된 것으로서 드러나기를 그친다. 경험의 가장 근원을 형성하고 있다고 믿겨져 왔던 인간의 주체란 것은, 그 역시 해체, 재구축되며, 이로써 자신의 본질을 변질시킨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이러한 ‘후기인간(post-human)’의 존재를 예고하고 밑그림을 그려왔다.” [20]우리는 바로 그러한 사이버-사이보그적 생태 속에서 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가변성이란, 사이보그의 은유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인식과 지각 자체가 ‘cyborganic’해지는 유동적 생태모델을 말한다. 그것은 감각이 경계없이 퍼져나가고 접속되는 변형, 혹은 돌연변이(mutation)의 문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돌연변이는 감각의 새로운 지평이며 ‘초-기관적(meta-organique)’인 상태이다. [21]세계에 대한 ‘cyborganique한 지각’이란 바로 그것이다. 여태까지의 몸은 일종의 고립된 ‘섬-몸(island-body)이었다면, 이제는 ‘몸-바다(body-ocean)’ – 동시에 유기적, 전자적, 정보적인 – 와 같은 것이 된다는 것이다.[22]

이러한 사이버공간의 생태 속에서는 몸의 유기적, 기계적, 정보적 물질성이 우리의 지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몸의 ‘지속적 미끄러짐’이 우리 지각을 지배한다. 단지 정보의 흐름과 재조합으로만 간주되는 사이버스페이스의 모델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본질도 없다. 살아있는 존재야 말로 실은 사이버스페이스의 ‘성스러운 원전’인 것이다. 사실 우리의 몸은, 기계가 현실에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화면 또는 거울이 된다. 우리의 몸은 물리적 우주가 기계를 위한 의미와 현실을 지니게 되는 그런 기호의 연쇄물이다. 즉 우리 자신에 의해서, 매체적 공간은 비로소 잠에서 깨는 것이다.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해 서사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우리 몸의 현존인 것이다. 이러한 인식적이고 현상학적인 생태구조를 올리비에 디엔스(Olivier Dyens)는 ‘인식적 사이보그(cognitive cyborg)’라고 부르면서, ‘사이버스페이스’와 ‘사이보그’의 두가지 유사개념을 완전히 합류시킨다. 왜냐하면 그러한 몸과 사이버스페이스의 만남은 단순히 물리적 몸이나 물질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반(半)인간적, 반(半)기계적인 인식구조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알뤼께르 로잔 스톤(Alluquere Rosanne Stone)이 이미 말했듯이, 유기체와 기계 사이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성적이고 인식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몸은 사이버스페이스의 모태(matrix)가 된다는 것이다. 로잔 스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디지털적으로) ‘다시 계산된’ 육화, 그 밀도있는 욕망의 공간… 즉 사이버스페이스에 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그 공간을 ‘신체적으로(physically)’ 짊어진다는 의미이다. ‘사이보그’가 된다는 것 혹은 이 사이버네틱한 위험하고도 유혹적인 공간을 꿰메어 나가는 과정은, 바로 ‘여성성’을 꿰메어 나가는 과정이다. 그리하여 사이버스페이스는, 솝책(Vivian Sobchak)의 말대로, 몸의 영혼을 벗겨내고, 동시에 그 영혼을 번쩍이는 표면과 현란한 색을 지닌 사이보그로 다시 만들어냄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사이버네틱한 행위(cybernetic act)’이다.”[23]

그리하여 사이버스페이스는 ‘정신의 풍경(mindscape)’이상의 것이 된다. 그것은 디엔스(Dyens)의 표현을 빌면, 일종의 ‘memescape’이라고 할 수 있다.[24] ‘memescape’는 ‘memes’ 지리학과 같은 것이다. 즉 인식(cognition)의 가소성(plasticity)이루어내는 풍경인 것이다. 사이버스페이스는 그러한 방식으로 생태적 풍경으로서의 memescape를 우리의 몸에 삽입하고 산종한다. 그리하여 “참여자는 사이버네틱한 로봇이 제기하는 지각들의 ‘수용자-수용체(receiver-receptacle)’가 된다. (…) 주체는 존재하기를 멈추고, 폴 비릴리오(Paul Virilio)가 말하듯이 하나의 ‘운동’이 된다. 몸은 ‘자기’라고 하는 감각을 잃어버리고, ‘환경’이란 개념 역시 재정의 된다. 몸은 충만함과 고독함 사이에서 모호하게 된다. 운동의 ‘수용자’로서의 몸은 자신이 바로 그 매체(medium)가 된다. [25]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새로운 시대, 즉 ‘기계우주(machine-universe)’와 ‘생물학적 장치(bioapparatus)’의 시대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이보그적 예술]

사실 ‘사이보그 예술’이란 쟝르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예술은 그 자체가 이미 항상 사이보그적이기 때문이다. 사이보그 생태성과 관련하여 이제 우리가 예로 삼고자 하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작가 스텔라크(Stelarc)는 사이보그적 기술을 소재로 하여 사이보그적 체험과 생태를 더욱 밀접히 가시화한 경우로서 참조될 만하다. 하지만 그것이 ‘사이보그 예술’이란 쟝르의 창조를 알리는 전형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마치 ‘퍼포먼스 예술’이 미술사 속에 자리잡기 전에도 몸은 이미 항상 확장된 현상학적 조건 속에서 작동하여 왔다는 평범한 논리에 따르는 것이다.

68년부터 70년대에 이르는 동안 스텔라크는 소위 ‘감각의 방(Sensory Compartment)’이라고 하는 밀폐된 설치물을 제작하였다. 이 설치물 안에서 참여자(혹은 사용자)는 빛, 운동, 소리 등에 의해 심하게 간섭 받는다. 그가 만든 고글이 달린 헬멧은 착용자의 입체적 시각(두개의 눈에 의해 가능한)을 혼란시키고, 이미지들이 중첩된 거울의 집 같은 세계로 몰입시킨다. 이러한 초기 작업의 동기는 매우 맥루한 적인 전제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몸이란 것은 일종의 생리학적 하드웨어에 불과한 것이며, 이러한 생리학적 하드웨어가 바로 그 지적인 의식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따라서 당신이 이 하드웨어를 변경한다면 역시 변질된 지각에 이르게된다는 각성을 주는 것”이 작업의 주 목표였다. [26]스텔라크는 이러한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보철(prosthesis)의 미학을 발전시킨다.이후 그의 행위들은 전선과 센서 등 매우 복잡한 첨단 하드웨어들로 가득차게 된다. 몸을 증폭시키고, ‘레이저 눈’과 ‘제3의 팔’, ‘자동 팔’을 만드는 등, 그의 몸은 인간-기계의 혼성적 존재로 갱신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의 단말기적 존재가 되어나가고 있다고 하는 은유를 시각화한다. 존 셜리(John Shirley)는 해러웨이적 어조로 스텔라크에 대해, 그의 작업이 사이버펑크적인 후기인간에 대한 갈망의 체현이며, 공포와 영광으로 결합된 키메라이며, ‘전(前)인간성’과 이제 태어나려 투쟁하는 내일의 인간성의 종합이다”라고 규정한다.[27]

스텔라크의 사이보그적 퍼포먼스 중에는 플라스마가 들어있는 유리관으로 가득찬 설치물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있다. 이 플라스마는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생체신호들에 응답하여 방전되고 명멸한다. 일종의 새장과 같은 구조물이 그의 어깨에 고정되며, 이것이 아르곤 레이저 파동을 발산하는데, 그것은 스텔라크의 몸에 붙은 심장박동기(electrocardiograph)의 신호, 눈의 깜빡임, 얼굴근육의 변형, 머리의 운동 등의 신호에 일치하는 것이다. 작품 에서는 자신의 주변에 설치된 비디오 카메라들이 행위를 촬영하고, 그 이미지들이 여러 개로 분리된 큰 스크린에 투사된다. 그 이미지들은 중첩되고, 얼어붙고, 병치된다. <제 3의 팔(the 3rd hand) >에서는 작가의 오른팔에 플라스틱 인조소매가 부착되어 있고 이것이 제 3의 사이보그 팔로 연결된다. 그 ‘사이보그 팔’은 이상한 소리를 발산하며, 금속 손가락은 허공을 잡으려 애쓰기도 한다. 이것은 전체적으로는 스텔라크의 배근육과 다리 사이에서 오는 ‘근전도(electromyogram)’의 신호에 따라 작동하는 정교한 로보트이다. 그것은 290도의 방향으로 회전하고, 물건을 잡아 들어올리고, 약간의 기초적 촉각을 갖춘 피이드백 시스템이다.

맥루한에 의하면, 기술에 의한 ‘몸의 연장’ 혹은 ‘자기 절단(auto-amputative)’의 전략은, 극도로 자극을 받은 신경체계가 ‘기술의 속도와 부하의 빠른 증가’라는 문화적 촉매에 대해 행하는 반응이다. 스텔라크 역시, 정보시대의 과도한 속도는 이미 신경체계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맥루한의 관점을 따라간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두개의 눈과 1400cc의 뇌를 가지고 생멸의 원리에 지배받는 우리의 몸이 과연 생물학적으로 적합한 몸인가를 의문시해야할 때이다. 그것은 이제 정보의 양, 복잡성, 질에 전혀 적응할 수 없다. 지구라는 행성의 가장 중요한 압력은 중력이 아니라, 정보의 흐름이 되었다. 이제 정보는 ‘후기진화적 몸(post-evolutionary body)’의 형태와 기능을 조형해 나간다.”[28]

그리하여 극소화하고 신체적으로 호환가능한 기술의 발전에 의해, 언젠가는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 하나의 ‘종(species)’이 되는 날이 오리라는 것이다: “기술이 몸을 침범할 때 진화는 끝난다. 일단 기술이 각각의 개인에게 자신의 독자적 발전과 진화의 가능성을 제공하기 시작할 때, 종의 일관성은 더이상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29]” 이러한 인간-기계의 공생은 단순히 SF적 상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된 ‘문화적 제의(cultural rituals)’, 예를 들어 소위 ‘현대적 원시인들(modern primitives)’ 들이 행하는 ‘몸 장난’, 즉 몸의 일부를 변형시키는 행위들과 깊은 관련성을 가지며, 나아가 중세 유럽에서의 과학과 마술의 연금술적 결합같은 것을 보여준다.무사파르(Musafar)는 “우리는 현재 마술과 테크놀로지와 과학을 결합하는 지점에 있으며, 물리학자의 이론을 들으며 연금술을 상상해낸다”고 말한다. [30]이 말은 “리얼리티에 대한 몸의 주관적 총체성을 파편화한 기술은, 이제 그 파편화된 체험들을 재결합하려 하고 있다”라는 스텔라크의 말과 직결되며, 그것은 자아와 타자, 문화와 자연간의 단절이 있기 전의 시대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사이보그적 생태성은 사이보그적 로보트를 도구로 한 예술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사이버 공간과 접속되고 몸과 시선의 변형을 수반하는 작업들은 모두 다 기본적으로 사이보그 적이다. 여기서 예로 들고자 하는 또하나의 작품은 카트린 이캄(Catherine Ikam)과 루이 플레리(Louis Fleri)가 공동으로 제작한 상호작용적(interactive) 설치작품이다.

<타자/Autre>라는 제목이 붙은 이 작품은 1992년 몬트리올에서 열린 <미래의 이미지 전>에서 처음 보여진 작품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어두운 방에는 대형 비디오 스크린이 있으며, 이 스크린 위에는 하나의 ‘얼굴'(컴퓨터로 합성된)이 투사된다. 방의 가운데에는 줄끝에 달린 센서가 있고, 관객은 이 센서를 사용하여 이 ‘타자’와 상호작용할 수 있다. 그 센서를 사용하기에 따라 얼굴은 커지거나 작아지며, 또는 돌리고, 숙이고, 변형되기도 한다. 즉 그것은 ‘살려고’ 시도한다. 이 설치의 특징은 바로 관객으로 하여금 그 얼굴을 직접적으로, 원하는대로 콘트롤하지 못하게 하는, 프로그래밍의 우발적 측면이다. 사실 관객은(혹은 대화자는) 종종 그러한 얼굴의 변화에 대답하려고 시도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다.

이러한 작품은 이미 본질적으로 사이보그적 생태에 잠겨진 세계이다. 왜냐하면 우발적으로 변화하는 디지탈 얼굴 위에는 어떤 공포가 나타나지만, 이 공포는 꼭 내것 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우리 자신의 독립적 고뇌의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 사이버스페이스의 ‘침묵’은 우리 자신에게도 투사된다. 그것은 하나의 인식적 공간(혹은 ‘memescape’), 무거운 감정으로 차 있는 공간인 것이다. 어떤 고독감과 절망감이 작품 속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 우울함은 우리에게는 한편 이질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기체-기계’라는 관계 속에 속하기 때문이다. 에드몽 쿠쇼(Edmont Couchot)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미지는 더이상 닫히고 침투할 수 없는 공간이 아니라, 열려진 세계이다. (…) 마치 그 이미지들은 자신이 이미지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이다. (…) 의미는 더이상 코드와 해독, 진술, 전파, 수용과 독해 속에서가 아니라, 이미지와 보는 자의 혼성 속에서 발생한다.[31]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감정은 상업화된 테크놀로지 산업들이 인식시키듯이 기쁨이나 공포인 것만은 아니며, ‘침묵과 절망의 가상성’에 더욱 밀접히 연관된다. 여기서 ‘가상성(virtuality)’이란 것이 단지 후기산업사회 테크놀로지의 산물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자. 가상성이란, 멜랑콜리 속에서 얽혀진 추억이며 기억이란 점에서, ‘예술의 기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상성이 바로 우리를 예술과 함께 그리고 예술 속에서 있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가상적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은 결코 ‘비현실적(unreal)’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他-실제적(alter-real)’, ‘超-실제적( meta-reel)’인 것이다.

“실재(reality)란 것은, 우리 삶의 의미가 발견될 수 없고, 보거나 만질 수 없는 그런 공간이나 장소에서 나타날 때 가상적이 된다.” [32]

가상성이란 것은 우리의 보호막이며, 우리의 숙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후의 혹은 이전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빠질 수 있게 하기 때문이며, 우리에게 사회와 예술과 역사를 구축하게 하며, 우리의 한정됨에 대한 아픔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가상성에 의해 우리는 엔트로피적 세계에 대해 감정적, 인식적 질서를 준다. 우리가 가상성 속에 빠져들 때, 우리는 하나의 세계를 다시 만들려 하고, 우리의 채워질 수 없는 욕망으로부터 우울함을 만들어 낸다. 가상성이란 것은 그 자체가 다른 시간에 젖어있는 신화이며, 멜랑콜릭한 시간이다. 불행히도, 많은 테크놀로지 예술과 문화들의 경우 단지 정보자체에만 집중하며 이러한 멜랑콜리에는 무심한 경우가 많다. 하나의 예술작품은 그것이 만일 침묵의 자리(분노의 침묵, 절망이나 기쁨의 침묵)를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떤 초월도 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특징과 성격은 테크놀로지 예술에서 종종 부재하고 있고, 너무 시끄러운 것,즉 정보를 가상화시켜 전개시키는 데만 열중하고, 그것을 침묵시키는데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있다. 작품 <타자>에서는 우발적이고 예측불능한 것이 현존한다. 바로 그러한 침묵 속에서 새로운 소통의 형태(상호대화적인)가 설립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식적 사이보그’의 생태성이다.

[변신과 사이보그]

이상 열거한 사이보그적-사이버스페이스적 생태성이란 기본적으로 ‘변신'(매우 ‘이질적 종합’으로서의
‘metamorphosis’)이며, 그 멜랑콜릭함이란 그러한 변신상태의 멜랑콜리이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그러한 생태성을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도래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 몸에 충만한 잠재성과 현재성의 형태로 주어져 있는 조건을 살펴봄으로써 사이보그의 개념이 지니는 철학적 함의에 대해 약간은 가설적으로 정리하고 끝맺으려 한다. 그것은 바로 ‘변신’과 ‘타자의 긍정’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수반하는 특유의 긍정적 ‘힘’에 관한 것이다.

들뢰즈-가타리가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분석을 통해 논한 ‘변신’의 개념은, ‘이질적 접합의 원칙’의 실제적 과정을, 실제적으로 ‘다른-것이-됨’의 과정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말벌은 난초의 재생산 장치의 부분이 되며 동시에 난초는 말벌을 위한 성적 기관이 된다. 각자가 되는 ‘그것’은 ‘그것’이 생성되는 만큼 변한다는 점에서 ‘이중적인 교차’이다.

“변신은 재현이나 모방이 결코 아니다. 변신은 포획이고, 소유이고 덤태기이다. (…) 중요한 것은 어떤 한 이미지의 재현이 아니라, 기호체계의 한 조각을 포획하는 일이다.”[33]

이는 하나의 단일하고 동일한 생성, “서로 절대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두 존재들의 비평행적 진화”이다.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는 곤충으로 변하기보다는 ‘곤충이-되는-인간’으로 머무른다. 이러한 곤충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탈주선’을, 상황을 변화시키는 수단을 찾았음을 의미한다[34]. 카프카는 진술하는 주체(카프카 자신)와 진술의 주체(글 속의 ‘나’)로 스스로를 이중화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중체를 내세워 사람들과의 직접적인(즉 ‘real’한) 만남을 피하며, ‘편지기계’가 계속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장애물들을 발명한다. 여기서 카프카의 ‘이중적으로 변신된 주체’는 기계와 가상공간과의 접합에 의해 혼성화되고 부유하는 사이버 주체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사이보그적 변신이 무생물이나 자연적인 것으로 이미 ‘재현’된 것들과 접합함으로써 그 이분법의 무한한 붕괴를 지향하듯이, 카프카적 변신은 현실이라고 하는 그 재현된 세계의 직접성을 피하고 대신 가상적 벌레와 접합함으로써, 그 ‘편지기계’는 가상/현실의 대립을 넘어 무한히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사이보그란 것이 “재현된 목적론이 없는 궁극적 존재상태”라는 해러웨이의 말은, ‘타자’와 ‘차이’가 우리에게 유발하는 ‘공포’를 끊임없이 수용하고 그 자체로서 긍정하는 힘의 지속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니이체의 ‘비극의 정신’으로 회귀하는 듯하다. 니이체는 ‘비극의 정신’을 궁극적인 긍정의 정신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연과 필연(을 모두 긍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성, 생성된 것, 존재 이 모두를 긍정하며, 복수성, 복수적인 것, 통일된 것 이 모두를 긍정하기 때문이다. 비극이란 ‘주사위 놀이’이다.”[35] ‘사이보그적 변신’이란 바로 그러한 니이체적 의미의 우연과 차이의 긍정을 바탕으로 한, 총체적 변형과 변신을 지향하는 것으로 확장해석될 수 있으며, 들뢰즈는 그러한 니이체적 변형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변형(transmutation, transevaluation)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1. ‘권력에의 의지’ 속에서 질의 변화: 가치란 것은 어떤 부정(negatif)적인 것(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긍정의 힘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유의 장소 자체가 바뀌는 것이다. ‘(차이에 의해 영구히 고립된) 다른 세계(autre monde)’라는 자리는 없다. 가치의 요소 자체가 그것의 위치와 본성을 바꾼다.

2. 권력에의 의지 속에서 각 요소들의 변환: 즉 부정성(negatif)은 긍정의 권력(puissance)으로 변화한다. 부정성은 긍정에 복종한다. 그것은 삶이 자기 안에서 반동적인 것을 보존하는 형태가 아니라, 이제 반대로 삶이 자신의 모든 반동적 형식들을 희생시키는 행위이다.

3. 권력에의 의지 속에서의 ‘긍정의 군림’: 오직 긍정 만이 독립적 힘으로서 지속한다.

4. 힘(forces)들의 관계의 전복: 긍정은 힘들의 우주적 생성처럼, 긍정적 생성을 형성한다. 반동적 힘들은 부인되고, 모든 힘들은 긍정적이 된다.(…)”[36]

‘사이보그-니이체’의 연결쌍은 니이체의 긍정과 비극정신이 그리이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 왔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소급적 연쇄가 가능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비극의 사상가이다. 그는 삶이란 것을 근원적으로 천진난만하고 정당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실존이란 것을 유희의 본능을 통해 이해하였고, 실존을 종교적이거나 도덕론적인 것이 아닌 하나의 ‘미학적(esthetique)’인 현상으로 생각했다. (…) 그는 세계의 이원론을, 심지어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나아가 그는 생성을 긍정으로 간주했다[37]. 생성을 긍정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생성 밖에는 없다’라는 뜻이며, 다음으로 ‘생성을 긍정한다는 뜻’이며, 마지막으로 ‘생성의 존재(etre)’를 긍정하고, 생성이 존재를 긍정하고, 존재가 생성 속에서 긍정된다는 뜻”이다.”[38]

[결론]

사이보그적 예술과 생태에 대한 논의는 결코 사이보그를 비롯한 기이한 테크놀로지 예술을 부추기는 사고로 해석될 수도, 되어서도 안된다. 그것은 마치 “몸적으로 예술을 하자”, “몸을 권장하자”라는 모토처럼 모순되고 실행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몸이란 것은 예술의 소재처럼 생각될 수 있는 어떤 객체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와 사유의 조건이며 그 장(field)이기 때문이다. 테크놀로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태까지 반복되어 이야기 된 대로, 테크놀로지란 것은 이제 우리의 존재와 행동과 사유의 조건이 된다. 이러한 뉴미디어의 도래 이전에도 이미 기술이란 것은 항상 그러한 조건으로서 작동해왔다.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도래함으로써 드디어 처음으로 주체/객체의 이분법이 무너진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생각은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역사화’, ‘객체화’시키는 위험을 내포한다.

권력과 재현의 사유구조에 지배당하는 우리의 의식은, 최소한 의식 상으로는 기술에 대한 권력주의적 담론에 지배당하면서도 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러한 ‘조건으로서의, 신체의 일부로서의 기술’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존재하고 사유해 왔다. 내가 여기서 제안하는 것은 사이보그 로보트같은 것을 소도구로 사용하는 예술도, 예술 속의 사이보그도 , 테크놀로지를 쓰는 예술도, 예술 속의 테크놀로지도 아니다. 그보다는 기존의 모든 예술 속에 내재해 왔던 테크놀로지적 존재조건 혹은 사이보그적 존재조건을, 그리고 예술의 사이보그적 ‘역능성'(puissance)을 말하려는 것이다. ‘사이보그 예술’, ‘테크놀로지 예술’이란 새로운 쟝르는 없다. 예술 자신이 이미 그리고 항상 전적으로 사이보그이고 테크놀로지였기 때문이다. 결국 사이보그는, ‘예술의 근본적 힘을 재수행하는 힘’을, 그리고 그러한 ‘재정의를 위한 인류학적, 생태적, 정치적, 미학적 충동과 실현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

[1] ‘사이보그’란 용어는 1960년 과학자 만프레드 클린(Manfred Clynes)이 만들어낸 것이다. 무릅관절처럼 대체가능한 인공적 신체기관에 관한 의학기술의 진보는, 유기체적 기관과 기계적 사물 간의 상호의존성을 증폭시킨다. 나아가 이러한 기계적 장치들이 인간의 기능적 신체의 일부로 화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이보그적 기계인간에 대한 상상은 이미 그 전부터 발견되며, 그 예로서 아서 클라크(Arthur C. Clark)의 란 소설에서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정신을 기계에 이전시켜 스스로를 사이보그로 변환시킨다.

[2] David F. Chanell, The Vital Machine: A Study of Technology and Organic Life, New York, Oxford Press, 1955, p.129, (Mark Dery, Escape Velocity: Cyberculture at The End of The Century, New York, Grove Press, 1996,p.230에서 재인용)

[3] 다빈치의 잘 알려진 작품이 재현하는 이러한 신체는 바로 신체의 완벽한 형태성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 믿음이란 “몸과 그 형태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단일한 것이다”라는 내용의 것이다.

[4] ‘건축과 도시공간 속의 신체’라는 주제에 대한 입문적 논의로서는 Richard Sennett, Flesh and Stone: The Body and the City in Western Civilization, NY, W.W. Norton and Company, 1994를 보라.

[5] 기본적으로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로부터 출발하여 그 이후, 브라이언 터너(Bryan Turner), 캐서린 갤러거(Catherine Gallagher), 토마스 래커(Thomas Laqueur), 에밀리 마틴(Emily Martin) 등의 이론가들에 의해, 몸, 문화, 사회의 상호연루 속에서 몸이 담론화하고 ‘담론적 몸(discursive body)’가 생산되는 과정이 논하여 졌다. 이들에 있어서의 ‘몸 정치학’, ‘몸 테크놀로지’에 대한 비평적 설명으로는 다음을 보라: Anne Balsamo, Technology of The Gendered Body: Reading Cyborg Women,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1996, pp.19-40

[6] Anne Balsamo, “Feminism and Cultural Studies”, Journal of the Midwest Modern Language Association 24, no.1 (spring 1991), p.64 (Mark Dery, Escape Velocity…, p. 237에서 재인용)

[7] Arthur Kroker, Technology and the Canadian Mind: Innis/McLuhan/Grant, New York, St.Martin’s, 1984, p.27 (Balsamo, 위의 책, p. 28 재인용)

[8] Frederic Jamerson,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정정호, 이소영 편, Postmodernism: An Introductory Anthology, 한신출판사, 1990,p.232(원전 New Left Review, No.146, 1984)

[9] 같은 책, 같은 페이지.

[10] Mark Dery, Escape Velocity…, p.243, 재인용.

[11] 같은 책, 같은 페이지.

[12] Donna J. Haraway, Simians, Cyborgs, and Women: The Reinvention of Nature, New York, Routledge, 1991, p.150

[13] 같은 책, p.152

[14] 같은 책, p. 174

[15] 같은 책, p. 162, 181

[16] Haraway, “The Actors Are Cyborg, Nature Is Coyote, and The Geography Is Elsewhere: Postscript to “Cyborgs at Large”, in Constance Penley and Andrew Ross (ed.), Technoculture, ‘Cultural Politics, Volume 3’, Oxford,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1, p.23

[17] J. G. Ballard, Crash, New York, Vintage, 1985, pp. 3-4.(Mark Dery, Escape Velocity…, p.245 재인용)

[18] Simians, Cyborgs, and Women…, pp.100-101

[19] Anne Balsamo, Technology of…, p.34

[20] Katherine H. Hayles, Chaos Bound. Orderly Disorder in Contemporary Literature and Science, Ithaca and London, Cornell University Press, p.266 해러웨이는 우리가 이미 그러한 ‘후기인간’이 되어가고 있음을 선언한다: “20세기의 마지막 시점, 이 신화적 시대에서, 우리는 모두 기계와 유기체로 이루어진 키메라(Chimera, 그리이스 신화 속의 혼성괴물 -필자주)이고, 이론화된 잡종들이다. 즉 우리는 안드로이드, 사이보그인 것이다. 우리의 존재론은 사이보그의 그것이고, 사이보그는 우리의 정치학을 결정한다. 사이보그는 상상력뿐만 아니라, 물질적 현실의 압축된 이미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가지 중심의 융합은 모든 역사적 변형을 구조화 한다” (A cyborg Manifesto, p.150)

[21] 브랜윈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포괄적 설명을 덧붙힌다: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현대적 원시주의(귀뚫기, 문신, 신체변형)와, 그리고 인간의 몸을 후기인간적 가능성의 조건에 적합하도록 변형(morph)시키는 새로운 ‘기술신화(techno-mythology)’의 출현, 이 양자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신화에서 인간의 몸은 해커들에게 열려있고, 인간성과 기술이 새롭고 활발한 관계 속에 짜여지는 그러한 조율점이 형성된다. ” (Gareth Branwyn, “The desire to be wired”, Wired, vol 1, no.4, september-october, p. 62)

[22] Marcos Novak같은 사이버 이론가는 ‘액체적 건축(liquid architecture)’라고도 규정했다.

[23] Alluquere Rosanne Stone, “Will The Real Body Please Stand Up?: Boundary Studies about Virtual Cultures”, in Michael Benedikt(ed.), Cyberspace First Steps, Cambridge, MIT Press, p. 109

[24] Olivier Dyens, “L’emotion du cyberespace”, in Louise Poissant(ed.), Esthetiques des arts mediatiques, II, p.399-400. 디엔스는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유명한 정보생태론적 개념인 ‘memes’를 빌려오고 있다.

[25] 같은 이, 같은 책, p. 400. 이러한 자기반영적 생태성, 혹은 타자로의 접합이 지니는 힘과 관련하여, 리오따르(J. F. Lyorard)가 라깡적 어조로 한 말을 예로 들어보자: “거울 속의 괴물이 그 어떤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고 칠 때, 보르헤스는 ‘재현하는 자’와 ‘재현되는 것’ 사이의 동형성(isomorphisme)이나 이형성(heteromorphisme)에 대해 사색하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괴물들을 하나의 ‘힘’들로 상상한다. 그는 황제나 폭군이 일반적으로, 괴물들을 억압하고 그 투명한 벽 안에 가둘 때에만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상상한다. 주체라는 존재는 이러한 칸막이 벽 안에서만, 그리고 반대편에서 단지 재현된 상태로 억압되어 있는 유동적이고도 치명적인 힘을 복속시킴으로서만 가능한 것이다.”(J.F. Lyotard, Assassinat de l’experience par la peinture, Monory, Paris, Le Castor Astral, p. 13)

[26] 맥루한이 말한 바 있다: “우리의 감각의 확장은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 즉 우리가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이러한 비율이 바뀔때, 인간도 바뀐다.” (Marshall McLuhan, The Medium is the Message: An Inventory of Effects, New York, Bantam, 1967, p.41)

[27] Mark Dery, Escape Velocity…, p.154-155

[28] Stelarc, “Prosthetics, Robotics and Remote Existence: Postevolutionary Strategies”, Leonardo 24, no.5, 1991, pp.591

[29] 같은 글. p.591

[30] Kristine Ambrosia and Joseph Lanz, “Fakir Musafar Interview”, in Apocalypse Culture, Adam parfrey(ed.), New York, Amok Press, 1987, p. 111 (Dery의 같은 책,p.167)

[31] Edmont Couchot, “Sujet, Objet, Image”, Cahiers internationaux de sociologie, 82 (janvier-juin 1987), p.85-98 (Olivier Dyens, “L’emotion du cyberespace”, p.410 재인용)

[32] David Rothenbert, in Catherine Richards and Nell Tenhaaf(ed), Virtual Seminar on the Bioapparatus, The Banff Center for the Arts, 1991, p.19

[33] Gilles Deleuze, Felix Guattari, 소수집단의 문학을 위하여: 카프카론, 문학과 지성사, 조한경 역. 1992

[34] “동물변신, 그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동작을 가능하게 하며, 모든 가능한 도피선을 긋게 해주며, 문턱을 넘어서게 해주며, 오직 그 자체로 의미있는 연속적 응집성 속에 이르게 해준다. 동물 변신은 모든 형태, 모든 의미화, 기표 기의를 와해시켜서 비형태, 비영토화의 물결, 무의미의 기호에 자리를 내준다. 카프카의 동물들은 신화 또는 원형과 결코 관계하지 않는다. 카프카의 동물들은 오직 경사(傾斜)없는 밀도높은 자유영역과 조응한다. 그곳은 내용이 형태를 벗어버리고, 표현이 표현을 가능하게 한 기표를 벗어던지는 곳이다” (“소수문학…”, 28쪽)

[35] Gilles Deleuze, Nietzsche et la philosophie, Paris, PUF, 1962, p.41

[36] 같은 책, p.201

[37] 이 점에서 볼 때, 사이보그는 ‘항상 생성 속에 있는 존재’이며,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는 관점이 항상 견지되어야 할 것이다.

[38] 같은 책, p.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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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art.centerworld.net/discourse/sub.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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