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생명 예술(Artificial Life Art) – 새로운 상호작용성의 미학

인공생명 예술(Artificial Life Art) – 새로운 상호작용성의 미학

조선령(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1. 서론 – 기호의 담론에서 ‘생물학적’ 담론으로

누군가 21세기는 생물학의 시대라고 말한 바 있다. 최근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나 담론을 살펴보면 이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유전공학, 분자생물학, 인공생명 과학, 사회생물학 등 생물학 분야와 관련이 있거나 생물학에서 발전되어 나온 분야가 첨단분야로 각광받고 있으며, 복제양, 복제원숭이 등 복제생물이나 유전자 조작 작물에 대한 뉴스는 이제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정도이다.

지놈(genome) 프로젝트의 성과 이래 최근 생명복제에 관한 이슈는 복제가 가능한가에서 복제를 허용할 것인가라는 윤리적인 문제로 발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오늘날 문제시되고 있는 ‘생물학적’ 담론은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생물학과 상당히 성격이 다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는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인공생명(artificial life) 분야이다. 인공생명은 어디까지나 생물학의 분야가 아니라 공학의 분야이다.

하지만 인공생명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혹은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이 ‘생명’이라고 말한다. 탄소화합물로 구성된 유기적 생명과는 전혀 다른 재료로 만들어져 있지만 무기적 생명체 역시 생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생명에 대해 알고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오류일 수 있으며 생명은 다시 정의내려져야 한다는 시각이 담겨있다. 오늘날의 담론은 이처럼 생명과 비생명의 범주 혹은 정체성 자체를 뒤흔들고 있으며 양자를 결합 혹은 혼합가능한 것으로 사고하는 것, 그리고 생명과 비생명을 관통하는 자연의 법칙을 찾아내려고 하는 분위기로 이루어지고 있다.

인문과학에 있어서도 이러한 경향은 예외가 아니다. 라캉이나 푸코와 같은 이론가들은 일찍이 인간이란 개념에서 불변의 중심이나 본질을 제거하고 주체성이나 자아를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서만 작동하는 구조의 한 항으로 정의내린 바 있다. 그 이후 들뢰즈를 비롯하여 더욱 급진적인 후기 구조주의 이론가들은 인간을 ‘욕망하는 기계’라고 명명한다. 이들은 전통적인 인간의 특권이라고 생각되었던 것들을 인간에게서 모두 박탈하고 있는 듯 보인다. 들뢰즈에게서 인간의 본질은 인식론적 측면에서 논의되는 주체성과 자아의 문제를 넘어서서 존재론적으로 확장된다.

그에게서 욕망은 결코 개체적이고 인격적인 것이 아니며 개체를 넘어서는 흐름이다. 아직까지 들뢰즈 이후의 후기 구조주의가 어떤 식으로 발전할지 구체적인 전망은 나와있지 않지만, 관심의 초점이 서서히 이동하고 있음은 감지된다. 그것은 텍스트나 담론과 같은 기호학적 개념으로부터 물질적이고 실재적인 것에 대한 관심사로 향해가는 이동이다. ‘자연’과 ‘문화’ 사이의 심연을 구축하고 문화의 구성요소를 탐구했던 이론들은 이제 서서히 자연과 문화를 아우르는 더욱 거대한 시스템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른바 ‘생물학적인’ 담론으로 이행하고 있다.

20세기의 인문과학이 자연과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오늘날의 자연과학은 더욱 더 자신의 테두리를 넘어서 철학, 사회학, 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문화 전반에 걸쳐 새로운 이슈를 도입하고 자신의 담론을 전파해나가고 있다. 오늘날 자연과학의 담론들은 단지 테크놀러지적인 측면에서 사고의 가능성을 확장시켜주거나 도구적 차원에서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인문학적 문제들이 제시되고 검토될 수 있는 하나의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으며, 인간과 사회의 존재조건을 변형시켜 나감으로써 근본적인 인문학적 명제들을 재검토하게 만들고 있다. 예술 분야에 있어서도 이러한 분위기는 도처에서 감지된다.

테크놀러지는 예술의 도구라기보다는 하나의 존재방식이 되어가고 있으며, 예술 내부에서도 세분화된 카테고리를 형성해가고 있다. 이 글은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생물학적 담론 중에서도 특히 인공생명 과학 분야가 미술작품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그리고 인공생명을 다루는 미술작품이 갖는 의미와 전망은 무엇인가에 대해 간략히 서술해보고자 한다. 인공생명 과학은 그 내용적 혁신성, 급진적인 문제의식, 그리고 뛰어난 기술적 응용성으로 인해 고찰의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예술과 특히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2. 본론 – 인공생명과 예술

(1) 인공생명 과학

인공생명 과학이 하나의 학문분야로 정립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미국의 산타페 연구소와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가 공동주최한 제1회 국제 인공생명 세미나가 개최된 것이 1978년이며, 국내에서 이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아직 손에 꼽을 정도이다. 인공생명 과학이란 한마디로 살아있는 생명체의 특징을 가진 인공물을 창조하려는 과학의 한 분야이다. 인공생명의 가능성은 일찍이 폰 노이만이나 튜링과 같은 학자들에 의해 예견되어 왔으나. 그동안 하나의 가설로만 이해되었을 뿐이다.

특히 60, 70년대의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 분야의 발달에 상대적으로 눌려서 본격적으로 연구되지 못하다가 90년대에서 와서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인공생명’과 ‘인공지능’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그 방법론이나 내적 논리가 상당히 다른 분야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지능을 구성하는 근본 기제를 밝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 성과를 보지 못했다. 인공생명 연구자들은 다른 곳에서 접근한다. 그들은 우선 인공지능 분야가 일종의 하향식 접근방법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점을 갖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인간의 두뇌는 엄청나게 복잡하고 정교한 하나의 시스템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출발해서 인공지능을 만들려는 시도는 그 복잡한 시스템의 모든 하위체계와 작동방식을 다 알아야만 한다는 가정을 낳으므로, 문제는 어려워진다. 반면 인공생명 과학은 ‘상향식’으로 시작한다. 생명의 특성이란 뇌와 같은 복잡한 생명체가 가진 여러 가지 기능이라고 생각하는 대신에, 이들은 생명이란 아주 간단한 규칙을 가진 단순한 시스템의 복잡한 결합이라고 간주한다. 그 결과 시작이 간단해진다. 단순한 규칙을 가진 단순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 시스템은 내부의 규칙에 따라 엄청나게 복잡한 시스템이 되어간다. 하지만 우리는 그 최종결과물을 미리 알 필요가 없어지며, 모든 것은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게 된다. 인공생명의 연구는 인공지능 연구와는 달리 자연의 구조를 밀접하게 연구한다. 자연은 외관상으로는 대단히 유동적이고 불규칙해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숨겨진 규칙에 의해 움직이는 시스템이며 시작부터 끝까지 미리 설정된 것이 아니라 외부의 환경이나 주변 조건의 변화에 따라 무한히 다양하고 복잡한 시스템을 스스로 구성해낼 수 있다.

또한 자연은 진화를 거듭하면서도 그 복잡성을 상실하지 않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연의 복잡성을 인공적으로 모방할 수 있게 해준 방법론적 토대 중 하나는 프랙탈(fractal)(주1) 수학이었다. 프렉탈 수학이나 카오스 이론과 같은 비선형계의 과학을 바탕으로 해서 인공생명 연구자들은 유전 알고리듬(genetic algorithm)(주2)이나 L-System(주3)과 같은 인공생명의 창조 방법을 고안해내었다.

인공생명 연구자들에 따르면, 생명의 본질은 탄소화합물로 만들어져 있는가의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조직화의 논리, 항상성의 유지, 진화, 자극에 대한 창조적 반응, 복잡성의 유지와 같은 일련의 특성에 있다. 생명은 수많은 무생물 분자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역동적인 물리적 과정일 뿐이다. 그래서 컴퓨터로 구축된 가상환경 속의 생명체 역시 생명의 유비나 모방물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인공생명 과학에서 생명이란 ‘우리가 아는 바대로의 생명(life as we know it)’이 아니라 ‘가능한 바대로의 생명(life as it could be)’이다.

(2) 인공생명 예술

“인공생명 예술”이라는 말은 하나의 개념어로 정립된 것은 아니지만, 이 글에서는 임시로 지칭해보자. 이젠에도 인공과 생명의 관계를 주제로 작업해온 작가들은 많지만, 인공생명 예술가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작가들의 새로운 특징은 단순히 그런 관계를 다룬다는 것에서 벗어나 인공생명 과학의 기술적 성과나 방법론, 그리고 가치관들을 곧바로 예술적으로 응용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그럼으로써 작가와 작품 사이, 관객과 작품의 상호관계에 새로운 차원을 도입하는 점이다. 작가는 더 이상 작품의 창조가가 아니라 단지 전제를 깔아주는 사람이 되며, 관객과 작가의 구분 또한 흐려진다. 또한 작품은 전례없는 자율성을 획득한다.

인공생명 예술가들의 또다른 특징은 이들이 인간에 별로 관심이 없으며 오히려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생명이나 생태계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예술가들은 여전히 인간을 예술의 중심에 놓고 사고했다. 예를 들어 사이버스페이스를 다룰 때도 ‘실체 신체’와 ‘사이버 신체’간의 관계가 무엇인가 등을 논쟁의 주제로 삼았다. 그러나 인공생명 예술가들은 더 이상 실제 신체든 사이버 신체든 인간의 신체에 별 관심이 없다. 아니, 인간의 신체를 다룬다고 할 때도 그것이 휴머니티나 정체성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하나의 계 혹은 시스템의 일부로서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들이 웹에 상당한 친화도를 보인다는 점도 또 다른 특징이다. 인공생명 예술작품은 웹으로만 존재하거나 웹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많다. 불특정다수의 관객-작가에게 노출되면서, 그리고 웹이라는 비물질적 공간에서 살아가면서, 이들 작품은 우연히 관객에게 발견되어 접속되는 순간 존재가치를 갖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들은 기존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제레미 리프킨의 말처럼, 이들은 ‘접속’될 때 존재하며, 접속을 통해 자신을 구축해나간다.

예술작품 속에 복잡하에 사용되기 이전에 L-system이나 유전 알고리즘, 프렉탈 기하학과 같은 방식으로 구성된 조형적 형태들은 무엇보다 자연의 구조와 형태를 모방하는 데 사용된다. 자연은 무한히 불규칙적인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눈의 결정을 확대해서 살펴보면, 일정한 규칙을 갖고 있다는 관찰할 수 있다. 그것을 그대로 재현해내는 데 있어서 L-system이나 유전알고리즘은 매우 효과적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런 것들은 그냥 정교한 그래픽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형태들은 ‘그려낸’ 것이 아니라 ‘프로그래밍’된 것이다. 미술작품으로 응용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작가는 최초의 규칙만을 주었을 뿐이며 말하자면 작품 스스로가 그 규칙에 따라 보다 복잡한 계를 형성해간 것이다. 컴퓨터를 미술작품 제작에 이용하는 사례는 오늘날 드문 일이 아니지만, 이러한 작품들이 이전의 것과 구별되는 점은 무엇보다 이 컴퓨터를 부분적인 도구로 이용한 차원이 아니라 작품생산의 환경 혹은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프랙탈이나 유전알고리즘을 이용한 작업들은 Generative Art, Fraxtal Art, Evolutionary Art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우면서 특정 장르를 이루기도 한다.

또한 정지영상 혹은 평면 작업으로 만들어지는 경우와 동영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전자는 흔히 회화처럼 취급되고 후자는 흔히 웹아트나 영상설치 작업으로 제시된다. 동영상(을 포함한) 작업들이야말로 인공생명 예술의 새로운 특징을 확실하게 잘 보여줄 수 있는 장르이다. 인공생명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대부분 어떤 고정된 결과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계를 형성하는 과정 그 자체를 작품으로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작품은 대부분 관객 혹은 접속자가 참여하게 되어 있으며, 참여를 통해 그 복잡성을 증가시켜간다. 작품은 자연의 생태계가 그러하듯이, ‘번식’되어가고 ‘진화’되어 가는 것이다.

인공생명 예술은 대체로 미술의 담론 속에 많이 편입해있는 개별 작가들의 작업과 집단적인 웹 프로젝트 성격의 작업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인공생명 예술이라는 뚜렷한 장르가 정착한 것은 아니며, 미술담론에 완전히 포함되었다고 부르기 어려운 작업들도 다수 있다. 그 중에서도 크리스타 소모러와 로랑 미뇨노(Christa Sommerer & Laurent Mignonneu) 는 미술적 맥락에 많이 몸담고 있는 작가들로 꼽을 수 있다. 일본의 Art Media Integration and Communications Research Lab의 연구원이기도 하며 인공생명과 예술에 관한 책을 펴내기도 한 이들은 1992년부터 함께 작업을 해왔다.

이들은 인공적으로 생태계를 창조하고 그 속에서 생명과 거의 유사한 기능을 가진 인공 생명체들을 기르고 창조해내는 인터액티브한 영상 설치 작업을 보여준다. 이들의 작업은 관객들이 직접 참여함으로써 계속되어가는 것이 많으며, 어떤 고정된 결과물로 제시되는 것들이 아니다. 또한 이들이 만들어낸 생태계는 관객의 조작에 소극적으로 반응할 뿐 아니라 스스로 취향과 의지를 가지고 환경에 적극적, 유동적으로 반응한다.

예를 들어 영상설치 작업 (1999)에서는 관객이 키보드를 두드려 특정한 알파벳을 영상에 출력해내면 그것이 하나의 생명체가 된다. 이 생명체는 자기를 탄생시킨 알파벳만을 먹이로 먹으며, 다른 알파벳을 주면 먹지 않는다. 그리고 이 생명체들은 스스로 움직여다니고, 짝을 짓고, 죽어가고 진화하면서 자신들만의 생을 영위한다. 이 작품이 관객과 맺는 상호작용은 단순한 반사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복잡하고 동기화된, (말하자면 생명체와 유사한) 작용이다.

설치작업과 컴퓨터 애니메이션 작업을 병행하는 칼 심즈(Karl Sims)는 퐁피두 센터에서 전시되기도 한 영상설치 작업 (1993)로 널리 알려지게 된 또 다른 인공생명 예술가이다. 는 진화라는 자연계의 과정을 예술적으로 응용하고 있는 작품이다. 16개의 모니터가 아름다운 컴퓨터 그래픽을 보여주는데, 관객은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미지 앞에 서게 된다. 그러면 센서가 작동하고 컴퓨터가 연산을 시작하여 선택된 이미지의 ‘자손들’을 모니터에 보여준다. 선택되지 못한 이미지들은 사라진다. 이 ‘자손들’은 ‘조상’의 단순한 카피가 아니라 알고리듬에 의한 복잡한 변형을 거친 것들이다.

이미지들은 아버지를 닮은 것들도 있고 다르게 생긴 것도 있으며 완전한 돌연변이도 있다. 이 이미지들 중에서 관객은 또 선택을 할 수 있으며, 다시 이 과정이 되풀이된다.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진화의 변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복잡성도 증가한다. 이 작품에서 관객은 마치 창조주처럼 도태될 개체와 선택될 개체를 판단함으로써 자연의 과정처럼 종의 진화형태를 결정하는 변수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심미적 관점에서 이루어진다(가장 아름다운 것을 선택). 이 작품은 관객(인간)의 미적 감각과 작품 자체(컴퓨터)의 창조적 능력에 의해 진화하는 하나의 계를 형성해나간다.

예술가이자 웹사이트 기획자 혹은 개발자로 활동하는 작가중에는 제인 프로핏(Jane Prophet)이 있다.런던 웨스트민스터대학(University of Westminster London) 미디어학 교수로 있으며 유명한 ‘테크노 스피어(TechnoSphere)’ 사이트를 기획하기도 한 그녀는 설치형태로 된 작업과 함께 웹 아트적인 작업을 병행한다. 그녀는 최근에는 인터액티브한 내러티브와 사이보그 신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스웜'(swarm. http://www.ucl.ac.uk/slade/swarm)은 웹 아트 작업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벌들의 무리가 이동하면서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곡선을 유전 알고리듬에 의해 보여준다. 접속자가 마우스를 이동하는 데 따라서 이 곡선의 모양이 변화한다. 그러나 마우스가 이 무리들을 이끈다기 보다는, 마치 실제 꿀벌들이 꽃에 접근하듯이, 마우스를 따라서 무리들이 움직여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곤충의 무리라는 형태가 갖는 특성, 즉 개체를 넘어선 융합, 그리고 끊임없는 흐름 혹은 과정이라는 면에 관심을 갖고있는 작가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UCLA의 교수인 미디어 아티스트 레베카 알렌(Rebecca Allen)도 미술담론과 미술외적인 담론을 넘나드는 작가라고 할수 있다. 그가 프로그래머들과 공동으로 만든 컴퓨터 시스템 “emergence’를 이용한 작품 은 인공생명의 세계 속에서 인간의 존재가 무엇인지 질문하려는 의도를 갖고있다.
‘테크노 스피어(TechnoSphere)’나 ‘너브 가든(Nerve Garden)’과 같은 사이트들은 공동 웹프로젝트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이들 프로젝트는 웹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며, 그만큼 관객들과의 상호작용에 있어서는 한층 더 넓은 저변을 갖는다. 가상의 생태계 테크노스피어(http://www.technosphere.org.uk)에 접속한 관객-접속자는 자신의 이 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생물체를 만들어 가상의 생태계에 풀어놓을 수 있다.

준비된 생물체의 부분들 중에서 원하는 것을 선택하여 조합하고 초식생물이냐 육식생물이냐도 정할 수 있다. 이 생물체들은 생태계 속에서 스스로 먹이를 찾아먹고 짝을 짓고 번식하며 살아간다. 생물을 풀어놓은 사람은 수시로 여기 와서 자신의 생물이 얼마나 자랐고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검색해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물체들로부터 수시로 근황을 알리는 메일을 받게 된다. 이 사이트는 기획자인 제인 프로핏 외에도 많은 엔지니어들과 프로그래머들의 협력으로 만들어졌다.

‘너브 가든(http://www.biota.org/nervegarden)은 3D 디지털 식물들을 웹상에서 키울 수 있는 프로젝트이다. 너브 가든이라고 명명된 가상의 섬에서 접속자들은 그곳에 여러 종류의 식물들을 심고 그들이 자라가는 상황을 볼 수 있다. 이 가상의 정원은 DigitalSpace Corporation의 최고 경영자이며 Contact Consortium의 이사인 브루스 다머와 토드 골드바움에 의해 기획되었으며, 가상세계에서 생명체를 체험하게 하는 프로젝트 그룹 Biota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너브 가든 속의 생명체들은 환경과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스스로 생장, 증식, 진화한다. 이 프로젝트 역시 현실의 자연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기능면에서는 유사한 생태계를 만들어냄으로써 인공생명의 또 다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Fusebox Artists의 웹 프로젝트 ‘Temple of Alife'(http://alife.fusebox.com)는 접속자의 촉매에 의해 스스로 움직이면서 복잡한 패턴을 만들어내는 일련의 프로그래밍 작품들을 웹상에 올려놓고 있으며, 접속자로 하여금 “생명의 의미는 무엇인가?” “생존의 목적은 존재하는가?” 등의 질문을 던져보게 하고 있다. 첫화면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들의 관심사는 사용자와 컴퓨터 시스템 간의 상호작용만이 아니라 컴퓨터 시스템 내의 상호작용이다.

한국에는 아직 인공생명 예술가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없다고 봐야한다. 물론 인터넷상의 아마추어적 작업이나 기술적인 테두리 안에서 제작된 인공생명체들은 있지만, 미술의 담론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인공생명 예술의 방법론적인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지는 않더라도 환경과의 적극적인 반응, 작품이 주체가 되는 상호작용성 등 인공생명 예술의 미학을 반영하는 작가들은 그 숫자가 적긴해도 조금씩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최우람 같은 작가는 주제나 목적의식에 있어서는 인공생명 예술에 상당히 근접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작업은 웹아트이거나 영상설치는 아니고 전통적인 조각에 가까우며 오히려 로봇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지만, 기계를 또 하나의 생명체로 간주하고 있으며 기계적 생명체의 창조를 작업의 테마로 하고 있다는 점, ‘기계 생명체’가 우리의 문명에 대해 가지는 새로운 의미와 존재양식을 정립함으로써 생명 개념의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의 작업은 생명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생명체를 만들어냄으로써 우리의 통상적인 관념에 균열을 내고 있다.

또한 한 인터넷 갤러리(http://gallery.zegob.co.kr/)에 전시되었던 김수정의 ‘DOT’ 시리즈도 초보적인 형태이긴 하지만 인공생명 예술에 근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DOT’ 시리즈는 점이라는 단순한 조형적 요소를 이용해서, 한편으로는 디자인적인 구성을 펼치면서 한편으로는 이 점들의 자유롭고 임의적인 운동이 만들어내는 형태들을 감상할 수 있게 만들어진 작품이다. 접속자는 마우스를 이용해서 이 점들을 드래그하거나 클릭할 수 있는데, 이를 촉매로 해서 ‘점들’은 아름다운 패턴을 그리면서 이동한다.

3) 인공생명 예술의 미학

인공생명 예술작품들은 때로 오락이나 시뮬레이션과 유사해보이며, 예술이라고 부를 만한 특징들을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이들의 상당수는 예술이냐 아니냐를 그렇게 엄밀하게 따지지 않으며, 굳이 예술임을 내세우지 않고 게임과 예술의 경계선에서 오가는 작업들도 많다. 그러나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 사이의 구분은 분명 존재한다고 보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작업이 예술일 수 있으려면(적어도 스스로를 미술담론 안에 위치시키는 경우에는) 그것이 일종의 메타 기능을 할 수 있을 경우라고 본다.

다시말해 인공생명 예술은 인공생명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문화적 담론과 인식에 대한 일종의 발언 혹은 비평으로 작용할 경우에만 예술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메타 담론은 어떤 식이든 우리에게 미학적 카테고리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미술이론가이며 작가인 사이먼 페니(Simon Penny)는 ‘Dawin Machine: Artificial Life and Art”라는 글에서 인공생명 예술의 미학적 특성을 두 가지로 들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상호작용성과’ ‘미메시스’이다. 상호작용성(interactivity)는 현대미술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고 포스트모던한 미술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인공생명 예술에서 상호작용성은 기존의 상호작용, 즉 관객과 작품 사이의 상호작용성과는 상당히 다른 점을 갖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그것은 한마디로 작품 스스로가 주인공이며 관객은 보조자 내지 촉매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상호작용의 성격이 전혀 미리 정해져있지 않으며 매번 다른 변수에 의해 다른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한 작품에서 중요했던 것은 관객이 ‘참여한다’는 그 자체이며, 그 참여의 현존성으로부터 새로운 시공간의 미학이 탄생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인공생명 예술에 관객의 역할은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한 작품 앞에서 관객의 주체성은 해체되고 재구성된다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인공생명 예술에서 주체성이란 이미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출발점 자체가 인간의 내면이 아니라. 보다 거시적 차원, 즉 환경, 구조, 혹은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내면을 다룬다는 것은 어떠한 예술이든 예술의 목적 중 하나지만, 이 경우는 상당히 다른 관점에서 논의된다. 인간의 내면은 작동하고 있는 시스템 속에서만 존재하고 변형되며, 그래서 초점은 결과물보다 결합방식에 가 있다. 인공생명 과학에서 다루는 생명체는 지적능력만을 가질 뿐 감정을 결여한 로봇이 아니라 감정 역시 완벽하게 갖춘 존재이다. 인공생명 예술에서 감정이나 정서는 불가해한 그 무엇이 아니라 시스템의 특정한 결합방식이다.

그리고 관객 혹은 접속자의 의도나 정서적 반응, 가치판단과 같은 요소들은 작품 외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가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이며, 이 요소들이 결합되는 방식 자체가 작품으로 제시된다. 그래서 주체와 객체 간의 이분법은 여기서 와해되며, 그것도 포스트모던한 작품에서 나타나는 것과도 상당히 다른 방법으로 와해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여기서 관객이란 일종의 재료일 뿐이며, 진정한 주인은 시스템 자체이다. 이 새로운 상호작용성의 미학은 이미 우리를 둘러싼 인공적 환경이 인간을 규정하기에 이른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포스트모던 작품은 인간의 선험적 자아를 해체하고 주체성을 전복시킴으로써 인간중심적 사고에 균열을 내는 데 일조했지만, 인공생명 예술은 인간성이나 인간적 세계 역시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이러한 시각에 대해서는 한편으로는 인간의 가치를 폄하한다는 비판의 시각도 나올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중심주의가 가져다준 각종 폐해에 대한 효과적인 교정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인공생명 예술의 시스템 속을 구성하고 그 요소들을 서로 결합하면서 흘러다니는 그 무엇을 들뢰즈식으로 ‘욕망이라고 말해본다면, 이 ‘욕망’의 진정한 주체는 관객도 작품도 작가도 아니다. 들뢰즈는 욕망을 인간적인 것으로 사고하는 데서 우선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페니는 인공생명 예술의 또 다른 미학적 특질을 ‘미메시스(mimesis. 모방)’라고 말한다. 예술이 자연의 미메시스라는 것은 플라톤 이래 오래된 미학사의 테제였지만, 현대에 와서 그 경구의 인기는 시들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페니는 미메시스는 짧은 모더니즘의 시대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미술의 중심과제였으며, 이제 새로운 미학의 중심테마로 복귀했다고 주장한다.

‘예술은 제 2의 자연이다”라고 하는 명제는 그리스 시대의 미술이나 인공생명 미술이나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시되는 미메시스는 외관의 미메시스가 아니라 내적 논리의 미메시스이다. 이 역시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자연의 외관을 그대로 본따는 것을 미메시스라고 부르지 않았다. 적어도 우수한 미메시스라고 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인공생명 예술의 미메시스는 자연의 외관에 대한 것이 아니라(예를 들어 테크노스피어의 생명체들은 전혀 유기체적인 외관을 갖고 있지 않다) 자연의 내적 구조나 작동원리의 미메시스이다.

그것이 고대미술에서부터 미술이 지향할 수 있는 최상의 경지였던 것처럼, 인공생명 예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이상화된 자연, 보편적인 자연의 구조를 모방한다. “가능한 바 대로의 자연”은 그래도 인공생명 과학의 모토이자 인공생명 예술의 모토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인공생명 예술은 어떤 측면에서는 근대를 뛰어넘어 다시 고전적인 세계관 속으로 복귀하는 듯한 측면마저 있다. 기호적 세계와 자연적 세계 간의 넘을 수 없는 간격 대신, 인공생명 예술은 그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세계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인공생명 예술이 갖고 있는 자연의 개념은 유기체적 자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기체적인 자연을 포함한 개념이다. 무기적인 자연은 유기적인 자연의 그림자나 부속물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자연이며, 이 매크로한 자연 속에서 유기적인 것(관객 혹은 접속자)과 무기적인 것(프로그래밍된 인공생명체)은 혼합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서로를 만들어낸다.
인공생명 예술에서 또 하나 논의해야 할 것은 작가의 위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작가의 죽음’을 선언하면서 수용자에 의해 계속해서 새롭게 읽혀지는 텍스트로서의 작품을 내세웠다. 인공생명 예술에서도 작가는 한편으로 창조자의 위치에서 내려온다. 그러나 그것은 작가가 작품에 완결된 의미를 부여하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만이 아니라 작품이 작가 없이도 계속해서 발전하고 구성된다는 점에서 나온다.

작가의 역할은 단순히 작품이 움직일 수 있는 전제를 마련해주는 것 뿐이다. 그리고 전문적인 테크놀러지의 도움없이는 많은 경우 작품이 구상되기 힘들기 때문에 작가들은 종종 엔지니어, 프로그래머, 디자이너들과 함께 일하며, 1인에 의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형태는 거의 없다. 이런 측면에서 작가의 위치는 매우 축소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반대로 작가의 위치가 아주 격상된다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작가는 하나의 세계가 구성되고 영위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품의 모든 부분을 하나 하나 창조하지는 않지만, 작품이 살아갈 수 있는 세계 자체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 개념을 연상케한다. 작가는 엔지니어이며 프로그래머이고 예술가이며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창조주’이다.

3, 결론

Fuse Box Artists, “Temple of A-life”

새로운 상호작용성의 미학을 갖는 인공생명 예술은 인간의 주체성을 넘어선 거시적 세계, 미메시스에 의해 재현된 자연의 구조를 표현한다. 이런 측면에서 인공생명 예술은 좁은 의미의 인간적 담론을 넘어서는 새로운 비전을 담아내는 매우 철학적인 장르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작품이 많지는 않다고 보인다. 다시 말해 현재 예술적 차원에서 제대로 메타 담론을 담아낼 수 있는 작품의 수는 많지 않으며 아직은 테크놀러지를 도입하고 실험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생각된다.

…………………………………………………………………………………………………………………………………▲top

하지만 테크놀러지에 대한 기계론적 접근방식에서 벗어나고 있는 작가들이 조금씩 눈에 띠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인간이나 문명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기해주는 뛰어난 인공생명 예술을 접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인공생명 예술에 대해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몇 가지 비판을 검토해보자. 우선 예술을 오락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이 예상된다. 이것은 방금 말한 것처럼 아직 그 예술적 성과가 무르익지 않아서 나오는 문제점이지 인공생명 예술 자체가 오락과 구별되지 않기 때문은 아니라고 본다. 또한 인간적 가치나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한다는 비판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인공생명 과학이 생명에 대해 가지는 태도는 생명이 단지 기계적인 존재라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개념 자체를 재정의하려는 것이며, 생명의 개념을 확장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인공생명 예술 역시 마찬가지의 지향점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인공생명 과학자들은 생명의 본질에 대한 정답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컴퓨터 바이러스는 생명인가? 그 왕성한 번식력과 자기보존의 능력, 항상성 유지의 능력은 분명 생명의 특징을 연상시킨다. 한편으로는 컴퓨터 바이러스를 생명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인간이 갖는 생명으로서의 가치가 폄하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가능한 것이다. 또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은 어떤 불변하는 독립적 실체가 아니며 인간성이나 인간의 감성, 감각 역시 변화한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다른 인간과 맺는 관계, 나아가서 인간 이외의 존재들과의 관계 없이 인간의 본질을 논한다는 것은 불충분할 뿐 아니라 무의미하다는 주장에 동의해볼 수도 있다면,
인공생명 예술의 미래가 가질 수 있는 미학적, 사회적, 철학적 함의는 결코 가볍지 않을 지도 모른다.

(주). …………………………………………………………………………………………………………………………………

1. 프랙탈(fractal) : 만델브로트에 의해 발견된, 비선형계에서 나타나는 현상. 무한하게 세분되고, 무한한 길이를 가지며, 정수가 아닌 분수 차원을 갖고 있고, 규모가 작아지는 방향으로 스스로 닮아가며, 간단한 반복작용을 계속하여 간단히 만들어낼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프랙탈 기하학은 무한과 혼돈을 표현하는 새로운 기하학이다.
2. 유전 알고리듬(Genetic Algorithm) : 존 홀랜드(Holland)에 의해 창안. 자연도태의 과정을 기계에 작용시키는 기법으로, 환경 속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놓은 기계의 변형을 기계의 집단으로부터 생생서키는 방법이다. 알고리듬은 잘 정의된 처리 절차를 유한단계의 과정으로 나열한 것을 말하며 수학의 귀납적 규칙이 그 본보기이다. 알고리듬이 적용된 가장 간단한 예는 제곱수의 집합이다.(0, 1, 4, 9, 16..) 알고리듬이 반복될 수록 시스템은 무한하게 커지고 복잡해진다.
3. L-Systehm: 린덴마이어가 60년대에 고안해낼 수학적 모델로써, 발달과정에 있는 세포의 상호작용을 나타내기 위해 고안되었다. L 시스템은 기호의 연속체를 다시 써나가는 규칙의 집합체로 구성된다.
(이 용어해설들은 이인식 저, 사람과 컴퓨터(까치, 1992)에서 인용함)
(참고문헌)Amy M. Youngs, “The Fine Art of Creating Life”, Leonardo, vol. 33, no. 5, 2000, pp. 377 – 380
Simmon Penny, “The Darwin Machine, Artificial Life and Art”, New Formations, no. 29, fall 1996
이인식 저, 사람과 컴퓨터, 까치, 1992

출처 http://art.centerworld.net/discourse/sub.asp
* 박승호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6-26 00:33)

답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