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럭서스 / 미술사전

플럭서스 ( FLUXUS )

미술사전

“플럭서스(FLUXUS)”는 흐름, 끊임없는 변화, 움직임을 뜻하는 라틴어로 1960년 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일어난 국제적 전위예술운동이다. 이 용어는 1961년 뉴욕의 갤러리 A/G에서 행한 일련의 강연회를 알리는 초청장 문구에서 조지 매키우너스가 처음 사용했으며 여러나라의 언어에서 ‘흐름’이나 ‘변화’란 의미를 내포하는 플럭서스 미술은 양식이라기 보다는 마음의 상태에 가깝다. 독일에서 시작되어 뉴욕과 북구의 수도인 여러 도시로 확산되었으며 일본과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도 비슷한 활동이 독자적으로 펼쳐졌다. 이 운동은 대중문화에 의존하지 않고 아방가르드 미술가와 음악가와 시인들이 창조해 나갈 새로운 문화를 추구했으며 게릴라 극장과 거리 공연, 전자음악 연주회 같은 초기의 플럭서스 이벤트는 1960년대와 연결지어 생각되는 성적 충동과 무정부주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플럭서스 미술가에게는 사회적 목적이 미적 목적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들의 주된 목적은 부르조아적인 판에 박힌 미술과 생활을 혼란시키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예술형식과 스타일을 벗어난 예술가들의 생각 을 널리 알리기 위해 계획되었던 잡지의 제목으로서 매키어너스가 선택했다. 그 잡지는 발행되지 못했지만 플럭서스란 명칭은 1962년 매키어너스가 비스바덴에서 조직한 최초의 콘서트 시리즈인 <새로운 음악>에서 처음 사용되어졌다. 플럭서스는 미래파나 다다이즘, 또는 초현실주의와 같이 하나의 양식이 아니라 하나의 심리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공동 목표를 위해 협력하는 조직적 화가 집단이라기 보다는 예술 시장과는 거리가 먼 예술가 개개인과 아웃 사이더들이 모인 지극히 자유로운 집단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해 낸 행위와 창조성의 형식들은 오늘날 당연히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생긴 것이다.

1964년 부터 플럭서스는 베를린에 확산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서유럽에서 있었던 초기의 플럭서스 페스티발들이 끝난 다음 이었다. 당시 서베를린의 문화적 상황은 겉으로는 개방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상상력의 빈곤에 빠져 ’20년대의 황금기’에 대한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전주의적 취향의 문화를 지향하며 학문적인 지방예술을 답습하고 있어서, 플럭서스의 출현은 실로 시기적절한 것이었다. 플럭서스 예술가의 대부분은 뉴욕(New York) 소호(Soho)지구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1963년에 조지 매키어너스(Geo rge Maciunas)가 플럭서스의 본부를 창설했고, 딕 히킨즈(Dick Higgins)는 유명한 썸씽 엘스 프레스(Something Else Press)를 창설하여 1964년부터 1974년까지 중요한 플럭서스의 책들을 발간하였다.

유럽의 주요한 플럭서스 중심지에서는 플럭서스 페스티발 후에 콘서트나 전시회가 따르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베를린의 경우에는 그 순서가 역으로 진행되었다. 즉, 플럭서스 예술가들에 의한 단독 저녁 집회들이 진행되면서 점점 더 큰 규모의 페스티발로 발전되었고 마지막에는 매키어너스(Maciunas) 자신이 조직한 1976년의 <플럭스 합시코드 콘서트>로 절정을 이루었다.

1964년 이래 플럭서스란 이름으로 불려진 현상은 세계 여러 곳에서 동시에 나타났다. 이렇게 각기 다른 대륙과 도시에 사는 예술가들 사이에서 동시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사이의 몇몇 여행가들에 의한 전파나, 이제껏 만난 적이 없었던 예술가들 사이에 편지에 의한 교신으로 가능했으므로, 우편은 개념을 전세계적으로 교환하기 위한 매체가 된 것이다.

레이 존슨 같은 플럭서스 미술가들은 ‘우편 미술’을 시도했는 데 이는 우편 제도를 전달 방법으로 이용하는 미술로 엽서형태의 콜라주와 그 밖의 소규모 작품을 예로 들 수 있다. 플럭서스에서 탄생시킨 또 다른 미술은 때로는 우편 미술과 협력하여 행해지는 ‘고무도장 미술’이다. 즉, ‘메일 아트(Mail Art)’와 ‘개념 미술(Conceptual Art)’이 태어났던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미술은 뉴욕에서 맥로우와 영이 매키어너스를 위해 편집한 ‘앤솔로지(An Anthology)’와, 쾰른에서 보스텔이 만든 ‘데꼴라쥬(De-coll/age)’잡지 등을 통해 처음 소개되었다.

플럭서스 미술가들의 전형적인 제작 방식은 다양한 재료를 혼합하여 사용하는 것이었으며 많은 미술 형태가 동시에 그리고 불협화음 처럼 전개되는 플럭서스 이벤트는 동시대에 등장한 액션이나 후에 나온 해프닝과 비슷한 경우도 있지만 보다 유머러스하고 개방적인 경향을 특징으로 한다. 플럭서스 이벤트는 산책하거나 나무를 태우는 단순한 동작에서부터 미니 텔레비젼으로 만들어진 브래지어외에는 거의 걸친 것이 없는 샬로트 무어맨이 첼로를 연주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무어맨과 백남준의 공동작품과 같이 대중의 관심을 끈 이벤트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플럭서스는 공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러나 플럭서스의 첫 출현 이후 25년이 지난 1987년 현재에 이르러서도 미술가들은 플럭서스를 이해하는데 혼란을 겪고 있는데, 그것은 플럭서스가 일정한 범주로 제한되거나 목록화 할 수 없기 때문임. 플럭서스를 이끌어 나가던 많은 작가들은 플럭 서스에는 어떤 하나의 목적이나 방법이 없으며 공통점이 있다면 이제까지의 예술과 몇몇 낡은 기존의 범주들이 더 이상 쓸모없어 졌다는 깨달음일 것임. 이러한 공통점을 가진 개인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발표하기 위해 서로 협력했던 것을 플럭서스라 할 수 있다.

플럭서스의 초기 이벤트들은 비교적 극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으나, 점차로 극적, 허구적 요소가 삭제되어가면서 구체적이 고 실제적인 시공간을 강조하는 매우 단순한 개인적 행위로 환원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예술과 현실사이의 간격을 없애고자 했으며, 연극, 음악, 미술, 문학, 무용 등으로 뚜렷이 구분된 예술 매체간의 인습적 경계를 무너뜨리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상이한 매체를 결합시킨 ‘인터미디어’, 즉 음악과 시각예술, 무대예술과 시를 융합한 통합 양식개념을 발전 시킨 것이다. 즉, 플럭서스 이벤트에는 대개 음향효과와 전위음악이 인체의 동작과 다양한 ‘비예술적’ 재료들과 함께 결합되어, 음악과 무대예술과 같은 시간예술의 특성이 도입됨으로써 예술작품은 더이상 물적 대상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성되었다가 소멸되는 동적인 과정으로 대체되었다. 이것은 기존미술에 있어서의 정적인 작품 개념을 뒤엎은 것이다.

예술작품을 과정으로서 규정하는 경향은 포스트모더니즘 전반에 공통된 것이기도 하지만 플럭서스의 경우에는 특히 시간성이 강조되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성, 변화하고, 소멸하는 불확정성의 미학 또는 소멸의 미학이 그 특색이라 하겠다. 이러한 플럭서스의 소멸의 미학이 예술 오브제의 생산과는 무관한 듯 보이는 것은 사실이며, 작품의 아이디어나, 공연과정을 기록한 영상, 문서 등의 물적자료는 작품의 증거물은 될지언정 과거 예술작품과 같은 감상의 대상으로서의 가치가 없음도 사실이다. 플럭서스 미술작품은 기상천외하며 부조리한 것 같지만 고정관념을 타파하려는 그 밑에 깔린 태도는 후대의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개념미술과 퍼포먼스 아트의 등장에 선도적 역할을 했다.

* 박승호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6-26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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