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럭서스 -베를린, 1964-1976 / Rene Block

플럭서스/ Rene Block

플럭서스 -베를린, 1964-1976

플럭서스「Fluxes」 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거나, 그것에 대해 평가를 내리려 시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리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러한 어려움을 접어두더라도, 필자가 베를린에서 관계했던 플럭서스 및 그와 관련된 경향「플럭시즘 Fluxism」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미리 말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베를린이라는 지역의 특수성과, 플럭서스가 이후 세대의 화가, 영화제작자, 작곡가, 연출가 들에게 미친 영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것이 진지하게 취급되지 않고 무시되는 풍토와 관련이 있다. 이 점은 플럭서스가 미래파나 다다이즘 또는 초현실주의와 같이, 하나의 양식이 아니라 하나의 심리 상태이며, 공동 목표를 위해 협력하는 조직적 화가집단이라기보다는 예술시장과는 거리가 먼 예술가 개개인과 아웃사이더들이 모인 지극히 자유로운 집단이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해낸 행위와 창조성의 형식들은 오늘날 당연히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음은 물론이다.
플럭서스가 일반대중을 혼란 속에 몰아넣고 관객들을 분노케 했다면, 그것은 관객을 예술 창작 과정 속에 직접 참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고 한 요셉 보이스 Joseph Beuys의 선언이 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개는 예술 제작 과정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의 눈과 마음속에만 존재하게 마련인 퍼포먼스나 기록된 개념으로서의 예술작품은 관객 쪽에 창조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토마스 슈미트 Tomas Schmit는 이렇게 말한다. “플럭서스로부터 배운 교훈은, 조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건축으로 만들 필요가 없고, 회화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조각으로 만들 필요가 없으며, 드로잉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은 회화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기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드로잉으로 그릴 필요가 없으며, 머리 속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구태여 기록할 필요조차도 없는 것이다! 플럭서스에 작고 단순하고 짧은 작품들이 많았던 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다.”
플럭서스가 베를린에 확산된 것은 1964년에 이르러서인데, 그때는 이미 서유럽에서 있었던 초기의 플럭서스 페스티벌들이 끝난 다음이었다. 그것은 베를린 장벽 -바로 그때 보이스가 ‘비례를 완벽히 하기 위해서’ 3센티미터 높여야 된다고 주장했던- 의 갈라진 틈 사이로 스며들어왔다. 당시 서 베를린의 문화적 상황은 겉으로는 개방적인 듯 보였지만, 실상은 상상력 빈곤에 빠져 ’20년대의 황금기’에 대한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전주의적 취향의 문화를 지원하며 아카데믹한 지방적 예술을 답습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플럭서스의 출현은 실로 시기 적절한 것이었다.
플럭서스 예술가들의 대부분은 뉴욕의 소호 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그곳에서 1963년에 조지 매키어너스 George Maciunas가 플럭서스의 본부를 창설했고, 딕 히긴즈 Dick Higgins는 유명한 섬씽 엘스 프레스 Something Else Press를 창설하여 1964년부터 1974년까지 중요한 플럭서스의 책들을 발간했다. 그러나 플럭서스 회고전인 「1962 비스바덴 플럭서스 1982」의 카탈로그에 실린 플럭서스의 연대기를 보면 베를린이 두번째로 자주 언급되는 도시라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유럽의 주요한 플럭서스 중심지에서는 플럭서스의 페스티벌 후에 콘서트나 전시회가 따르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베를린의 경우에는 그 순서가 역으로 진행되었다. 플럭서스 예술가들에 의한 단독 저녁집회들이 진행되면서 점점 더 큰 규모의 페스티벌로 발전되었고 마지막에는 매키어너스 자신이 조직한 1976년의 「플럭스 합시코드 콘서트」로 절정을 이루었다.
1964년 이래 플럭서스 FLUXUS란 이름으로 불려진 현상은 세계 여러 곳에서 동시에 나타났다. 미국에서는 존 케이지 John Cage, 라 몬테 영 La Monte Young, 잭슨 맥로우 Jackson MacLow, 조지 브레히트 George Brecht, 매키어너스, 로버트 왓츠 Robert Watts, 히긴즈, 앨리슨 노울즈 Alison Knoules, 테리 라일리 Terry Riley 등이 활동했고, 프랑스에서는 로베르 필리우 Robert Filliou, 에메트 월리엄즈 Emmett Williams, 다니 엘 스푀리 Daniel Spoerri, 벤 보티에 Ben Vautier,장 자끄 르벨 Jean-Jacques Lebel 등이 중심이었다. 네덜란드와 덴마크에서는 빌렘 데 리데Willem de Ridder, 쾨프케 Arther「Addi」Koepcke, 헤닝 크리스찬센 Henning Christiansen, 에릭 안데르센 Eric Andersen등이 활동했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밀란 크니쟉 Milan Knizak이 중심이었으며, 독일의 쾰른-뒤셀도르프 지역에서는 백남준, 보이스, 볼프 보스텔 Wolf Vostell, 슈미트, 벤자민 패터슨 Benjamin Patterson 등이 활동했다. 일본에서는 다께히사 고스지 Takehisa Kosugi, 아이 오 Ay-0, 오노 요꼬 Ono Yoko, 시오미 시에꼬 Shiomi Shieko, 사이또 다까꼬 Saito Takako 등이 있었다. 초기의 집회장소는 뉴욕의 경우 「사회 연구를 위한 새로운 학교」에서 있었던 케이지의 강의였고, 독일 라인지방의 경우에는 쾰른에 있는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Mary Bauermeister의 스튜디오에서 열렸던 스톡하우젠 Stockhausen의 퍼포먼스들이었다.
돌이켜볼 때, 각기 다른 대륙과 도시에 사는 예술가들 사이에 정보망이 그렇게 신속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놀랍다. 새로운 소식은 그들 사이의 몇몇 여행가들에 의해 전파되었다-케이지는 다름슈타트를 방문하여 새로운 음악에 대해서 여름 특강을 했고, 디터 로트 Dieter Roth는 미국과 유럽을 전전했으며, 보스텔은 파리와 쾰른을 왕래했고, 월리엄즈는 파리와 다름슈타트를 오가며 활동했다. 서로간에 주소가 교환되었고, 이제껏 만난 적이 없었던 예술가들 사이에 편지에 의한 교신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우편은 개념을 전세계적으로 교환하기 위한 매체가 되었고, 이 전 플럭서스 단계에서 「메일 아트 mail art」와 「개념 미술Conceptual art」이 태어났던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의 미술은 뉴욕에서 맥로우와 영이 매키어너스를 위해 편집한 「앤솔로지 An Anthology」와 쾰른에서 보스텔이 만든 「데꼴라쥬 de-coll/age」잡지들을 통해 처음 출판되었다.
그러나, 플럭서스의 첫 출현 이후 25년이 지난 1987년 현재에 이르러서도 “플럭서스란 무엇인가?” “플럭서스는 무엇을 추구하는가?” “플럭서스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들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하기란 불가능하다.
존 케이지를 중심으로 조지 매키어너스가 이끄는 그룹으로부터 탄생한 플럭서스는 1962년 무렵부터 1966년 사이에 스캔들을 불러일으키곤 했던 일련의 콘서트를 통해서 절정기에 이르게 된다. 플럭서스가 일종의 그룹이라는 개념은 이 시기가 남긴 잔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시기의 콘서트들은 대개가 같은 예술가들에 의해 공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키어너스에 의한 출판활동과 조직화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플럭서스가 하나의 그룹으로서 존재한 적은 결코 없다. 아마도 그 이유는 매키어너스 자신이 익명적이고 집단적인 「예술」제작 –오락성(개그)과 유용성(디자인)을 동시에 지닌- 에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서명과 제작 일자가 씌어 있지 않은 1960년대의 플럭서스 작품 복제판은 다량으로 복제되어 상자나 케이스 속에 들어 있는데, 이것들은 기성제도와 예술시장에 대한 플럭서스의 위와 같은 반항적 태도의 산물이다.
플럭서스(Fluxus :흐름, 끊임없는 변화, 움직임을 뜻하는 라틴어)란 명칭은 1960년 무렵 전통적인 예술 형식과 스타일을 벗어난 예술가들의 생각을 널리 알리기 위해 계획되었던 잡지의 제목으로서 매키어너스가 선택한 것이다. 그 잡지는 발행되지 못했지만, 플럭서스란 명칭은 1962년 매키어너스가 비스바덴(이곳에서 그는 미군에 소속된 디자이너로 잠시 일하고 있었다)에서 조직한 최초의 콘서트 시리즈인 「새로운 음악 Neueste Music」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미술사가들은 플럭서스를 이해하는 데 아직도 혼란을 겪고 있다. 왜냐하면 플럭서스는 일정한 범주로 제한되거나, 목록화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플럭서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점이다. 적어도 무언가 전문가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나는 내가 가는 곳 어디에서나 플럭서스를 본다”라고 로버트 왓츠는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브레히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플럭서스에는 목적이나 방법에 있어서의 일치점을 추구하려는 시도가 결코 없었다. 다만 무언가 이름 붙일 수 없는 공통점을 지닌 개인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발표하고 공연하기 위해 힘을 합쳤던 것이다. 아마도 그 공통점이란 예술의 영토는 관습적으로 생각되어 왔던 것보다 훨씬 넓다든지, 예술과 몇몇 낡은 기존 범주들이 이제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는 깨달음일 것이다.” 또한 맥로우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플럭서스 콘서트와 페스티벌들에서 작품을 공연한 우리들 가운데 매키어너스의 반예술적이고 ‘리얼리스틱한’ 이념에 동의한 사람은 비교적 드물었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리니치 빌리지 12번가에 위치한 「사회연구를 위한 새로운 학교」에서 존 케이지가 가르쳤던 실험 음악 강의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그의 강의는 1958년 무렵부터 1960년 5월까지 계속되었다. (다음 해에 그 강의는 리차드 맥스필드 Richard Maxfield가 맡아 그의 집에서 전자 음악 코스로 진행되었는데, 당시 라 몬테는 대학원 과정의 일부로서 이 코스를 수강하러 뉴욕에 왔다.)
정식 수강생 외에도 케이지는 개인적으로 아는 예술가들을 강의에 초대했는데, 예를 들어, 이치야나기와 내가 참여했고, 자신이 흥미를 가진 작업을 하고 있던 조지 브레히트 등도 서신 교환을 통해 참여하고 있었다. 그 밖에도 이 강의에는 작곡가이자 사진가인 로버트 코스모스 새비지 Robert Cosmos Savage, 해프닝 예술가 알 한센 Al Hansen과 알란 카프로우 Allan Kaprow, 시인 작곡가 극작가인 딕 히긴즈, 맥스필드 등이 참여했다. 주로 케이지를 통해서 우리가 공유하게 된 주요한 개념들은 선불교(仙佛敎), 역경(易經), 에릭 사티, 마르셀 뒤샹 등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매키어너스는 플럭서스를 하나의 운동으로 정착시키고자 했고 확고부동한 목표를 가지고 이끌어 나가고자 했다. 플럭서스 콘서트에서 공연되거나 플럭서스 출판물로 발행된 적이 있는 우리들의 모든 작품에 대해 그는 오랫동안 플럭서스의 이름으로 권리를 주장했다. 그는 그런 작품들을 「플럭서스 작품」으로 지정하여 그 리스트를 작성하고, 그 리스트에 올라 있는 작품들을 일정 수 이상 포함하는 프로그램은 「플럭서스 콘서트」라고 불려야 한 다는 명령을 내렸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러한 명령에 구애를 받진 않았지만, 그것은 우리를 짜증스럽게 했다.

같은 카탈로그에 기고한 글에서 슈미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플럭서스는 뉴욕의 퍼포먼스와 라 몬테 영과 조지 브레히트 같은 예술가들의 개념적인 활동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매키어너스가 비스바덴으로 옳긴 이후 플럭서스는 스스로를 당시 미술계의 주류 속에서 안주하고 있던 표현주의나 추상 계열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위한 무한한 가능성의 저장고로 여겼다. (비스바덴 페스티벌의 프로그램과 최초의 발행물 광고에서 분명히 나타났듯이) 그러나 곧 그것은 특정한 집단과 특정한 활동을 뜻하는 것으로 압축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매키어너스가 뉴욕으로 돌아온 후에는 곧 이것저것이 뒤섞인 불협화음으로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플럭서스에 관해서 그리도 산만한 개념들이 많다는 사실이나, 사람마다(플럭서스에 실제 참여했던 사람들까지도) 플럭서스에서 저마다 다른 무엇을 찾아내고, 오늘날에는 전혀 엉뚱한 사람들이 플럭서스를 들먹이며 플럭서스와의 연관을 주장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위와 같은 발언들(히긴즈와 월리엄즈의 비슷한 발언을 포함해서)에서 공통적인 점은 매키어너스가 원했듯이 플럭서스를 명확히 규정된 사회적, 또는 반(反)예술 관습적 목표로 한정시키는데 찬성하지 않고, 플럭서스의 작곡, 이벤트에 대한 지시와 같이 열려진 해석을 인정하려는 것이다. “나의 이벤트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는 나의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은 작은 깨우침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1959-1960년에 제작된 백 개의 이벤트-작은 카드로 인쇄되어 상자 속에 넣어 발행된 「워터 얌 Water Yam」「1966, FLUXUS판」-에 대해서 조지 브레히트가 한 말이다. 쾨프케 역시 1958-1964년에 제작된 123개의 작품들-1972년에야 「계속하다 Continue」라는 제목으로 발간되었다-에 대해서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실로 플럭서스는 친구들이 친구들을 위해서 만든 무엇이었다. 1968년 베른과 뒤셀도르프에서 열렸던 전시회의 이름이「친구들Freunde, Friends」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전시에는 로트, 스푀리, 앙드레 톰킨스 Andre Thomkins, 윌리엄즈, 필리우 등이 참가했다. 콘서트를 보러 온 얼마 안 되는 관객들도 대부분이 친구거나 동조자들이었다. 슈미트는 이렇게 말한다.

6개월 동안에 루드비히 고제비츠Ludwig Gosewitz, 아더 쾨프케, 에메트 윌리엄즈, 벤 패터슨, 조지 매키어너스, 앨리슨 노울즈, 딕 히긴즈를 알게 되고(이것은 순전히 그 직전에 우연히 백남준을 만난 덕분이다), 다음에는 조지 브레히트를 알게 됐다는 것-바로 그것이 진짜 페스티벌이었다!

당시 다른 사람들의 기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매키어너스의 지칠 줄 모르는 추진 활동을 제외하고) 당시의 그 모든 퍼포먼스 등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원동력이 됐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달리 어디서 원동력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인가. 돈 한 푼 벌 수 없었고, 명성을 얻을 수도 없었으며, 미술계는 우리를 무시했다. (단지 장 피에르 빌헬름 Jean Pierre Wilhelm과 롤프 예를링 Rolf Jahrling 만은 특별한 예외였다.) 신문들은 다리가 다섯 달린 송아지나 왕자의 결혼식 따위가 실린 잡록 페이지에 엉터리 기사를 두어 줄 싣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목표에의 헌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던가. 매키어너스의 경우에는 확실히 그러한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전투적인 타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싸움이 벌어졌다. 후일 당국에 대항한 싸움이 벌어졌고, 플럭서스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싸움이 벌어졌다. 베를린에 있던 우리들은 보스텔과 보이스 사이에 벌어진 결말이 나지 않는 끝없는 싸움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했었다. 이 싸움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하겠다. 베를린의 플럭서스는 다른 도시에 비해서 훨씬 더 보이스의 역할이 중대했다. 그의 이벤트는 베를린의 예술계에 혁신적 국면을 열었다.
1964년 10월 27일에 열린 베를린에서의 최초의 집회는 스탠리 브라운 Stanley Broutran 에게 바쳐진 것이었다. 당시 나는 우리의 활동비를 벌기 위해 밤에는 식당의 웨이터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를린의 화가인 회디케 K.H.Hodicke가 내 대신 역으로 그를 마중 나갔다. 그날 저녁 집회는 말하자면 브라운을 위한 환영행사였던 셈이다. 그날 저녁의 이벤트는 그의 「이쪽으로 가시오,브라운씨 This Way Brouwn」의 개념에 기초한 것이었다. 브라운의 구상에 따르면,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장소로 가는 길을 묻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 달라고 부탁하면서, 시내를 이리저리 걸어 다니게 되어 있었다. 나중에 그는 그 드로잉에 서명을 하고 스탬프를 찍게 되어 있었다. 그날 저녁 브라운은 베를린의 어딘가에 있었는데, 그는 프로벤슈트라세의 지하실에 자리잡은 나의 최초의 화랑에 모인 관객들과 워키토키로 대화하면서 관객들의 지시에 따라 화랑으로 찾아오게 되어 있었다. 베를린 거리를 통한 가상적 드로잉을 위한 매체의 역할을 하려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그러나 그가 마침내 화랑에 도착했을 때-한 베를린 비평가가 말했듯이 ‘엉뚱한 곳을 헤매게 만든 보상으로 교회를 여러 군데 순회시킨’ 후-이벤트가 시작될 무렵 화랑을 꽉 채웠던 많은 관중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을 뿐더러 화랑은 폐허가 되어있었다. 해프닝을 기대하고 있었던 관중들은 자신들이 속았다고 생각하고는 화랑을 파괴해 버렸던 것이다.
최초로 플럭서스라는 명칭이 붙여진 1964년 12월 1일의 두 번째 집회에 이들 관객은 나타나지 않았다. 보이스는 뉴욕의 로버트 모리스 Robert Morris와 동시에 여덟 시간 동안 플럭서스 노래를 공연하기로 계획했다. 보스텔은 베를린 일간지 『데어 타게슈피겔』에 “나는 전달자다, 나는 전언한다!”라는 제목 아래 이 이벤트를 소개했다.

르네 블록 화랑에서 열린 두번째 저녁 집회에는 요셉 보이스에 의한 상황, 또는 환경, 또는 공간(그 명칭은 무엇이라도 좋다)이 공연되었다. 그것은 마치 메아리처럼(메아리도 일종의 창조 원칙이다) 뉴욕에서 로버트 모리스가 공연한 것과 동시에 진행되었는데, 제목은 「일급 플럭서스 노래 The Boss Fluxus Song」였다. 이 퍼포먼스는 오후 4시부터 자정까지 계속되었다.
거기서 무엇을 볼 수 있었던가.

5×8미터 크기의 방 안에는 밝은 조명 아래 담요를 둘둘 만 것이 바닥에 대각선으로 놓여 있었고, 그 속에 보이스가 들어 있었다. 뒤셀도르프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인 보이스는 1963년 이래 국제적 플럭서스 그룹의 일원으로 자처해 왔으며, 1962년 조지 매키어너스는 그의 플럭서스 페스티벌을 통해서 이들과 함께 새로운 음악, 새로운 개념을 위한 이 모든 국제적 노력이 돌파구를 여는데 기여한 바 있다.
담요 두루마리의 길이는 2.25미터, 너비는 46센티미터였는데, 담요의 양 끝에는 마치 보이스의 몸뚱이에서 연장된 것처럼 하나는 너비 24센티미터, 길이 64센티미터이고, 다른 하나는 너비 13센티미터, 길이 70센티미터인 두 마리의 죽은 토끼가 내밀어져 있었다. 방의 왼쪽 벽에는 바닥과 평행으로 길이 167센티미터, 두께 7센티미터의 독일 마가린으로 만든 기름덩어리가 붙어있었다.
그 위에는 바닥에서 165센티미터 되는 높이에 6×7센티미터 크기의 머리카락 뭉치가 있었고, 그 왼쪽에는 각각 너비 1.5센티미터의 손톱 두 개가 붙어 있었다. (이것들은 미분화된 과거의 물신(物神)일까)방의 왼쪽 구석에는 30×30센티미터 크기의 기름덩어리가 놓였고, 입구의 왼쪽과 오른쪽에도 기름덩어리들이 놓여 있었다. 오른쪽 구석에도 5×5센티미터 크기의 기름덩이가 놓여졌다. 보이스가 들고 있는 두루마리의 왼편에는 길이 178센티미터의 굵은 구리봉을 담요로 감은 또 다른 두루마리가 놓여 있었다. 방의 오른편에는 앰프가 있었다. 방안의 환경을 구성한 사실들에 대한 설명은 이쯤에서 끝내겠다.
거기서 무슨 소리가 들렸는가.

담요 속에서 보이스는 마이크를 통해 불규칙한 간격으로 음향 메시지를 보냈고, 그 소리는 앰프로 크게 확성되었다. 우리는 그가 숨쉬고 한숨을 쉬고 목청을 가다듬고 기침하고 불평하고 쉿하는 소리를 내고 휘파람을 부는 것을 들었다-그것은 마치 소리로 구현된 어휘의 목록과도 같았다. 보이스에 따르면 그 소리들은 ‘두 마리의 죽은 토끼를 연상시킬 수 있는 원초적 소리’이다.
녹음기에서는 에릭 안데르센과 헤닝 크리스찬센이 작곡한 음악이 보이스가 내는 소리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면서 불규칙한 긴 간격을 두고 연주되고 있었다.
그 사이 관객들은 들어오고 또 나갔다. 때로는 신비로운 종교 의식에서와도 같이 경외감에 싸인 침묵이 흐르기도 했다. 그것은 의식(儀式)이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고, 마침내 일부는 자정이 됐을 때 보이스가 담요 속에서 기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직접적인 질문을 던졌다. 왜 당신은 베를린 장벽을 3 센티미터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는가. 보이스 : “두 종류의 인간이 베를린 장벽에서 맞부딪치고 있는데, 그들은 서로로부터 소외되어 별개의 행동양식을 발전시켰다.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나라는 우리 밖에는 없다!” 보이스는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
같은 시간에 뉴욕에서는 로버트 모리스가 담요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을까. 그에게는 어떤 질문들이 던져졌을까.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이날의 이벤트는 보이스와 그가 지닌 동기, 그리고 조각적 형태에 대한 그의 견해와의 직접적 대면이었다. 다른 관객에게는 단지 모이기 위한 또 다른 구실에 불과했다. 이 모임은 사회적 의미를 갖는가. 보이스의 비극적 ‘플럭서스 노래’가 그들에게 진정 하나의 수수께끼를 제기했던가. 때로 거의 그렇게 보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곧 무감각이 되찾아 들었다.
보이스 : “나는 전달자다, 나는 전언한다.” 그것은 제례적 의식일까. 그는 과연 담요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뉴욕에서 모리스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또한 그곳의 관객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곳과 저쪽 뉴욕의 죽은 토끼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죽은 토끼가 정말로 생각을 할 수 있는가. 기름덩어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기름으로 된 조각이 실제로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이끌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이미지는 지속될 것인가.
이런 것이 보이스가 던진 질문과 수수께끼 가운데 일부이다. 그것을 해독하기란 대단히 애매하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거꾸로 그 모호성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건, 이날 밤의 이벤트는 철학적 연극을 향한 새로운 발걸음이었다.
위와 같은 플럭서스 이벤트에 대한 최초의 묘사는 이후 베를린 언론에 실린 플럭서스 콘서트에 대한 리뷰 중 유일하게 진지하고 객관적이며, 믿을 만한 것이다. (같은 신문에 실린 보스텔 해프닝에 대한 하인츠 오프의 리뷰만은 예외이다.)
보스텔의 베를린에서의 첫 해프닝이자, 그의 통산 스물다섯 번째 해프닝이 1965년 3월 한 폐차장에서 열렸다. 「현상 Phenomena」이라는 제목의 이 해프닝은 관객을 무의미한 사건들로 구성된 사전의 상황과 맞부딪치게 했다. 이 해프닝의 참가자는 보스텔의 베를린 예술가 친구들 -브레머K.P Brehmer, 회디케, 마르쿠스 뤼페르츠 Marcus Lupertz 등- 과 당시 우연히 베를린에 있었던 비엔나의 ‘행위’예술가 헤르만 니취 Herman Nitsch 등이었다. 슈미트 는 베를린의 한 잡지에 이 이벤트를 사전에 소개하는 글을 썼다. 이것이 보스텔에 대한 그의 마지막 긍정적 논평이었다.
1965년 백남준과 무어만 Moorman의 첫 베를린 등장은 센세이셔널한 것이었다. 여섯 번째 플럭서스 모임에서 백남준은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자신의 「로보트 오페라 Robot Opera」를 공연할 계획이었다. 그 해 봄에 그는 금속 부품을 사용해서 움직이는 여자 로보트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원격 조정장치를 통해서 인사를 하고 자체내의 확성기로 소리를 낼 수도 있었다. 이 위험스럽게 보이는 괴물이 뒤에는 한 떼의 소란스러운 ‘오페라 광들’을 이끈 채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의 서 베를린 쪽에 위치한 붉은 군대기념비로 다가가기 시작하자, 이 지역의 경비를 맡고 있는 영국군 헌병 당국은 이 공연을 위험시하여 금지시켜 버렸다. 그리하여 이 공연은 곧 빌헬름 황제 기념 교회 곁의 쿠르퓨르슈텐담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서 로보트는 무어만의 첼로반주와 더불어 노래를 부르면서 군중 사이를 천천히 누비고 다녔다. 루드비히 고제비츠는 무어만을 등에 태운 채 로보트의 뒤를 쫓아서 기어 다녔다. 백남준은 약간 떨어져서 이 모든 움직임을 지휘하는 한편 자신의 「대중예술을 죽여라 Kill Pop Art」라는 선언문을 군중들에게 배포했다. 그 중에는 다음과 같은 선언이 들어있었다.

아리아가 있는 오페라는 시시하다
아리아가 없는 오페라는 지루하다
카라얀은 너무 바쁘다
칼라스는 너무 시끄럽다
선(禪)은 너무 힘에 겹다
백남준은 너무 유명하다
마약은 너무 지루하다
섹스는 너무 시시하다

그러나, 음악의 에로틱한 면을 강조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백남준이다. 그는 무어만에게서 이상적 해석자를 발견했는데, 그녀는 당시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의 음악 부문을 기획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처음에는 플럭서스 음악을 연구하기 위해서, 나중에는 백남준이 무어만을 위해 디자인한 비디오 오브제 – 「TV-첼로」 「TV-브라」 「TV-침대」등-를 공연하기 위해서 수년간 함께 세계를 여행했다.
그러나 1965년 5월 15일 저녁 모임에는 스캔들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찬 화랑에서는 TV뉴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가운데, 무어만이 「톨레도의 백조 (생상스에 따른)」에 의한 백남준의 변주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주 도중 그녀는 옷을 벗어 버리고 물통 속에 들어갔다 나온 다음 젖은 다리 사이에 첼로를 끼고 연주를 계속했다. 이 베를린 공연에서는 경찰이 공연을 중지시키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몇 달 후 뉴욕에서 있은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Opera Sextronique」의 공연 도중에는 백남준과 무어만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내 화랑이 문을 연 이 첫 해에 베를린에 온 모든 예술가들 -브라운, 보이스, 백남준, 보스텔-은 보다 상업화된 다른 서독 도시들과는 뚜렷이 다른 이 분단된 도시의 분위기에 곧 복종했다. 베를린의 스물네 시간의 리듬에 힘입어 비관습적인 열렬한 예술가들은 어윈 피스케이터의 옛 메트로폴 극장 옆에 있는 놀렌도르프 광장의 파이퍼즈 스낵 바에서 밤새도록 토론을 벌이곤 했다. 슈미트가 프로벤슈트라세 화랑 공연 얼마 후에 쾰른에서 베를린으로 옮겨 온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바로 그보다 몇 주 전에 고제비츠가 다름슈타트에서 옮겨 왔고, 비엔나에서 아르트만 H.C. Artmann과 게르하르트 륌 Gerhard Ruhm이, 곧 이어서 오스발트 비너 Oswald Wiener가 옮겨 왔다. 아르트만과 륌, 비너는 비엔나 그룹의 멤버인 작가들로서, 그들의 도발적인 글과 활동 때문에 고향인 오스트리아에서 그들은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로 낙인 찍혀 있었다. 그들은 비엔나의 행위예술가인 오토 뮐 Otto Muhl, 니취 Nitsch, 귄터 브루스 Gunter Brus 등과 공동작업을 했으며, 특히 귄터 브루스는 오스트리아의 대중에게 깊은 충격을 불러일으키고 당국을 모독했다. 그는 베를린으로 피신함으로써 간신히 체포를 모면했고, 베를린의 친구들이 그의 본국 송환을 막아 주었다.
브라운의 첫 이벤트 이후 일 년도 채 못 가서 베를린에는 인터미디어「intermedia :음악, 회화, 연극 등을 복합한 예술」 작업을 하는 플럭서스, 또는 플럭서스와 연관된 경향을 가진 일단의 예술가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대부분 놀렌도르프 광장 근처에 살고 있었다. (1972년에는 보스텔이 쾰른에서 옮겨 왔다) 이 시기에 슈미트와 고제비츠, 륌은 밀접한 연대를 가지고 활발한 활동을 벌였는데, 슈미트와 고제비츠는 많은 공동 프로젝트를 실천하여 그것을 스스로 발행인이 되어 출판했다. 「일일 출판 One-day Publishing」이란 제목의 이벤트(1965년)에서 그들은 출판의 전 과정을 24시간으로 축약시키고자 했다. “작가들에게 작품을 청탁하고, 그것을 책으로 인쇄하고, 배포하고, 대금을 걷는다. ” 다음과 같은 내용이 한밤중에 아홉 명의 작가들에게 해외전보로 통지되었다. “11월 28일: 일일 출판: 오후 3시까지 전보나 전화로 발표할 수 있는 기고문을 해외전보로 보낼 것. 발간은 오후 3시에서 오후 12시 사이. 고제비츠 슈미트, 베를린” 그리고 사십 명의 고객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전보가 보내졌다. “11월 28일: 일일 출판: 안데르센, 브레히트, 브라운, 필리우, 고제비츠, 쾨프케, 페이지 Page, 륌, 슈미트, 보티에, 윌리엄즈의 작품. 주문 대금은 작품 당 25마르크의 전신환으로 오후 4시까지만 받음. 배달은 오후 12시까지. 추천 바람, 고제비츠 슈미트, 베를린” 당시에 공연됐던 작품들 가운데는 「뷔딩 오라토리움 Buding Oratorium」(륌과 합작), 「세 개의 합창단을 위한 삼부 대화」, 「메모지 denkzettel」,「일일 여행 One-day Tour」 등이 있다. 「일일 여행」은 여섯 사람에게 자신들의 방문을 전보로 통지하는데, 그 내용은 ‘고제비츠와 슈미트와의 아침식사. 11시 도착’으로부터 시작하여 ‘고제비츠와 슈미트와의 저녁식사. 7시 도착’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팔에서 팔까지 Von Phall zu Phall」라는 제목의 책이 발간됐고, 「5분간 Five Minutes」(역시 륌과의 합작)이란 ‘행위’가 공연되었다. 슈미트는 이 이벤트에서 자신이 한 것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나는 육십 가지의 다른 ‘행위들’을 한데 모았다. 각 행위는 1초 만에 수행될 수 있는 것이었고, 각각 다섯 번씩 반복되도록 되어있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메트로놈을 따라서 이 60초간의 ‘행위들’의 사이클을 다섯 번 되풀이했다. 나는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쉽게 집을 수 있도록 육십 개의 구획으로 정리해 놓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행위’예술가로서의 내 경력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는 미리 약간의 연습을 했다. 왜냐하면 과거의 나의 행위들은 항상 느린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육십 가지 행위들 가운데 예를 들면 -책의 한 페이지를 넘긴다. 꽃병에 꽃을 꽂는다. (곁에 있는 다섯 송이의 꽃으로부터 시작해서」 ‘곧’ 이라고 쓰인 카드를 보이고, 1초 후에는 ‘지금’이라고 쓰인 카드를 보인다. 또 1초 후에는 ‘방금’ 이라고 쓰인 카드를 보여준다. 소용돌이 모양의 장식을 그린다. 손톱을 입에 물었다가 얼마 후 다시 뺀다. 달력을 찢어낸다. 망치로 탁자를 친다. 메트로놈을 정지시키고 1초 후에 다시 작동시킨다. 세워진 나사못을 쓰러뜨린다. 탁구 공을 던진다……등등 – 육십 가지 다른 일들.
이와 같은 슈미트, 고제비츠, 륌의 공동작품들은 이미 음악 페스티벌이란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있었다. 음악 페스티벌을 통해서 우리는 플럭서스가 정확히 뜻하는 것, 또는 뜻하지 않는 것에 대해 진작부터 있어온 혼란을 일소하기를 원했다. 보스텔의 해프닝(1965년 11월 그의 두 번째 「백 개의 이벤트-백 분」은 실내악 스타일로 공연되었는데 오직 몇 명의 참가자와 우연한 관객, 그리고 텔레비전만을 위한 것이었다)과 플럭서스란 명칭을 독점하려 는 보이스의 기도, 그리고 혼돈스럽게 표현적인 백남준과 무어만의 해석 이후, 이제 개념적이고 고전적인 작품들을 단순, 명료한 해석으로 보여줄 시기가 온 것이다. 이 1966년의 페스티벌을 위한 포스터 크기로 인쇄된 프로그램에는 공연될 모든 작품의 리스트가 연대순으로, 그리고 완벽한 오리지널 판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첫 프로그램은 영의 1960년 작인 「헨리 플린트를 위한 566」이었는데, 이 작품은 566개의 피아노 음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같은 크기로 연주되는 것이었다.(고제비츠의 연주로 약 한 시간이 걸렸다.) 그 다음에는 「드립 뮤직 Drip Music」과 「현악사중주」를 비롯한 브레히트의 이벤트, 「아드리아노 올리베티를 추모함」을 비롯한 매키어너스의 작품들, 그리고 맥로우와 로빈 페이지 Robin Page의 「기타 소품 Guitar Piece」이 공연되었다. 「기타 소품」에서 그는 잠깐 기타를 연주하고는 기타를 바닥에 떨어뜨린 후 발로 차서 무대 아래로 차내고, 계속해서 극장 밖의 거리로 나가 근처에 있는 쿠르퓨르슈텐담까지 기타를 차낸 다음, 앞의 과정을 되짚어서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다음에는 패터슨의 주전자 소품「레몬 칠중주 Septet from Lemons」, 청중이 참여하는 라일리의 「귀 소품Ear Piece」, 그리고 로트, 월리엄즈, 슈미트, 고제비츠, 히긴즈의 작품들이 공연되었다. 이 페스티벌은 1966년 4월 중에 3일 동안 계속됐다.
그해 10월에 히긴즈와 노울즈가 베를린에 도착했다. 보스텔과 브레머의 협력 하에 그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포함한 플럭서스의 고전적 작품들을 공연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후안 히달고 Juan Hidalgo와 토마스 마르코 Tomas Marco의 ‘ZAJ ‘콘서트가 열렸다. 2주일 후 프로벤슈트라세 화랑에서는 보이스에 의해 마지막 이벤트가 열렸다. 이것은 아홉번째 모임으로서 그 제목은 「유라시아-시베리안 심포니 1963, 서른두 번째 플럭서스 동작」이었다. 코펜하겐에서 있었던 그 서른네 번째 동작의 공연을 보고 트로엘즈 안데르센 Troels Anderson은 이 플럭서스 심포니에 대한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보이스는, 네 다리와 두 귀에 길고 가느다란 검은 나무 막대기를 붙들어 맨 죽은 토끼를, 바닥에 그어진 선을 따라 교묘히 조종했다. 그가 토끼를 자기 어깨에 올려 놓았을 때 막대기들은 바닥에 닿았다. 그는 벽에서부터 흑판 앞으로 가서 그곳에 토끼를 내려놓았다. 되돌아오는 길에는 세 가지 일이 일어났다. 보이스는 토끼의 다리 사이에 흰 가루를 뿌리고, 토끼의 입 속에 체온계를 꽂고, 튜브로 입김을 불어넣고, 그런 다음 둘로 갈라진 십자가가 있는 흑판 쪽으로 돌아서서 토끼의 귀를 곧추 세우는 동시에, 철판을 댄 자신의 발을 역시 철판이 놓인 바닥 위로 번쩍 쳐들었다. 그리고는 가끔씩 철판을 발로 힘껏 굴렀다.
이상이 이 이벤트의 기본적인 내용이다. 여기에 나타난 상징들의 의미는 자명하며 완전한 설명이 가능하다. 즉, 둘로 갈라진 십자가 :동서 분열, 로마와 비잔틴의 분열. 반 십자가 :재결합된 유럽과 아시아. 이것이 토끼가 도달하려는 목적지이다. 바닥에 놓인 철판은 하나의 은유이다-바닥은 얼어붙어 있고 목표를 향한 진보는 어렵다. 돌아오는 도중의 세 가지 사건은 각각 눈과 추위와 바람을 의미한다. 이러한 모든 상징의 의미는 ‘시베리아’라는 핵심적 단어에 의해서 풀리게 된다.
토끼의 다리-가느다란 검은 막대기들-는 공간의 의미를 제시한다. 주어진 실제적 질료로서의 공간에 대한 관계와 경험을 가능케 하는 정신적 요소를 지칭하기 위해서 보이스는 ‘반공간(反空間)’과 ‘반시간(反時間)’이라는 말을 쓴다. 토끼의 발이 흔들리면서 그 끝에 달린 긴 막대기들이 뒤틀릴 때마다-이 불안스런 원정 도중 내내 그랬다-보이스는 그것들을 제 자리에 되돌아오게 하는 데 몹시 애를 먹었고, 잠시 동안 우리의 공간에 대한 관계는 무너졌으며,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가 깨어졌다. 보이스의 얼굴이 땀으로 뒤범벅되고, 끔찍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 것은 아주 적절했다. 게다가 그는 한 발로 서서 끊임없이 평형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러나 결코 그 퍼포먼스의 강렬함은 말로는 묘사될 수가 없다. (위 글의 필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후 1969년 2월에 보이스의 다음 번 베를린 공연이 있기 전까지는 단 하나의 플럭서스 콘서트-고스지의 「확장된 음악Expanded Music」만이 열렸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음악적인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놀라운 집중력과 감수성으로 공연된 소품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직도 나는 공중에 매달린 기타의 현이 흔들리는 막대에 부드럽게 스쳤을 때 나던 소리와 무대를 가린 거대한 종이 장막을 자르는 가위질 소리, 또는 아코디온이 바람을 넣었다 빼는 소리만을 반주로 한 부드러운 노래를 기억하고 있다. 1968년 베를린에서도 학생 데모와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시위가 절정에 달하고 있었고, 따라서 우리는 플럭서스 콘서트를 기획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보이스는 이미 1967년에 뒤셀도르프에 ‘독일 학생당’을 창설했고, 곧이어 ‘국민투표에 의한 직접민주주의를 위한 조직 사무국’과 ‘창조성과 분야간 협동 연구를 위한 국제 자유대학「FIU」’이 창설되었다. 우리는 베를린에서 이들 기구를 위한 지지를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보이스와 크리스찬센의 플럭서스 콘서트가 있기로 된 1969년 2월 27일은 때마침 리차드 닉슨 미대통령이 서 베를린을 방문하기로 결정한 날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전체주의 국가를 방불케 하는 삼엄한 보안 조치가 취해졌다. 학생 데모는 미리 진압되었고, 닉슨은 대부분 닉슨을 지지하는 베를린 시민들로부터 완벽히 격리되었다.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았으나, 뜻밖에도 그 긴장은 필하모닉 홀의 축제에서가 아니라, 예술 아카데미에서 폭발했다. 그날 저녁 예술 아카데미의 강당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인파로 차 있었다. 「내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그날 저녁 콘서트의 제목에 대해서 오해가 일어난 것 같았다. 왜냐하면 공연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야유꾼들이 무대를 점거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야유 때문에 보이스와 크리스찬센의 소리는 곧 들리지 않게 되었다. 몇몇 잘 알려진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시위자들은 무대 위에 소화기로 물과 거품 세례를 퍼부었고, 영사막과 무대 커튼을 찢고, 두 대의 피아노와 마이크들을 부숴 버렸다. 친구들이 임시로 무대를 치운 후-고열에 시달리고 있던 크리스찬센은 그 소동 속에서도 내내 절인 양배추로 뒤덮인 악석에서 「소금에 절인 양배추 악보」를 녹색 바이올린으로 연주하고 있었다-아직 남아 있던 몇몇 사람들과 철야토론이 시작되었다. 이 자리에서 보이스는 긍정적, 또는 퇴보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고, 플럭서스에 대해서는 혁명적 대의를 위해 아무것도 기여함이 없이, 지배계급에 이용되는 억압의 또 다른 도구에 불과하다는 비난이 가해졌다.
후에 깨달은 대로, 이들 학생들은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콘서트가 아니라, 조언과 도움을 보이스에게서 바랐던 것이다. 그들이 원한 것은 정치적 목적과 내용이 있는 해프닝이었다. 오해의 결과로 무산된 이 콘서트는 한 달 후 묀헨글라드바크 미술관에서 재공연됐다. 재공연에서는 제목을 「또는 우리는 그것을 변화시켜야 하는가.」로 바꿨으며, 이번에는 아무런 방해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베를린 콘서트와 관련해서, 그 다음날 시작된 「봉쇄 69」 환경 시리즈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이 콘서트 도중 보이스는 그랜드 피아노를 예술품으로 변화시킬 계획이었지만, 누군가 피아노 위에 콘서트 반대 선언을 써 붙이고 갈색 페인트로 구호를 적어 놓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날 저녁 우리는 화랑을 텅 빈 채로 두기로 결정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프닝에 왔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예술은 어디로 갔는가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너무나도 당황스럽고 부끄러운 기색이었다. 나중에 내가 그 피아노를 녹색 바이올린의 잔해와, 피아노 뚜껑에 못 박힌 보이스의 모자와 함께 지금과 같은 다리 없는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보이스는 이 오브제를 사진을 통해서만 보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개념에 대한 충실성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플럭서스 예술에는 흔한 일이었다.
이후 보이스는 베를린의 한 이벤트-그의 마지막 베를린 이벤트가 된-에서 직접적인 정치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던 사람들 자신에게는 이 이벤트가 주목을 끌지 못했다. 1972년 5월 1일 보이스는 아프리카 학생과 아시아 학생의 도움을 받아서 베를린의 칼 마르크스 광장에서의 메이데이 시위 후 잠겨진 쓰레기를 붉은 색 비로 쓸어냈다. 그는 이 날만이라도 그 광장이 깨끗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짧고 단순한 이벤트는 보이스에게는 보기 드문 직접적 발언이었다.
플럭서스 콘서트와 이벤트의 시기는 1960년대로 끝난 듯했지만, 그것은 플럭서스 예술가들이 은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음악적/시각적 장에서부터 보다 순수한 시각적 작업으로 관심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화실로 개조한 아파트에서(베를린에서는 화실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오브제나 드로잉, 회화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몇몇 수집가들이 플럭서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그들은 베를린이 아닌 외부의 수집가들이었다) 미술 단체들과 작은 미술관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전시 활동이 활발해졌다. 베를린에서 훈데르트마르크 출판사Edition Hundertmark 가 창립됨으로써 이 시기는 절정을 맞게 된다. 이 헌신적 출판사(1975년에 쾰른으로 옮김)의 창립 10주년을 맞아 DAAD 화랑은 회고전을 헌정했다. 회고전 카탈로그에서 아르민 훈데르트마르크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1970년초 나는 단지 미술품을 수집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기로 했다. 나의 아이디어는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예술가들을 설득해, 작은 오리지널 작품들의 복제판을 만들기 위해 작품을 맡기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복제본을 위해서 직접 자신의 작품을 복제하거나, 아니면 나에게 모델을 보내 복사를 의뢰할 수도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오브제나 꼴라쥬, 사진, 드로잉 따위를 작은 상자 속에 집어넣어 배포하는 것이었다. 먼저, 나는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 -귄터 브루스, 루드비히 고제비츠, 게르하르트 륌, 토마스 슈미트에게 부탁했다. 다음에는 요셉 보이스, 스탠리 브라운, 로베르 필리우, 켄 프리드먼, 후안 히달고, 조우 존스, 밀란 크니쟉, 오토 뮐, 헤르만 니취, 로빈 페이지, 디터 로드, 벤 보티에, 볼프 보스텔에게 청탁 편지를 썼다. 친구들은 고제비츠가 작업을 완전히 중단했다면서 나를 말렸지만, 나는 베를린에서 고제비츠를 만났다. 그는 빌메르스도르프의 한 다락방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내게 1967년 이래 그린 드로잉과 수채화를 보여주었고, 나의 첫 번째 복제판 상자를 위해 「유조선 선장 Tanker Captain」이란 제목의 작은 드로잉을 골랐다. 약 2주일 후에 그는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고 알려 왔다. 우리는 레스토랑에서 만났고 그는 나에게 스물다섯 장의 복제본을 주었다.
게르하르트 륌도 내 제안에 찬성했다. 내가 귄터 브루스를 처음 만난 것은 그의 집에서였다. 나는 전에 브루스가 편집한「비밀 거래 Under the Counter」란 소책자를 본 적이 있었지만 그의 주소는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륌의 집에서 그를 만나 출품 의사를 물었고, 얼마 후 그를 방문했다. 그는 마르가레트 라스페와 아파트를 같이 쓰고 있었다. 그의 첫번째 「샤스트롬멜 Schastrommel」은 이미 발간되었고 그는 다음 호를 준비 중이었다. 나는 그가 최근 뮌헨에서 보여준 행위 작품 「엄밀한 시험 Acid Test」의 사진을 내 복제판 시리즈 중의 하나로 발행하고자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사진으로 스물다섯 장의 프린트를 만들었고, 각 장마다 브루스가 서명을 했다.
브루스는 또 니취와 뮐의 주소를 알려 주었다. 나는 편지로 그들에게 내 계획을 설명했고, 그들은 자신들의 이벤트를 찍은 사진에 서명을 해서 보내 주었다.
나는 또한 토마스 슈미트에게도 부탁했다. 그는 그때 「좋은 생각 das gute dunken」이란 책을 집필중이었고 돈이 좀 필요한 형편이었다. 그는 꼴라쥬를 만들어 주었다.
1970년 봄 나는 보이스와 필리우에게 전화로 내 제안을 설명하고 뒤셀도르프로 갔다. 나는 먼저 보이스를 찾았다. 그는 조지 매키어너스의 플럭서스 선언을 다시 손질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카탈로그의 한 페이지를 내게 주었다. 베를린으로 돌아온 나는 그것을 스물다섯 장 복사한 후 보이스에게 보냈고 그는 거기에 고무 스탬프를 찍고 서명을 했다.
당시 뒤셀도르프의 바젤슈트라스에 살고 있었던 필리우는 내게 작품을 주기로 약속했다. 그후 그는 우편엽서를 개조한 작품을 보내왔다. 다음에 나는 쾰른으로 보스텔을 만나러 갔다. 그는 관심을 보였으나, 그가 원하는 특정 예술가가 포함되지 않는 한 복제판 시리즈에 출품할 수 없다는 거절의 편지를 보내왔다.
밀란 크니쟉의 작품은 전에도 여러 점 구입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모델과 스물다섯 개의 서명을 보내 주었다. 나는 그가 보내 준 모델에 따라 만든 오브제에 그의 서명을 붙였다. 그의 작품은 일부가 불에 탄 남자 셔츠였다. 그래서 나는 셔츠를 모아 내 집 정원에서 불을 질렀다.
켄 프리드먼은 사진복사한 편지를 보내 주었는데, 편지 내용 중에는 구입자가 그에게 편지를 쓰면 답례로 무언가를 보내주겠다는 말도 들어 있었다.
벤 보티에에게는 여러번 편지를 보낸 끝에, 첫 발행본이 거의 완성되어 레테르까지 붙여졌을 무렵, 그의 작품이 마침내 도착했다. 그것은 스물다섯 장의 압지에 예술에 대한 진술을 적고 서명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추가로 레테르를 인쇄했다.
루드비히 고제비츠와 나는 코펜하겐으로 쾨프케를 방문했다. 우리는 맥주를 마셨고, 그는 내게 작품을 제작해서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끝내 보내지 않았다.
스탠리 브라운은 복제판 시리즈에 출품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원칙이라고 알려 왔다.
작품들이 모두 입수되자, 나는 베를린의 메르케 포장회사에 스물다섯 개의 상자를 주문했다. 그리고 마리엔도르프의 작은 인쇄소에서 작가들의 이름을 인쇄한 레테르를 제작했다. 나는 상자에 레테르를 붙이고 상자 속에 작품을 집어 넣었다. 이로써 첫 번째 상자 시리즈가 완성된 것이다. 나는 도장을 사서 문자를 새겨 넣고 그것으로 첫 안내서를 찍어냈다. 그러나 주문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또한 1960년대 말에는 과거의 전우였던 보이스에 대한 보스텔의 첫 번째 신랄한 공격이 시작됐다. 아직 베를린에 오지 않았던 보스텔은 플럭서스의 미술사적 의미는 해프닝에 의해서 여지없이 퇴색해 버렸다고 단언하면서 플럭서스를 비판하는 일련의 논쟁을 개시했다. 1968년 보이스가 ‘독일 학생당’의 명칭을 「플럭서스 서부 지역Fluxus Zone West」으로 개칭했을 때, 보스텔은 지금이야말로 누가 독일의 제1인자인가를 증명할 시기가 됐다고 결심했다.

플럭서스
플럭서스
플럭서스 ‘독일 학생당’의 개칭에 대하여
플럭서스 ‘플럭서스 서부 지역’에게
플럭서스
플럭서스
플럭서스
플럭서스
플럭서스는 조지 매키어너스가 발명한 명칭이다
플럭서스는 1962년 비스바덴에서 백남준과 보스텔의 협력하에 매키어너스에 의해 창설되었다
플럭서스 페스티벌은 1962년 비스바덴, 런던, 코펜하겐, 그리고 파리에서 열렸다
플럭서스는 독일 본부는 1962-1963년 쾰른에서 토마스 슈미트가 이끌었다
플럭서스 프랑스의 대표는 벤 보티에이다
플럭서스 동부의 대표는 프라하의 밀란 크니쟉이다
플럭서스 서부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켄 프리드먼의 플럭서스 그룹이다
플럭서스 서부는 뉴욕 중앙 본부의 서쪽에 있다
플럭서스 서부는 켄 프리드먼이다
플럭서스 동부는 밀란 크니쟉이다
플럭서스 중부는 독일이다
플럭서스 독일은 보스텔이다
플럭서스 독일의 플럭서스 도시는 쾰른이다
플럭서스와 해프닝 센터는 쾰른 실험실이다
플럭서스 문헌 센터는 뷔르템베르크에 있다
플럭서스는 스타 숭배나 신비주의적 행동과는 양립할 수 없다
플럭서스는 기독교적 용어에 근거하지 않는다
플럭서스는 절대로 십자가를 사용한 적이 없다
플럭서스 서부는 미국 서부의 켄 프리드먼이다!
플럭서스 서부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프리드먼의 행위 센터를 뜻한다.
플럭서스 서부는 언제나 서부에 있을 것이다
플럭서스 서부는 유럽에 있지 않다
플럭서스 12/10/86, 쾰른 상호작용 예술 이론 팀 뒤셀도르프 LIDL 아카데미 회원

이에 대해 베를린에서 슈미트가 반박했다. 보스텔의 선언은 처음에 그것을 읽고 머리를 가로 저을 때 생각하게 되는 것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최후의 춤은 보스텔라이다‥‥운운’) 그러나 그것이 운위하고 있는 대상이 너무나 알려지지 않고 정확히 설명된 적이 없어서 허위진술에 의해 손상을 면치 못할 경우라면, 더구나 나 자신이 개인적으로 언급되어 있고, 또한 상처를 입히려는 의도로 쓰여진 것이라면, 사실을 조작함으로써 개인적 이득을 볼 것이 없는 누군가가 그것을 정확히 바로 잡아야만 할 것이다.
플럭서스는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의 긴밀한 도움을 받아 매키어너스가 창설했다. 스물두 명의 핵심적 참가자들로 구성된 매키어너스의 첫 번째 ‘편집위원회’ 명단이나, 스물네 명으로 된 두 번째 ‘편집위원회’ 명단 그 어디에도 보스텔의 이름은 없다.
유럽의 플럭서스 페스티벌은 1962년 비스바덴, 코펜하겐, 파리에서 열렸고, 1963년 뒤셀도르프, 암스테르담, 헤이그, 런던, 니스에서 열렸다.
독일의 플럭서스 본부란 것은 결코 있어본 적이 없다. 당시 쾰른의 내 주소는 서적이나 정보를 위한 연락장소였을 뿐이다. 리비아 석유 회사 도서관에서 온 엽서나 그 비슷한 것들 외엔 특별한 것이 배달된 적도 없고 특별한 일이 일어났던 적은 더더구나 없다.
쾰른은 성직자와 조직 범죄와 미술품 거래의 도시이지, 결코 플럭서스의 도시는 아니다.
“플럭서스는 스타 숭배나 신비주의적 행동과는 양립할 수 없다” -이거야말로 웃기는 얘기다. 그렇다면, 도대체 플럭서스란 무엇인가. 플럭서스를 정의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겠다- 그것은 불가능하고 주제넘은 일이므로, 다만 다음에서 진술하는 것을 일종의 각주로서 이해해 주기 바란다. 만약 1962년 이래로 매키어너스의 지휘 아래 벌어졌던 모든 것을 플럭서스로 분류하고 그 자체를 플럭서스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중요한 것과 시시한 것이 뒤섞인, 산만하기 짝이 없는 집합이 되어 여하한 미학적 분류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 경우에는 스톡하우젠, 몬 Mon, 해리 크레이머 Harry Kramer 등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플럭서스 시기를 1962년에서 1964년으로 제한하여 오직 7과1/2개의 유럽 페스티벌과 그 시기의 플럭서스 출판물, 그리고 매키어너스, 라 몬테 영, 조지 브레히트, 에메트 월리엄즈, 벤 패터슨, 백남준, 쾨프케, 로빈 페이지, 벤 보티에, 잭슨 맥로우, 딕 히긴즈, 오노 요꼬, 앨리슨 노울즈, 로버트 왓츠, 토마스 슈미트 등이 당시 하고 있던 작업만을 플럭서스에 포함시킨다면, 그것은 비교적 일관성있고, 매우 독특하며 명확히 묘사하기 힘든 집합이 될 것이다. 아주 막연하게나마 서술해 본다면 -개념적, 구체적, 비표현주의적이며, 비상징적이고, 일차적이며, 비형식적이다. 형식을 극도로 환원시켰다. 또한 전통적인 공연 형식들을 파괴했으며, 감각적이고, 무의미하다 등등.
표현주의적 경향이 뚜렷한 백남준이나 보이스, 또는 보티에 같은 작가들을 엄밀한 의미의 플럭서스에 귀속시키는 요소는 바로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즉각성이다. 반면에 크니쟉과 같은 표현주의자는 플럭서스에 속한다고 보기 어려우며 프리드먼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보스텔과 같이 미학적으로 아카데믹한(이 점에 관한 한 상당히 뛰어나다) 관례적 상징주의자의 경우는 플럭서스를 생각조차도 할 수 없다.
“플럭서스 타운… 플럭서스 센터… 독일 플럭서스…”심지어 보스텔 스스로 과거에 매키어너스의 가장 심각한 단점이 관료주의임을 지적하곤 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플럭서스는 어떤 개인의 사적이고 정치적인 공격을 위해서 이용될 수는 없다.

플럭서스가 외투일까. 외투라 해도 그저 입기만 하면 아무에게나 딱 들어맞는 외투는 아니다. 그러나 외투가 자기에게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제멋대로 뜯어고칠 수는 없는 것이다.

1960년대에 DAAD의 후원으로 케이지와 얼 브라운 Earle Brown이 베를린에 1년간 초청되었다. 이들은 베를린에 최초로 초청된 플럭서스 관련 작곡가들이었다. 브라운은 1969년에 연구기금을 받았고, 1972년 이후로 코너, 필리 우, 구보따 시게꼬, 제오프리 헨드릭스, 히긴즈, 존즈, 카프로우, 퍼 커크비 Per Kirkeby, 크니쟉, 고스지, 페이지, 백남준, 스푀리, 보티에, 요시마사 와다, 왓츠, 윌리엄즈 등이 연구기금을 받았다.
이 독특한 프로그램으로 베를린은 뉴욕 외의 가장 중요한 지속적 플럭서스 활동지가 되었다.
그 이후 개인 화랑이나 예술협회들, 예술 아카데미, 국립 화랑 등에서 열렸던 수많은 활동, 전시, 이벤트, 콘서트 가운데서 결론 삼아 1970년의 「페스툼 플룩소룸 festum fluxorum」과 1976년의 「플럭스 합시코드 콘서트와 플럭스-미로 Flux Labyrinth with Flux Harpsichord Concert」 두 가지만 설명하겠다.
1970년 가을 보스텔의 주도로 한스 솜Hanns Sohm과 하랄드 지만 Harald Szeeman이 기획한 최초의 중요한 기록 전시인 「해프닝과 플럭서스 Happening & Fluxus」가 쾰른 예술협회에서 열렸다. 모든 해프닝과 플럭서스 예술가들이 초대되었고, 내가 아는 한 보이스와 매키어너스 만이 거절했다. 그러자 쾰른에서 모였던 예술가들 일부를 베를린으로 초청하는 아이디어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떠올랐다. 그리하여 11월 14일과 15일 이틀간 「페스툼 플룩소룸」이 열렸다. 이에 앞서 11월 11일에는 카프로우가 그의 베를린에서의 첫 번째 해프닝을 가졌다 -당시 이미 그는 극적, 바로크적 이벤트로부터 보다 최근의 단순하고 개념적인 작품으로의 전환을 보여주기 위해서, 남용된 ‘해프닝’이란 용어를 버리고 ‘퍼포먼스 perfonnance’란 용어를 썼다. 그 제목은 「달콤한 장벽 A Sweet Wall」이었다. 그것은 쾰른에서 온 회디케와 히긴즈를 비롯한 몇 명의 도움으로 공연되었다. 그들은 진짜 베를린 장벽에 평행해서 작은 벽을 쌓았는데, 잼을 바른 빵 조각을 몰타르 대신 썼다. 그들은 빗 속에서 몇 시간 동안이나 걸린 끝에 그 축소판 베를린 장벽을 완성한 다음, 그날 저녁 그것을 발로 차서 무너뜨렸다. 근처에는 경찰이 많았지만, 그들은 우리의 작업을 감시하러 오지 않았다. 로자 룩셈부르그가 살해된 곳에서 멀지 않은 란드베르카날에서는 잠수부들이 무기 은닉처를 수색하고 있었고, 베를린 장벽 동편의 감시탑에서는 보초들이 이를 감시하고 있었다.
안데르센, 필리우, 쾨프케, 무어만, 카롤리 슈니만, 윌리엄즈(그는 1980년 이래 베를린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다)등이 참여한 「페스툼 플룩소룸」의 절정은 쾨프케의 「당신이 일하는 동안의 음악 Music While You Work」이었다. 이 퍼포먼스는 수시간 동안 계속되었고, 고제비츠와 슈미트도 참여했다. 참가자들은 중앙 무대의 테이블 위에 놓인 전축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동안 각자가 선택한 어떤 행위를 계속하도록 되어 있었다. 쾨프케는 레코드의 첫 부분 몇 바퀴만 빼놓고는 긁어 흠집을 내고 풀을 잔뜩 칠해 놓았다. 그 결과 레코드 위의 전축 바늘은 처음 육십초만 제대로 트랙 위를 돌고는 곧 건너뛰기 시작하더니 무시무시한 긁히는 소리를 내면서 전축이 꺼져 버렸다. 그들이 하던 행위를 중단 당한 공연자들은 턴테이블로 가서 먼저 도착한 사람이 음악을 다시 틀었다. 이런 과정은 공연자 중 한 사람이 예정된 임무를 다했을 때까지 반복되었다.
1976년 마침내 매키어너스가 「소호 – 맨하탄 중심가 SoHo – Downtown Manhattan」를 위한 플럭서스 미로를 만들기 위해 베를린에 왔다. 미국 건국 200주년을 맞아 열린 이 전시회는 지극히 기구한 역사를 지닌 뉴욕 소호 지구의 예술가들에게 바쳐진 것이었다. 최근까지 소호는 상업지역으로 소규모의 종이 및 직물 제조업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뒤떨어진 경영방식으로 인해 경쟁에서 밀려나게 되어 맨하탄 밖으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1965년 무렵에는 빈 창고와 빌딩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시 당국은 이 지역의 역사적 주철(鑄鐵) 건축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전체를 철거하는 계획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크고 임대료가 싼 이 지역의 창고들을 처음 발견한 것은 노울즈, 히긴즈, 오노, 헨리 플린트, 아이-오 등으로서, 이들은 커넬 스트리트와 웨스트 브로드웨이에 자리잡았다. 처음에는 불법적으로 거주했지만, 매키어너스에 의해 추진되고 확산된 협동 계획으로 많은 예술가들이 창고를 살 수 있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소호의 건물들을 파괴로부터 보존할 수 있었다.
이 전시회는 소호를 대표하는 이후의 경향들 -미니멀, 개념 미술, 비디오 아트, 퍼포먼스, 미니멀 뮤직- 외에, 플럭서스의 센터로서의 소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매키어너스는 그가 오랫동안 구상해 오던 플럭서스 미로를 위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도록 위촉되었다. 그 미로는 코믹하거나, 위험스럽거나, 불안스런 상황과 장애물의 연속으로서 관객은 그것들을 통과해야만 다른 쪽 출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매키어너스는 왓츠, 백남준, 아이-오, 존즈, 래리 밀러, 헨드릭스, 와다 등을 초청해서 미로의 각 부분을 디자인하도록 했다. 또한 그 자신도 심혈을 기울여 미로의 일부를 제작했는데, 진실로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특색을 부여하는 한없이 풍부한 플럭서스 아이디어를 보여준다. 플럭서스 미로는 예상 외로 대성공을 거두고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미로의 여러 부분을 계속해서 고치고, 확장하거나, 심지어 완전히 새로 만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시회가 끝난 다음까지도 훌륭히 살아남았다.
미로 제작을 위해 뉴욕에서 왓츠, 와다, 밀러, 백남준이 왔으므로, 우리는 이 기회에 유럽에 살고 있는 옛 플럭서스 그룹의 멤버들이 참여하는 콘서트를 열기로 했다. 프랑스의 필리우와 보티에, 베니스 근처 아쏠로에 살고 있는 존즈, 그리고 쾰른의 브레히트가 초청되었다. 이것은 14년전 비스바덴과 뒤셀도르프에서의 콘서트 이래 매키어너스가 독일에서 처음으로 기획한 콘서트였고, 또한 매키어너스가 기획하고 출연한 최후의 위대한 플럭서스 콘서트였으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현재로서는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플럭서스 콘서트이기도 하다.
1967년 슈미트가 조직한 음악 페스티벌이 유일하게 그랬던 것처럼, 이날 저녁의 콘서트는 필요한 재료의 긴 명세서에 이르기까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시계바늘같이 정확하게 진행되었다. 과거의 작품과 새로운 작품이 합시 코드로(때로는 속에서, 또는 그 위에서) 연주되었다. 우리는 작곡자 자신의 해석을 통해서 음악을 듣고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이날 저녁의 콘서트는 비디오로 녹화되어 남아 있다 -그곳에서 또 한번 만물(萬物)은 유전(流轉)하고 있었다.

1977년 10월 20일, 아더 쾨프케는 코펜하겐에서 죽었다.
1978년 5월 9일, 조지 매키어너스는 보스턴에서 죽었다.
1986년 1월 23일, 요셉 보이스는 뒤셀도르프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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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

1961
매키어너스가 「플럭서스 선언」 발표「비스바덴」 1962
플럭서스 현대음악 페스티벌「비스바덴」

1963
「페스툼 플룩소룸」 「뒤셀도르프」

1964
9월 15일, 르네 블록 화랑 개관「베를린」. 개관전으로 「네오다다/팝/데콜라쥬/자본주의 리얼리즘」전 열음.
10월 27일, 르네 블록 기획으로 베를린 최초의 플럭서스 공연 시리즈 시작. 첫날 작품으로 스탠리 브라운의 「이쪽으로 가시오, 브라운 씨」가 공연됨.
12월 12일, 르네 블록의 기획으로 베를린 최초의 해프닝인 보이스의 「두목」이 공연됨.
1월-11월, 백남준의 「로보트 오페라」, 백남준과 샬로트 무어만의 「플럭서스 콘서트」, 보스텔의 「현상」, 「베를린-백 개의 이벤트-백 분-백 개의 장소」, 토마스 슈미트의 「행위」 등을 비롯한 퍼포먼스 시리즈가 르네 블록 화랑에서 공연됨. 플럭서스 예술가 루드비히 고제비츠와 토마스 슈미트가 베를린으로 이주.

1965
1월-11월, 백남준의 「로보트 오페라」, 백남준과 살로트 무어만의 「플럭서스 콘서트」, 보스텔의 「현상」,「베를린-백 개의 이벤트-백 분-백 개의 장소」,토마스 슈미트의 「행위」등을 비롯한 퍼포먼스 시리즈가 르네 블록 화랑에서 공연됨.
플럭서스 예술가 루드비히 고제비츠와 토머스 슈미트가 베를린으로 이주.

1966
10월 31일, 르네 블록의 기획으로 새로운 실험 음악 콘서트 시리즈와 보이스의 플럭서스 이벤트 「유라시아-시베리안 심포니 1963, 서른두번째 동작」이 공연됨.

1969
2월 28일-11월 11일, 아홉개의 시리즈로 이루어진 환경 작품전「봉쇄 69」가 르네 블록 화랑에서 열림. 여기에는 보이스, 팔레르모, 회디케 등이 참가. 작품의 부도덕성 혐의로 오스트리아 경찰당국의 추적을 받고 있던 비엔나 출신 행위예술가 귄터 브루스가 베를린에 정착. 이곳에서 그는 퍼포먼스를 중단하고 그래픽 작업에 전념. 이후 십 년간 귀국이 허용되지 않음.

1970
「해프닝과 플럭서스」전 (쾰른) 4월-11월, 백남준, 보스텔, 마우리찌오 카젤, 마르쿠스 라에츠 등이 참가한 음향 환경 작품 시리즈 「음향이 있는 공간」이 르네 블록 화랑에서 열림. 11월 11일, 블록의 기획으로 알란 카프로우의 「달콤한 장벽」이 열림, 11월 14일-15일, 블록의 기획으로 에릭 안데르센, 로버트 필리 우, 알 한센, 무어만, 에메트 월리엄즈 등이 참가한 「페스툼 플룩소룸」이 포럼 극장에서 열림. 아르민 훈데르트마르크가 ‘훈데르트마르크 출판사’ 설립, 보이스, 고제비츠, 슈미트 등 플럭서스 예술가들과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오스트리아 예술가들인 브루스, 헤르만 니취, 아르눌프 라이너, 륌 등의 작품을 발행, 첫 기획으로 11인의 작품 포트폴리오를 발행.

1971
3월 5일-4월 3일, 르네 블록 화랑에서 「디자인, 악보, 프로젝트 드로잉」전 열림. 출품 작가는 보이스, 조지 브레히트, 필리우, 고제비츠, 회디케, 쾨프케, 르윗 피에로 만조니, 팔레르모, 파나 마렌코, 폴케, 리히터, 디터 로트, 슈미트, 벤 보티에, 보스텔 등. 4월 3일-5월 1일, 블록 화랑에서 마르셀 뒤상의 레디메이드 전시. 보스텔, 쾰른에서 베를린으로 이주.

1972
5월 1일, 블록의 기획으로 보이스의 「청소」가 칼 마르크스 광장에서 열림. 7월-9월, ‘신베를린 예술동맹「NBK」’의 기획으로 보스텔의 「전쟁의 참화 Desastres della Guerra」 프로젝트 중 일부인 해프닝 「베를린 의자」와 「베를린 침대차」가 공연됨. 보스텔은 보이스, 브레머, 페터 캄푸스, 회디케, 레베카 혼 등이 제작한 테이프를 모아 이 이벤트에 대한 비디오 영화를 제작.

1973
9월 9일-10월 3일,’NBK”독일 학술 교환 계획「DAAD」”베를린 페스티벌’의 주최로 「아방가르드 행위예술「ADA」7전이 예술 아카데미에서 열림. 이 전시는 필리우, 카프로우, 볼프 칼렌, 마리오 메르쯔 등의 ‘행위’ 및 환경 작품들과 보스텔의 해프닝 「베를린 열병」으로 구성됨.

1976
9월 3일, 「플럭스 합시코드 콘서트」가 블록의 기획으로 예술 아카데미에서 열림, 참가자는 브레히트, 조우 존스, 조지 매키어너스, 래리 밀러, 백남준, 보티에 등. 9월-10월, 퍼포먼스, 음악, 문학 등이 망라된 「소호 중심가 맨하탄」이 블록의 기획으로 예술 아카데미에서 열림.

1978
백남준 •보이스, 「조지 매키어너스를 기념함」전 1979
9월 15일, 르네 블록 화랑이 개관한 지 정확히 15년만에 문을 닫음. 주로 베를린에서 제작된 보이스의 작품들이 마지막 전시로 마련됐는데, 보이스는 이 전시를 위해 화랑 벽의 석고를 모두 떼어내어 스무 개의 나무상자 안에 포장했다.

1983
1월 21일-4월, 퍼포먼스, 강연, 콘서트, 전시회 등으로 이루어진 「3부로 된 플럭서스 소사」전이 DAAD 주최로 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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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 주로 독일의 여러 도시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국제적 전위예술운동인 플럭서스는 여기 참가했던 백남준이나 보이스 등 일부 작가를 제외하고는 우리에게 좨 생소 한 편이다. 플럭서스는 기존의 분업화된 예술 범주를 무너뜨리고, 예술과 현실 사이의 융합을 꾀하는 일종의 총체 예술개념을 표방하였다. 이 운동은 해프닝, 퍼포먼스, 이벤트, 액션 등으로 불리는 행위예술의 형태로 활발히 나타났는데, 거기에는 전위음악을 비롯하여 문학, 무대예술 등 다양한 예술매체들이 상호 결합되어 있다.
저자 르네 블록은 베를린에서 자신의 화랑을 통해 플럭서스의 활동을 지원하고 많은 플럭서스 공연을 기획한 플럭서스 운동 참여자의 한 사람이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이 목도한 베를린에서의 플럭서스 운동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저자가 서두에서 말하고 있듯이 플럭서스가 무엇인가를 정의 내리기란 쉬운 노릇이 아니다. 그것은 비단 플럭서스에 참가한 작가들의 국적이 매우 다양하다든가, 그것이 어느 일정한 곳에 본거지를 둔 운동이 아니라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다발적으로 일어난 국제적 성격을 띤 운동이었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플럭서스는 특정한 방법론을 내걸고 일정한 회원으로 구성된 기존적 의미에서의 그룹과 달리 뚜렷한 원칙을 내세운 바가 없고, 플럭서스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플럭서스라는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플럭서스의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모였다가는 각자의 활동지로 돌아가고, 또다시 재회하는 매우 자유로운 참여형식을 보여주기 때문에, 플럭서스에 참여한 모든 작가 개개인의 활동을 플럭서스의 범위에 넣어야 할지, 아니면 공식적으로 플럭서스라는 명칭이 붙은 활동만으로 한정해야 할 것인지도 분명치가 않다. 플럭서스 참가자의 한 사람인 조지 브레히트는 플럭서스에 대한 오해는 그것을 일정한 강령과 프로그램을 갖춘 그룹으로 보는 데 있다면서, 플럭서스는 원리도 방법론도 내세우지 않았고, 단지 기존 예술매체간의 엄격한 경계를 무의미한 것으로 보고, 이를 허물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한 개인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플럭서스가 지향하는 바에 대한 발언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플럭서스 운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매키어너스의 「플럭서스 선언」「1961」은 미술계에서 ‘경력을 쌓은’ 예술가들에 의해 생산되어 미술유통구조 속에서 상품으로 거래되는 예술, 주위 환경과 절연된 채 마치 진공 속에 존재하는 듯한 정적인 예술에 대한 거부를 표명하고 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당시 미술계의 주류로서 국제 양식화하여 있던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거부였다. 매키어너스의 선언은 이같이 기존 예술에 대한 반항으로서 플럭서스 운동의 의미를 규정하는 이외에 보다 적극적 정의도 시도하고 있다. 즉, 플럭서스는 단순한 일상적 사건이 갖는 단일구조적이고 비(非)작위적인 성질과 유희, 또는 희극적 요소를 결합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플럭서스는 극적 요소가 없는 일상적 사건과 대중적 무대예술, 개그, 어린이의 유희와 뒤샹을 한데 뒤섞은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여기서 보듯이 플럭서스의 선택폭은 상당히 넓은 셈이다.
원래 플럭서스란 명칭은 미국 출신 건축가 겸 디자이너였던 매키어너스가 일찌기 구상했으나, 발간되지 못한 잡지의 이름으로 붙여진 것이었다. ‘흐름, 변천’을 뜻하는 라틴어인 이 용어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리투스의 ‘만물은 창조의 흐름 속에서 유전한다’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1961년 매키어너스는 뉴욕의 매디슨 가에 ‘AG’화랑을 열고 전위적 음악가, 화가, 시인들이 참가한 일련의 콘서트를 열었다. 여기에는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의 영향을 받은 리차드 맥스필드, 잭슨 맥클로우, 헨리 플린트, 딕 히긴즈 등이 참여했다. 같은 시기에 라 몬테 영은 ‘실험적’ 예술관을 공유하는 미국 및 유럽 예술가들 -존 케이지의 가르침을 받은 알 한센, 알란 카프로우, 조지 브레히트, 백남준, 밴 패터슨 등을 위시한-의 작업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는데, 그는 매키어너스의 협력을 얻어 이를 「앤솔로지 An Anthology」란 제목의 책으로 발간한다. 매키어너스는 곧 재정적 곤란 때문에 화랑 문을 닫고 뉴욕을 떠나 독일의 비스바덴으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플럭서스 선언」을 발표하고 뉴욕의 동료예술가들을 초청하여 1962년 최초의 「플럭서스 축제」를 열었다. 그것은 당시 미술계를 지배하고 있던 추상표현주의와 음악계의 주류이던 국제 양식파, 또는 시의 기존 유파에 반대하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 누구나가 참여할 수 있는 개방된 집단전이었다. 「플럭서스 축제」는 비스바덴에 이어 같은 해 코펜하겐과 파리에서 잇달아 열렸고 네번째는 이듬해 2월 뒤셀도르프에서 열렸다.
플럭서스의 초기 이벤트들은 비교적 극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으나 점차로 극적, 허구적 요소카 삭제 되어가면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시공간을 강조하는 매우 단순한 개인적 행위로 환원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조지 브레히트의 작품 「오르간 소곡」의 지시사항에는 단지 ‘오르간’이란 단어 하나만이 등장한다.
오르간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는 전적으로 ‘연주자’개인의 자유에 달려 있다. 「플루트 독주」라는 작품에는 ‘해체/조립’이라는 두 단어 외에는 아무런 지시사항이 없다. 따라서 ‘연주자’는 악기를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하는 지극히 단순한 행위로 만족할 수 밖에 없다. 또한 그의 「현악사중주」는 ‘악수하기’라는 지극히 ‘비예술적’인 일상 행위를 지시하고 있을 따름이다.
위의 예에서도 보듯이 플럭서스의 예술가들은 예술과 현실 사이의 간격을 없애고자 했으며, 연극, 음악, 미술, 문학, 무용 등으로 뚜렷이 구분된 예술매체간의 인습적 경계를 무너뜨리고자 했다. 그들에게는 인간 경험의 총체성과 결부되지 않은 표현형식이란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상이한 매체들을 결합시킨 ‘인터미디어’, 즉 음악과 시각예술, 무대예술과 시를 융합한 통합양식개념을 발전시켰다. 플럭서스의 초기 참가자들 중 많은 사람이 음악가 출신이었던 점에 비추어 특히 음악적 요소가 강조된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플럭서스의 이벤트에는 대개 음향효과와 전위음악이 인체의 동작과 다양한 ‘비예술적’ 재료들과 함께 결합되어 있다. 음악과 무대예술과 같은 시간예술의 특성이 도입됨으로써 예술작품은 더 이상 물적 대상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성되었다가 소멸되는 동적인 과정으로 대체된다. 이것은 기존 미술에 있어서의 정적인 작품 개념 -예술가는 예술적 가치를 지닌 물적 대상을 만들어내고 그 대상은 영구 불변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서 감상되고 소유되며 거래되는-을 뒤엎은 것이다. 예술작품을 과정으로서 규정하는 경향은 포스트모더니즘 전반에 공통된 것이기도 하지만, 플럭서스의 경우에는 특히 시간성이 강조되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성, 변화하고, 소멸하는 불확정성의 미학 또는 소멸의 미학이 그 특색 이 라고 하겠다.
그러나 애초에 매키어너스가 제기한 예술의 상품화의 문제가 해결됐는가는 의문이다. 물론, 플럭서스의 소멸의 미학이 예술 오브제의 생산과는 무관한 듯 보이는 것이 사실이며, 작품의 아이디어나, 공연과정을 기록한 영상, 문서 등의 물적 자료는 작품의 증거물은 될지언정 과거 예술작품과 같은 감상의 대상으로서의 가치가 없음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 플럭서스가 미술계의 인정을 받아 ‘유명’해지자 그러한 물적(物的)자료들은 미술관에 전시되기도 하고 수집가들의 소장목록에 오르게 된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뒤상의 ‘레디 메이드’가 본래 의도와는 반대로 기존 미술유통구조 내로 흡수되는 역설적 운명을 겪은 이래로 플럭서스를 포함한 뭇 전위예술 역시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되는 것이 아닐까.

* 박승호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6-26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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