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ng 상호 작용 예술

Art-ing 상호 작용 예술

신보슬(미학)

1. 또 하나의 세상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 공간 이외에 또 하나의 공간을 가능하게 하였다. 접속(connected)과 동시에 열리는 이 새로운 신천지는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가능했던 상상의 세계를 바로 우리 곁으로 가져다주었다.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던 할 수 있는 세상.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가 이룩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세상. 사람들은 유토피아에 도착한 것 같다. ‘접속되었습니다’라는 메시지는 유토피아를 알리는 환상의 목소리이다. 고민은 던져버리고 환희 웃으라고 모니터는 우리를 보며 깜박이고 있다. 과연 사이버 스페이스는 이상의 세계인가. 많은 학자들이 이에 반론을 제시한다. 민주주의적 자유로운 공간인 듯 보이는 이 환상의 땅은 서구 합리론의 극단으로 신체와 정신이 분열되어 정신만이 유희하는 공간이며, 주체가 분열되는 곳이라고 이야기한다. 전례 없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단순히 생산성의 증대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생활 깊숙히 침투해 들어와 인간 지각의 방식과 진리의 문제를 뿌리 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세상. 그 세상 한가운데에서 다빈치의 후예들은 ‘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는 맥루한의 유명한 구절에 충실하여 미디어의 본질. 미디어의 메시지를 읽어내고, 탐구하고 있다.

2. 예술. 재미있는 놀이 – 상호작용예술에 관하여

니체(F. Nietzsche)는 예술이란 ‘디오니소스적 충동과 아폴론적 충동의 합’이라고 했고, 크로체(B. Croce)는 ‘직관속에서 감정과 이미지의 선험적인 참된 종합’이라 했다. 베르그송(H. Bergson)은 ‘자연과 인간과의 교감의 길’이 바로 예술이라 했는가 하면, 수리오(E. Souriau)는 ‘어느 일정한 질서의 구성으로서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해서 사물을 창조해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이라 정의했다. 그러나 어떤 정의도 모든 예술이 지나온 모든 시대의 예술을 다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당대 온갖 영예를 누리던 예술관도 시대가 흐른 뒤 재평가 받는가하면, 그 반대의 경우를 찾아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예술에 대한 정의가 시대를 초월한 것은 아님을 증명해준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작품은 관람객과 만남으로 인해서 의미를 획득하고, 관람객이 작품을 마주함으로서 미적 경험으로 고양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던 간에 작품은 관람자와 소통을 이룰 때에야 비로서 가장 의미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예술은 언제나 관객과 소통하려 했고, 상호작용적이었기 때문에, 상호작용성이라는 것이 컴퓨터 예술의 고유한 특징은 아니라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상호작용성은 작품에 대한 소비, 즉 작품을 관람자의 주관적인 응시아래에 수동적인 놓여짐에 의해 이루어 졌다. 반면에 상호작용 컴퓨터 예술은 작품과 관람자, 그리고 예술가와 기술자/과학자 사이의 전통적인 경계를 허물어 내고, 작품과 관객 사이의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상호작용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상호작용 예술에 대해 논의하기 어려운 것은 논의하는데 사용할만한 상위 언어(meta language)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설령 예술이 언제나 상호작용적이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서구적 관점에서 시각 예술은 ‘상호작용성의 미학'(aesthetics of interactivity)이라는 전통을 가지고 있지 않다. 회화가 정지된 이미지(still image), 색상, 선, 형태와 재현적인 기하학 그리고 원근법 등에 대한 풍성한 성과를 통해서 이미지를 잃어내고, 영화는 영화적 언어로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실시간 상호작용의 미학을 위한 문화적, 미학적 장치는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논의의 어려움은 가중된다. 크래리(Jonathan Crary)가 주장했듯이, “예술작품의 의미는 감상자와 작품으로 구성된다”고 할 때, “관찰자의 기술”이라는 것은 “예술가의 기술”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예술가는 끊임없이 새로운 규준(canon)과 새로운 장르를 개발하기 위해서 분투한다. 그러나 상호작용적 경험의 역동성이 예술가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용자의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감상자가 이야기하기 위해서 필요한 언어가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술의 의미가 전달되기 어렵고, 나아가 의미 자체가 불가능한 ‘의미의 위기’ 상태에까지 이른다.
그러므로 상호작용 예술에 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호작용의 역동성에 대한 의미와 양상을 발견하고, 어떻게 미학적으로 적용이 가능한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미적으로 만들어진 상호작용의 역동성과 작품의 다른 요소들, 즉 물리적 대상이나 이미지, 그리고 사운드가 어떻게 하나의 통합적 미적 총체를 형성하게 하는 지에 대한 연구는 그 이후에 이루어 질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상호작용성’이란, 전기 스위치를 켜면 불이 들어오는 것과 같은 실시간에 이루어지는 쌍방향적 소통을 의미하지만, 보다 복잡한 지적, 인식적 복합체를 구성한다. 고속의 데이터 처리과정을 통해서 가능한 이런 능력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을 또다시 바꾸고 있다. 그리고 이런 변화들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변화로 이어진다.
상호작용적인 예술작품의 경향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진다. 먼저 아감(J. Agam)이나 소토(Soto)등의 작업에서 보이는 것처럼, 작품이 그 구조의 일부로서 포함하고 있는 매커니즘과 인간의 시각적 매커니즘의 대응에 의한 상호작용적 작품이 있고, 둘째로 가변적인 작품을 관객이 자유로이 변화시킬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세 번째의 경우는 작품이 외부환경의 변화에 반응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캘더(A. Calder)처럼 기계적인 반응을 모색하는 작가가 있는가하면 쇠페르(N. Shoeffer)와 같이 작품에 내장된 센서에 의한 전자적인 반응을 실험하는 작가도 있다. 끝으로 인간의 퍼포먼스에 반응하는 가상의 환경이 있다. 상호작용 컴퓨터 예술작품은 마지막 경우에 속하는 상호작용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잘쯔(D. Z. Saltz)는 이러한 상호작용성을 “(1) 감지장치나 입력장치가 어떤 사람의 행동의 특정 부분을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디지털 형식으로 변환시키면, (2) 컴퓨터 출력 자료는 구조적으로 입력장치와 관련되어 있어서 입력은 출력에 영향을 주게되고, (3) 그 출력자료들이 다시 실제 세계의 현상으로 변형되어서 사람들이 지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정의 내린다.
상호작용 컴퓨터 예술도 그 반응하는 방식에 따라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그 하나는 실제적이거나 개념적 혹은 가상적인 공간에 대한 조작을 통해서 탐험할 수 있는 구조(navigable structure)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공간을 일종의 건축물과 같이 재조직하고, 각각의 위치에 맞추어 하나의 시점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참여자는 공간을 탐험하는 과정에서 일련의 내용물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story)가 진행되는 과정을 통해 공간에 대한 독특한 방식의 읽기 방식을 경험한다. 항해할 수 있는 구조는 규칙적인 격자모양으로 교차되어 있는 네트워크 방식이나 단일한 이야기를 형성하는 과정, 혹은 많은 선택지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가는 과정을 통해서 공간을 경험하게한다.
항해 가능한 구조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는 도시의 지도모양을 이용한 쇼(Jeffry Shaw)의 《읽혀지는 도시》(The Legible City)이다. 이 작품은 스크린 앞에 고정되어 있는 자전거를 타고, 컴퓨터가 만들어낸 도시를 여행하는 간단한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도시는 건물들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알파벳 문자로 이어지기 때문에 참여자에게 색다른 지각 경험 방식을 제공한다.
관객들은 핸들조작이나 페달을 밟는 속도에 따라서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풍경을 여행하면서 일종의 ‘기호의 밀림’으로 은유되는 도시를 체험한다.
나뭇가지 모양의 구조물을 사용해서 참여자들이 점점 더 특수한 경험을 하게 하는 작업들로는 서먼(Paul Sermon)의 《지금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Think about the People Now)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현충일(Rememberance Day) 기념 행사가 있던 다음날, 오전 11시에 런던의 화이트 홀에서 한 남자가 “지금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외치면서 분신 자살했던 실제 사건을 녹화한 필름으로 만들어졌다. 작가는 녹화했던 자료들을 서로 연결되어 있는(interlink) 파일들로 재구성하여, 참여자가 컴퓨터 시스템을 사용해서 둘러보고 다닐 수 있게 만들었다. 관람자는 조이스틱을 작동해서 웨스트민스터 튜브 역(Westminster Tube Station)에서 출발하여 화이트 홀 주변을 돌아다님으로써 작품에 참여한다. 그 구조를 통과해 가는 동안 지나치는 엠뷰런스 소리를 듣지 못할 수도 있고, 가솔린을 뒤집어쓴 채 집회에 참여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할 수도 있다. 어쩌면 시위하는 군중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이건 참여자는 전적으로 자신의 결정에 의해서 화이트 홀 주변에서 벌어지는 64개의 상황들 중 하나에 속하게 된다.
서먼은 이 작품이 본질적으로 참여자의 결정에 따라서 적당한 순간(오전 11시에서 약 2분간의 침묵의 시간) 적절한 장소(화이트 홀)에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시간 속의 한 계기”(A Moment in Time)라고 해석한다. 이 작품은 또한 참여자가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한 잠재력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 구성(Social Construction)에 대한 개념으로 이끌어갈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참여자 자신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규정함으로써 일종의 역할극에 참여하는 경험을 하게 되고,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도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한다. 경험의 전체적인 재현, 즉 작품에 대한 메타 경험(metaexperience)은 이와 같은 형식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두드러진 특징이다.
상호작용 예술작품에서 구조를 여행하게 하는 특성은 마치 미로 속을 빠져나오는 것과도 비슷한 경험을 제공하지만, 콜파에르트(Eric Colpaert)가 설명하는 것처럼 이런 작품들은 미로와는 달리 “올바른 경로를 찾아가는가 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그런 경로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상호작용적 예술 작품들은 또한 다양한 관점을 제공함으로서 주관적인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는 해석의 주관성을 작품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작품과 상호작용을 하는 사람들은 작품의 맥락에 놓임으로써 개인적인 정체성을 세워간다. 여기에서 정체성은 참가자 자신이 제시된 가능성들 안에서 이루는 선택을 반영하고, 좀더 확대해서 해석한다면, 다양한 가능성들을 실험하면서 동일한 구조 안에서 대안적 읽기(alternative reading)를 통해서 형성된다. 관객의 참여가 작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함으로서 작가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감소한다. 하지만, 주어진 관점을 선택하는 행위를 통해서 참여자들이 어떻게 관련을 맺으며, 어떤 방식의 탐험이 가능한가하는 것은 전적으로 예술가들이 지닌 표현력에 달려 있기 때문에, 작가는 무관심적이나 부차적인 역할이 아닌 중심적인 역할을 여전히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술가는 참여자가 스스로를 창조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미디어를 만들고, 그 안에서 참여자는 일종의 창작자가 됨으로서 예술가와 기술자 그리고 관람자의 구분은 더욱 모호해진다. 크루거의 《비디오 플레이스》(Video Place)는 예술가가 완결된 작품이 아니라 경험 가능한 미디어를 만들어 내는 방식의 작업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다.
원래 예술가에서 출발한 크루거는 1969년 위스콘신 대학에서 《글로우 플로우》(Glow Flow)라는 컴퓨터 예술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상호작용 컴퓨터 시스템 연구를 구상했다. 이 프로젝트는 이후 《메타플레이》(Metaplay)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메타플레이》에서 관객이 방안에 들어가면 자신의 모습이 대형 스크린에 비추어진다. 작가는 다른 방에서 그 영상을 보면서 그래픽 타블렛에 영상의 흔적을 따라 그린다. 작가가 그린 영상이 관객 앞에 놓여진 스크린에 겹쳐짐으로서 관객과 작가사이의 의사소통을 이루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관객이 팔을 움직이면 작가가 그 형상을 따라 선을 그리고, 관객이 계속 움직이면 움직임에 맞추어서 계속 선을 그린다. 결국 나중에 스크린 위엔 움직임의 흔적이 남고, 그 다음에 들어온 관객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더해가고 이런 방식으로 우연히 방안으로 들어온 관객과 작가의 돌발적인 관계를 시도하게 된다.
크루거의 작품은 1975년 이후《비디오 플레이스》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비디오 플레이스》역시 1960년대 후반부터 인간과 기계(컴퓨터)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일련의 연구과정의 결실이었다.《메타플레이》에서 입증되었듯이 서로 다른 곳에 있는 두 사람이 서로 병치되어 나타나는 하나의 이미지를 바라보면서, 마치 한 장소에 있는 것처럼 상호작용한다. 사람들은 신체에 대해서 느끼는 것과 아주 흡사한 방식으로 자신의 이미지에 반응한다.(만일 참여자의 이미지가 실시간에 반응하는 경우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비디오 플레이스》의 개념은 여기에서 출발하였다. 일반적인 커뮤니케이션은 두 지점 사이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반면에,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은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두 부분에 동시에 가능한 정보를 구성하는 제 3의 장소를 창출한다. 제 3의 공간인 《비디오 플레이스》 안에서 물리적으로는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참여자들은 자신의 이미지가 병치되어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마치 같은 공간에 있는 것처럼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미국 100주년 기념으로 행해진 ‘전화의 소개’라는 프로젝트를 발전시킨 200주년 기념행사의 주제로 제안되었던 《비디오 플레이스》는 백남준이 기획했던 《바이바이 키플링》(Bye Bye Kiepling, 1986)에서처럼 인공위성을 사용하여 유럽과 일본에 설치되어 있는 《비디오 플레이스》를 통해서 예술가가 구성해 놓은 인과 법칙의 세계인 그래픽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경험을 구성해 보려는 시도였다. 일본, 영국, 미국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로 만나, 비디오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공을 주고받는다거나, 뉴욕에서 따르는 맥주를 동경에서 받아 마시는 등의 행동을 할 수 있는 환경, 인위적인 제 3의 공간을 만들어내려 했던 이 계획은 현실적인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1975년 밀워키 미술관에서 그 개념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비디오 플레이스》안에 들어서면 참여자는 20피트정도 앞에 비디오 프로젝션을 바라보고 서 있다. 이 프로젝션은 다른 컴퓨터 그래픽과 결합되어 있는 자신의 라이브 이미지를 보여준다. 참여자 뒤에는 커다란 반투명의 형광색을 발하는 판이 놓여 있어서 컴퓨터는 참여자와 배경을 구별한다. 또 다른 카메라가 프로젝션 스크린 아래에서 참여자를 바라보고 설치되어 있다. 참여자의 이미지는 컴퓨터에 의해서 디지털로 분석되어 몇단계의 처리장치기(processor)로 보내진다. 참여자가 어떤 행동을 취하면, 처리장치는 그 행동을 자세 혹은 움직임의 비율등으로 분석하고 이에 대한 반응을 결정해 낸다. 어떤 경우에는 이미지의 색이 변하기도 하고, 또 독특한 소리를 만들어지기도 한다.

각각의 신체의 움직임은 제한된 미적 매체(resticted aesthetic medium)이다. 사실상 당신의 신체는 예술작품을 만드는 도구가 된다. 이러한 상호작용의 목적은 미적 창조물을 만드는 즐거움을 소통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매체들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관객의 신체가 움직임에 의해 조절되는 역동적 이미지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전통적인 고정된 매체에서 훈련받는 예술가들이 이러한 즐거운 결과를 만들어 내는 데에 더 탁월하다고 할 수는 없다.

기계와 인간 사이의 일대일의 인터페이스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지만, 몇 가지 하드웨어가 추가된다면, 여러 사람들이 비디오플레이스 안에 들어간다거나, 원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마치 한곳에 있는 것처럼 상호작용할 수도 있다. 참여자들과 컴퓨터의 이와 같은 상호작용 통해서 참여자들이 창조성에 대한 강한 경험을 한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크루거는 《비디오 플레이스》기술과 서덜랜드(Ivan Sutherland)에 의해 만들어진 HMD, 또는 3차원 영상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에서 ‘인공 현실'(artificial reality)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인공 현실’이라는 개념은 레니어(Jaron Lanier)가 1989년 ‘가상 현실'(virtual reality)이라고 명명한 것과 1984년 깁슨의 공상과학 소설에 나타난 ‘사이버 스페이스’을 포괄하여 만들어진 ‘인공적 반응 환경'(artificial responsive environment)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인공 현실로서의 《비디오 플레이스》는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가 아니라 여러 가지 경험들이 가능하고, 새로운 예술 장르들이 만들어질 수 있고, 기존의 예술 장르들은 새롭게 재창조될 수 있는 미디어로서 기능한다. 인공 현실과 같은 미디어를 통해서 회화는 2차원적인 평면이 없이 3차원에서 직접 그릴 수도 있다. 메사츄세츠 대학의 멀로리 (Rober Mallory)는 빛이 공간 안을 움직이듯, 두 가지 스테레오 시간의 노출을 받아들여 3차원에서 빛으로 그림을 그려 보임으로서 이와 같은 가능성을 입증했다. 마찬가지로 조각도 물리적인 재료나 중력의 제약에서 벗어나 제작될 수 있다.
공연 예술은 일반적으로 공연하는 사람과 관람하는 사람이 엄격히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상호 작용 예술과는 반대적인 입장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상호작용 예술은 관람객을 무대 환경 사이로 끌어들여 참여자로 만듦으로써, 공연 예술의 새로운 미적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예를 들어, 무용은 무용수들이 음악에 의해 만들어진 패턴에 따라 춤을 추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인공 현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 예술에서는 그 과정이 전복되어 음악이 무용수의 동작에 맞추어 진다. 무용수들이 자신의 신체를 움직여 음악을 만들어 내면, 여기에 상응해서 시각적 이미지들이 함께 펼쳐진다. 무용수는 마치 자신의 신체적 동작을 악기처럼 이용해서 ‘환경을 연주’한다. 또한 레이저 광선을 이용해서 동작을 추적해 가면, 광선의 그물망 안에 무용수를 드러낼 수도 있다. 무용수는 새로운 환경 안에서 테크놀로지의 비밀을 밝혀 내고, 그 비밀에 반응하고, 그것을 통제해가면서, 테크놀로지를 통해 스스로를 구성해 가고 표현한다. 관객과 무대 무용수가 네트워크화되면, 양자 모두 좀 더 복잡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탐험하게 될 것이다. 이런 유형의 공연은 전통적인 기준과 태도로는 적절히 감상되어질 수 없다. 새로움을 수용하고, 즐거워하며,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관객이 없이는 공연이 이루어질 조차 없다.
공연 예술의 한 분야인 연극도 인공 현실 안에서 새롭게 나타난다. 관객과 배우 사이에 존재했던 물리적인 단절은 관객의 의자에 부착된 감지장치에 의해서 파괴된다. 극의 진행에 따라 나타나는 관객의 청각적이거나 시각적인 반응은 공연 안에 포함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관객은 작품과 자신이 대화중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극중 한 인물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극장의 개념 역시 변화한다. 배우들은 동일한 물리적 공간이 아닌 지리적으로 분산된 공간에 있지만 《비디오 플레이스》를 통해 하나의 작품을 공연할 수 있다. 서로 다른 근원지에서 송신된 이미지들이 포개져서 구성되는 것이 《비디오 플레이스》공간 안에서 하나의 단일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배우들이 마치 서로 다른 문을 통해서 하나의 방에 들어오는 것처럼 각 지역의 《비디오 플레이스》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의 공간 안에 함께 있는 것처럼 지각한다. 런던에 있는 배우와 서울에 있는 배우가 하나의 작품을 공연하면, 워싱톤에 있는 관객이 이를 감상한다. 관객은 실제 장면과 전자적 장면이 혼합된 가상의 인공 환경을 바라보면서 반응한다. 완전한 인공 환경에서만 이루어진 공연이라면, 관객을 리얼리티 고글을 사용해서 작품을 여행하고 돌아다닐 수도 있다. 따라서 관객들은 하나의 작품을 보았지만, 서로 다른 작품을 관람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줄거리(story)에 대한 비중도 줄어든다.
인공 현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연은 정해진 줄거리가 없고, 우발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종종 재즈 연주에 비유된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참여자의 즉흥적인 행동을 만들어내면, 배우들 역시 즉흥적으로 반응하거나 배우들이 참여자에게 어떤 배역을 할당해주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이런 유형의 체험은 배우와 참여자 모두에게 새로운 연극의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상호작용 예술작품들은 항해하는 구조이던지 아니면 상호작용 미디어의 형식이건 간에 상호작용을 하는 사람 자신에게 반영한다. 《비디오 플레이스》, 탄넨바움(Ed Tannenbaum)의 《회상》(Recollection), 비비드 그룹(Vivid Goup)의 《만다라》(Mandala)와 같은 작품들에서 이러한 특징은 두드러진다. 상호작용을 하는 참여자의 이미지나 실루엣은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맥락안에서 함께 작용하며, 실질적인 힘으로 나타난다. 관람자는 비디오 프로젝션 위에 나타난 자신의 이미지 재현을 바라본다. 이 재현은 마치 거울이나 그림자와 같이 참여자의 움직임에 따라서 변경되며, 예술가가 공간에 미리 마련해 놓은 여러 가지 가능성과 운영상의 소프트웨어에 따라서 변형한다. 작품은 변형되거나 재구성된(recontextulize) 반영(reflection)과 행위로 이루어진다.
반영에는 거울과 같이 동일하게 반사하는 반영과 본래의 이미지를 왜곡시키고 단순화시켜 나타내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먼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반영은 나르시시스(Narcissus) 신화에서 시작된다. 나르시시스는 연못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깨닫지 못하고 연못 위의 젊은이가 자신의 사랑에 답하지 않는다고 절망하였다. 나르시시스 신화는 미디어와 관련해서 더 빈번히 거론된다.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이라고 선언했던 맥루한은 “나르시시스” 라는 말이 ‘마비됨’을 뜻하는 그리스어 나르코시스(Narcosis)에서 유래한 것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거울이라고 하는 수단으로 이루어진 자기 자신의 확장이 그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그는 확장된 자기, 또는 반복된 이미지의 자동 제어기구로 변화했다. 숲속의 요정 에코는 나르시시스의 말을 단편적으로 이용해서 그의 사랑을 얻으려 했지만 이루지 못한다. 그의 감각은 마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확장에 자기를 맞추어 놓고, 그것과 밀착하여 하나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 신화의 요점는 인간은 자기 이외의 것으로 확장된 자기 자신에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잡히고 만다는 사실이다.

한편 왜곡된 유형의 반영은 오비디우스의 『변신론』에 나오는 요정 에코(Eco)의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에코는 쥬피터가 다른 요정들을 고르는 동안 주노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서 그녀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주노는 에코의 속셈을 알아차리고서 크게 화가 나, 에코에게서 말을 하는 능력을 빼앗아버렸다. 그래서 에코는 그녀에게 말을 거는 사람의 마지막 단어만을 반복하게 되었다. 어느날 에코가 숲속에서 나르시시스를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는 나르시시스가 한 말의 끝부분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상호작용 예술가들은 마치 에코가 상호작용의 수호신이라도 되는 듯, 주어진 것을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는 활동에 골몰하고 있다.
연못에 비추인 나르시시스의 반영은 완전한 ‘거울과 같은 반영’을, 조금씩 지연되고, 왜곡되는 에코의 말은 ‘왜곡된 반영’을 보여준다. 거울과 같이 정확한 반사는 중재되지 않은 직접적인 피드백을 통해서 자기 몰입(self-absorption)이라는 닫혀진 시스템을 만들어내지만, 변형된 자기 몰입은 자기와 세계간의 대화로서, 스스로에 대한 다른 누군가의 이미지와 관련성을 검토하고, 의문시하며, 변형시킬 수 있게 한다. 대부분의 상호작용 컴퓨터 예술은 실제와 동일한 똑같은 반사가 아니라 에코와 같은 지체되고, 왜곡된 반영을 만들어냄으로서, 참여자가 단순히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숙고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준다.
상호작용을 하는 사람과 변형된 반영 사이의 관계는 입체적이다. 3차원의 공간을 살펴볼 때 오른쪽 눈이 바라보는 이미지와 왼쪽 눈이 바라본 이미지들은 조금씩 다르지만, 두 관점 사이의 긴장이 머리속의 상대적인 깊이에서 해소된다. 마찬가지로 상호작용 예술작품에서 왜곡되어 나타나는 반영은 유사한 입체적인 긴장을 만들어 내어 또 하나의 시점에서 만들어진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제시해 준다.
참여하는 사람의 변형된 실루엣이 비디오 스크린에 그려진 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작품 중 하나로 로커비(David Rokeby)의 《아주 예민한 시스템》(Very Nervous System)이 있다. 이 작품에서 컴퓨터와 비디오 카메라, 이미지 처리 장치, 신서 사이저, 사운드 시스템들이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 그 공간 안에서 참여자의 동작이나 움직임 등이 즉각적인 소리, 음악을 만들어 내게 되고 관람자는 작품에 참여함으로서 신체를 낯설게 하고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를 갖는다.
상호작용적 예술작품은 아직 초보적인 실험 단계이기 때문에 아직 해결해야 할 많은 어려움들을 가지고 있다. 창작에 있어서의 문제는 이러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아이디어들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기술적 뒷받침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첨단 기술장비를 사용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기술적 보조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경제적인 부담 역시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은 개인적인 작업보다는 기관이나 단체의 후원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작품이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유형의 상호 작용성이 제시되었을 때 관람자의 적절한 반응을 유도해야한다는 문제가 있다. 특히 작품에서 제시하는 유형들은 비교적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관람자들이 적절한 반응을 유도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대다수의 관람객들은 조심스럽고 회의적인 시선으로 작품과 마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작품이 상호작용적임을 증명해 주길 요구한다. 항해할 수 있는 작품에서는 작품에 대한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명백한 상호작용성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상호작용성을 위해서는 관객의 기대도 적절하게 예상되어 조절되어야 한다. 만일 한 행동에 대한 반응이 유형화된다면, 처음의 놀라움이나 긴장감은 쉽게 식상할 것이다. 참여는 단지 관람객의 예상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전락하게 된다. 반대로 예상에 완전히 어긋나는 반응은 관람자의 관심을 유발시키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상호작용 컴퓨터 예술은 작품이 작가에 의해서 완결된다는 전통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과정으로서의 예술을 제안하고 관람객을 끌어들임으로서 새로운 미적 경험을 영역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3. 나는 참여한다. 고로 존재한다.

예술이 자연의 모방이라면, 컴퓨터는 자연을 충실하게 모의하는 도구로서 다른 어떤 예술적 도구보다 우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정교한 기술이 예술이라면, 컴퓨터가 제공하는 기술은 인류의 역사상 최고의 정교한 기술임에 분명하다. 또한 예술은 일종의 놀이이다. 물론 모든 놀이가 예술인 것은 아니지만, 예술적 체험에서 오는 즐거움은 놀이와 유사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컴퓨터도 하나의 놀이로서 예술적 즐거움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예술이 가상의 현실이라면, 즉, 가상적인 것을 만들어서 가상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몰입되어질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면, 컴퓨터는 최고의 몰입환경을 만들어내는 미디어로 예술일 수 있다. 현실을 추상화시켜 미적으로 만들고, 증폭시키는 예술적 가상은 무엇보다 컴퓨터 안에서 완벽하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컴퓨터 예술은 기존의 예술 작품이 가지고 있던 ‘물질성’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예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왔다. 《비디오플레이스》, 《지금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또는 《읽혀지는 도시》등의 상호작용적인 작품들에서 보았듯이, 예술가들은 완결된 대상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들은 새로운 경험, 새로운 관계성을 구성하는 작업에 골몰한다. 관람자가 참여하지 않으면, 작품은 아무 의미가 없다. 작품의 의미는 작품과 참여자의 상호작용성이 이루어지는 순간 성립하기 때문에, 대상성 보다는 관계성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된다. 상호 작용, 상호 대화, 다중 감각성들에 대한 문제의식과 정서적, 정신적 상태 그리고 시간적, 공간적인 차원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이다. 그러므로 이런 상호작용적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개념적이다. 참여자의 행동이 환경으로부터 반응을 유도해내고, 이때 나타나는 반응은 일상적으로 예상되는 결과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참여자들은 생각하기를 강요당한다. 환경에 참여하는 동안 참여자는 계속해서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을 개념화한다. 관계가 변하면, 그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개선하거나 혹은 변화의 유형에 함께 묶여있는 또 다른 것들을 생각해간다.
상호작용 컴퓨터 예술에서는 ‘행동과 반응’이 주요 문제이기 때문에, 참여자의 행동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 그러나 행위성에 대한 실험은 상호작용 컴퓨터 예술에서 새롭게 시도된 것은 아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행위성에 주목하였다. 예를 들어 드 쿠닝(William de Kooning)은 정신의 행위를 그림으로 옮겨내었고,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은 자신의 육체적인 행위를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하지만 상호작용 예술에서 예술가들은 자신의 행위가 아닌 또다른 육체의 움직임, 즉 참여자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움직임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는 등 행위의 주체에 대한 범위를 확대시켜서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행위를 중심으로 한 상호작용성은 육체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가져왔다. 상호작용 컴퓨터 예술작품에서 참여자의 이미지와 행동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그로 인해서 새로운 방식의 미적 경험이 발생한다. 생존을 위한 도구로서의 육체가 아닌 육체 자체를 바라보는 시선을 제안한다. 컴퓨터 테크놀로지는 종종 육체를 배제한 정신의 유희를 조장하고, 육체와 정신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한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컴퓨터 미디어를 적극 사용하는 상호작용 예술 작품은 육체 그 자체를 경험하게 한다. 육체가 없이는 어떤 상호작용성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육체는 아주 주요한 계기이다. 비록 스크린 위에 나타나는 육체의 이미지는 만화같이 단순화되거나 실루엣만 나타나는 식으로 왜곡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참여자는 단순화된 육체의 이미지를 가지고 육체를 새롭게 경험하면서 작품과 소통한다. 이러한 경험은 수동적인 미적 관조가 아니라, 언어나 또 다른 상징체들의 매개가 없이 컴퓨터가 만들어낸 이미지들과 참여자 사이의 즉각적이고도 직접적인, 능동적인 의사소통의 과정, 더 나아가 새로운 지각을 통해 나타나는 새로운 미적 경험으로 자리한다.
상호 작용적인 컴퓨터 예술은 관객과의 의사소통 “과정”을 중시함으로서 작품으로서의 전통적인 예술 개념이 지니고 있는 권위를 파기하려 한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종종 20세기 초반에 성행하였던 퍼포먼스(performance)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퍼포먼스는 그것을 행하는 집단에 따라서 그 특징이 조금씩 차이가 나기 때문에, 명확한 규정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퍼포먼스는 예술이 가지고 있는 구속에서 벗어나 관객들이 일상에 매몰되지 않고 깨어있게 하며, 그러기 위해서 예술가와 관객이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장(field)을 마련해야 한다는 이상을 공유하였다. 그들은 “대문자 A로 시작하는 예술(Art)이 갖는 엄숙, 신성, 고상, 심각성을 파괴”하고, 삶과 예술, 종교가 하나로 어울어진 곳으로 되돌아가는 총체적인 삶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연극이나 오페라, 무용 등의 전통적인 공연 예술이 무대와 객석이라는 이분법적이고, 수동적인 관조를 제안하는 반면에, 퍼포먼스는 고대의 제의(ritual)와도 같은 원형적이고, 능동적인 관조를 제안한다. 퍼포먼스는 프로시니엄 아치(proscenium arch)라는 형식을 깨고, 직접적으로 참여하게 하여 역동성을 체험할 수 있게 하면서, 주제와 객체의 이분법이 소멸시켰다.
퍼포먼스의 이러한 주요 특징들은 ‘플럭서스'(Fluxus) 그룹의 작가이자 이론가인 켄 프리드만이 제시한 11개의 규준이 잘보여준다. : ①세계주의 ②인생과 예술의 통합 ③실험주의, 과학적 공동작업, 우상파괴 ④우연성 ⑤놀이정신 ⑥단순성과 절제 ⑦함축성 ⑧예증주의 ⑨특수성 ⑩시간성 ⑪음악성
상호작용 컴퓨터 예술 역시 예술가(창작자)와 관람자의 이분법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퍼포먼스의 역사와 맥락을 같이 한다. 전세계적인 통신망은 예술의 세계화를 이룩하였다. 컴퓨터가 만들어낸 단순한 이미지들에 대한 참여자의 반응은 다양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같은 작품 안에서도 참여자들은 각자의 결정과 반응에 따라 서로 다른 경험을 한다. 그것은 마치 놀이처럼 직접 참여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고, 골치 아프고 심각한 경험이 아닌 즐거운 경험이다. 가상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미적 체험에서는 새로운 개념의 공간성과 시간성이 강조되면서 과정에 주목한다. 어디에 도착하는가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분야인가도 중요하지 않다. 효과적인 관계를 구성하고 효과적인 소통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다양한 예술 장르가 함께 어울어지기 때문에, 장르의 구별 자체가 무의미하다. 작품은 하나의 거대한 종합예술, 총체 예술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퍼포먼스가 우연성 마저 계산에 넣고 있는 반면, 상호작용 예술은 비의도성, 무작위성, 계산되지 않음의 특징이 더욱 강조되어 있다. 따라서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상호작용 예술은 해프닝(Happening)에 더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해프닝은 완전한 우연성에 내맡긴 것으로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까지 활발하게 벌어진 형식이다. 해프닝은 비연극적이고, 탈영역적인 연극 형식, 우발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해프닝 역시 주제, 소재, 행위의 변화에 따라서 다양한 형식으로 전개되는데,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없애려는 시도가 일반적인 경향이다. 해프닝적 회화는 행위자체를 표현으로 삼아 행위성을 강조하였다. 미래파와 다다의 영향이 짙게 배어나는 회화에서 행위성의 강조는 직접적으로 폴록과 케이지(John Cage)로 대표되는 뉴욕 화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한때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올덴버그(Class Oldenburg)는 회화와 조각의 결합을 꾀하면서 대중의 행동을 작품에 끌어들였다. 그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해프닝을 현실 전체의 원동력으로 받아들여, 다시 변경된 현실을 강조하기 위한 욕망으로 삼았었다. 예술가가 일단 경험적 상황을 구성하면, 그 이외의 모든 행위와 반응, 과정, 결과는 그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참여자의 우연적 행위에 전적으로 내맡겨진다.
그러나 퍼포먼스와 해프닝은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물고, 예술의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관객에게 다가가려 했던 목표에 도달하는데 실패하였다. 미술관을 벗어나 열린 공간으로 나온 행위들은 현실과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그들의 행위에 등을 돌렸다. 행위 예술가들의 바램과는 반대로 관람객들은 퍼포먼스와 해프닝 안에서 함께 소통하기를 주저하였다. 하지만, 상호작용 예술은 하나의 시스템 안에 서로 관련되어 있는 요소들을 구성하는 작품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참여하는 놀이와 같은 요소로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에, 참여자들은 주저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사람이 아닌 기계를 상대로 한 상호작용은 상식에서 벗어난 상황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인공 환경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은 일상이 아니라는 확신에서 오는 안도감은 관람객들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상호작용성을 즐기고 더욱 능동적으로 개입하게 한다.
상호작용 예술은 넓게는 퍼포먼스의 맥락 안에서,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일종의 해프닝의 연장에서, 예술과 기술의 접목을 통해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모색한다. 이 예술적 상황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도,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지각방식을 제공해줌으로서 예술과 기술, 작품과 관객, 예술가와 관람자 사이의 역동적인 관련성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4. 또 다른 가능성을 향해서.

예술은 이제 더 이상 대상의 재현에 머무르지 않는다. 예술은 적극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고, 세상을 구성해가는 작업이다. 상호작용 예술 작품들은 전통적인 예술계의 틀에서 벗어나 많은 것들을 실험해간다. 예술과 기술을 접목시키고, 관람자를 적극적으로 개입시키며, 공간적 한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창출해 내기도 한다. 일상적으로 지나치는 신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예술개념과 많은 부분 상충하는 컴퓨터 예술, 특히 상호작용 예술은 아직 확고한 예술장르로 자리잡지 못했다. 예술이 아니라는 목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영화가 예술로 자리잡는데 100여년의 시간이 걸렸다. 컴퓨터의 역사는 겨우 50년 정도이고, 컴퓨터 예술이라는 말이 등장한지는 불과 몇 십 년 밖에 되지 않았다. 컴퓨터를 통한 예술이 가능하냐 아니냐 하는 공허한 논쟁보다는 컴퓨터의 예술적 응용가능성들을 실험하고,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한 준거틀을 마련해 감으로써 예술이 보다 풍부한 의미를 갖도록 하는 일이 더욱 시급한 시점이다.
* 박승호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6-26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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