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해외 현대미술 동향

90년대 해외 현대미술 동향

김성원

  예술은 절대불변의 에센스가 아니다. 시대와 사회적 컨텍스트에 따라 그 기능과 형태와 방법은 변한다. “모더니티가 죽은 것이 아니라 그 모더니티의 이상주의적이며 목적론적 버전이 죽은 것이다.” 즉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미학적 판단기준도 그와 함께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비평의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미학적 기준에 근거해서 현재를 평가하려 하고 있다.

   전통적 기준에 익숙한 관객이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의 축제에 간다든지(노동절인 5월 1일에 자동차 공장을 빌려 축제를 연다. 관객들은 축제에서 평소 즐겨하는 취미활동을 할 수 있다.), 바네사 비크로프트(Vanessa Beecroft)의 개인전을 보러 간다면(갤러리에는 20여명의 소녀들이 동일한 분장을 하고 한 폭의 그림처럼 서 있다. 이따금 이들은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만 할뿐이다. 관객은 이들에게 가까이 갈 수 없으며 갤러리 입구에서 바라만 볼 수 있다.) 과연 거기서 관객은 무엇을 볼 것이며,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작품이 아니라 이벤트에 가까운 이러한 유형의 작업들이 최근 10여년 동안 미술관 전시, 국제 비엔날레, 카셀 도큐멘타, 뮨스터 조각전, 마니페스타등 국제무대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90년대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는 이 작품들은 컨셉과 방법에 있어서 극도로 다양한 양상을 띄고 있으며, 처음 보면 뚜렷한 방향을 잡기가 힘들다. 물론 90년대 미술의 흐름을 객관적이고 총체적 시각에서 조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현재 진행 중이며, 변할 수 있는 형태에 대한 완벽한 이론을 제시할 수도 없다. 그러나 비물질적이며 일시적이고 산만하게 느껴지는 오늘날 현대미술의 특성과 그 특수한 상황을 분석하면서 그에 적합한 미학적 기준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90년대 현대미술을 좀 더 열린 시각으로 대할 수 있을 것이다.

   1. 90년대 현대미술의 상황

   우리가 아방가르드라고 부르는 것은 근대적 합리주의가 제공했던 이데올로기의 환경에서 전개되었다. 다다이스트들에서 국제상황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20세기의 아방가르드는 근대적 프로젝트(문화, 맨털리티, 개인적 사회적 생활조건들을 전복시키려는 프로젝트)의 실현을 목표로 했다. 우리는 예술의 이러한 진보적 아방가르드적 선구자의 이미지에 익숙해져 있다. “오늘날 현대미술은 이 모더니티의 테두리에서 투쟁을 계속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철학적, 사회문화적 가정을 전제로 재구성되고 있기 때문에 과거 이데올로기의 무게로 가득 채워진 시각에서 본다면 오늘날 예술은 부모 없는 아이처럼 보일 것이다.” 쟝 프랑소와 리요타르가 “포스트모던 건축은 모더니티에서 상속받은 공간에서 일련의 작은 변형들만을 탄생시키면서, 인간이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한 글로벌한 재구성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형벌을 받았다.”라는 평에서, 그가 “형벌”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현 상황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피력했다면, “현대작가들은 이 형벌을 받은 상황에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행운을 잡았다”는 니콜라 브리요의 입장은 오늘날 현대미술에는 대단히 희망적 진단이다. 진보적 역사의 고정관념 안에서 새로운 것 찾기를 포기하고, 기존체계에서 좀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작가들에게 수 없이 많은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신세대들은 달리고 있는 세계에 편승해서 “문화의 전세인”이 되며, 그 안에서 있는 것을 “고치거나 재활용하며, 잘 살 수 있도록 변형”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예술의 종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베르 다미슈는 “예술의 종말”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게임의 종말”과 “플레이의 종말”을 혼동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게임 자체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으며 사회적 컨텍스트가 근본적으로 변함에 따라 새로운 게임을 위한 플레이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다이스트들이나 국제상황주의자들이 만들었던 “만들어진 상황”도 이 “게임”의 일부이자 연속이며, 이는 일상생활의 혁명을 통해 “예술을 초월”한 것이다.

   2. 90년대 현대미술의 실천

   그렇다면 90년대의 예술이 시도하는 게임의 형태는 무엇일가? 안젤라 불록(Angela Bulloch)은 1993년에 열린 그룹전에서 카페를 설치했다. 관객들이 그곳에 설치된 의자에 쉬기 위해 앉으면 Kraftwerk그룹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죠지나 스타(Georgina Starr)는 파리에서 가졌던 “레스토랑”이란 제목의 개인전에서 “혼자 저녁식사를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을 텍스트로 적어 화랑 주변의 식당에서 혼자 식사하는 사람들에게 그 텍스트를 나눠준다. 이들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관객과의 만남이다. 전시를 보다가 잠깐 쉬기위해 안젤라 블록의 의자에 앉았을 때 흘러나오는 예기치 않았던 음악과의 만남, 식당에서 혼자 저녁을 먹고있던 사람이 죠지나 스타가 전해주는 텍스트와의 우연한 만남, 이러한 “인간교류에서 발생하는 상호적 관계를 근거로 하는 만남이 결국 90년대 미술의 형태”라고 니콜라 브리요는 정의한다.

   예술에 있어서 만남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작품 자체가 그 내재적인 만남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그러한 작품을 우리는 전시를 통해 만나왔다는 것도 새로운 일이 아니다. 또 미술사적 맥락에서 예술의 한계를 실험하고 그 영역의 확장을 목적으로 했던 선구자들 방식(뒤샹의 “예술과의 랑데부”, 로버트 바리의 “헬륨전파”, 온카와라의 전보, 메일 아트…)의 만남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작업이 이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90년대 작가들이 추구하는 만남은 바로 이 만남을 통해 인간이 교류할 수 있는 공존의 영역을 제공하려는 것이다. 아방가르드 작가들이 만남을 통해 예술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투쟁했던 것과는 그 목적을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3. “관계성의 미학”

   90년대에 전개되고 있는 현대미술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편의상 지칭했던 “예술”이라는 테두리를 넘어섰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진행되는 예술은과거의 “사적이고 독자적이며 상징적 공간이 아니라, 사회적 컨텍스트와 인간의 상호주체적 교류영역”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오늘날 예술의 범주를 떠난 예술은 어떠한 사회적 컨텍스트에서 전개되고 있으며, 위에서도 언급한 만남이라는 형태가 현 시점에서 중요한 이슈로 등장해야 하는 점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 니콜라 브리요는 90년대 예술과 사회와의 미묘하면서도 역동적인 상황을 “관계성의 미학”이라는 이론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그의 이론은 근대의 도시문화에서 유래한다. 이론적 배경은 대화나 소통이 존재하지 않는 쟝 쟈크 루소(J.J. Rousseau)의 “원시적 자연상태”를 정글에 비유하고 근대의 상징인 도시, 즉 근접성을 중심으로 한 알튀세르(L. Althusser)의 “만남이 필연적인 도시사회”를 대립시키며 전개된다. 도시문화를 통해 발전되었어야할 인간간의 상호교류는 모더니티의 이상주의적이고 목적론적 프로그램으로 인하여 도시 안에서 소통을 단절시키는 또 다른 정글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도시에서 인간과 인간의 질적인 만남은 소외되었고 극도의 개인주의와 첨단과학의 발달 그리고 물질적 풍요만이 남게되었다. 이러한 유산을 상속받은 신세대 작가들은 과거 아방가르디스트들과 비교해 볼 때 어떠한 문화적 프로젝트를 갖고 90년대를 맞이했는가에 대해 살펴보자.

   여기서 니콜라 브리요가 현대미술에 적용한 칼 막스(K. Marx)의 “간극 interstice”의 논리는 아주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칼 막스의 “간극”개념은 자본주의의 시장경제 체제를 벗어나서 자체적으로 교류(물물교환, 자급자족…)하는 사회적 집단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던 용어다. 이 “간극” 개념은 기존 체계를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체제 안에서 공존하며 그것이 요구하는 리듬에 조용히 역행하는 것이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체계 안에서 아방가르드적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이 역행은 아주 미미하고 무의미한 활동처럼 보인다. 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교류라는 존재방식을 모색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고, 이 교류는 곧 인간 상호관계를 통해 자유로운 공간을 확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90년대 현대미술은 바로 사회의 “간극” 형태로 현실 안에 스며들었다. 오늘날 “간극”의 개념으로 존재하는 현대미술은 기존의 예술이 존재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즉 “만남이라는 예술형태를 통해 인간 상호교류 영역을 발전시키고, 우리에게 사회성을 내재한 다양한 모델을 제시하며, 현실에 좀 더 잘 적응하기 위한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90년대 현대미술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가브리엘 오로즈코(Gabriel Orozco)의 시장이 끝난 후 아무 것도 없는 빈 진열대에 오렌지들을 하나씩 놓는 행위, MOMA의 정원에 해먹(hammac)을 달아놓는 행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는 현실의 거대구조에 의해 규정된 상황에서 미세하고 일상적인 제스쳐를 통해 “간극”로서의 예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오로즈코의 사진들은 평범한 도시생활(풀밭 위의 야외침구, 빈 신발상자 등)에서 발견된 일상으로 이루어지며, 그는 이 일상과의 관계를 전개시킨다. 이들은 타자와의 관계를 형성하며 우리 삶의 정물화로 다가오는 것이다.

   4. 90년대 현대미술의 유형

   사회적 공존의 공간

   1993년 베니스비에날레의 아페르토전에서 전시했던 리르크리트 티라바니쟈(Rirkrit Tiravanija)의 작업은 철로 만든 곤도라 속에 가스레인지, 그 주변에 널려진 캠핑시설, 한 쪽 구석에 쌓아 놓은 라면상자들로 구성되었다. 관객들은 그 옆에 준비된 물로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다. 1996년에 시카고에서 열린 개인전에서는, 그가 자주 다니는 뉴욕의 한 “리허설 스튜디오”를 실제 크기 그대로 재현했으며, 그 안에는 관객들이 녹음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기타들과 엠프 시스템 등이 설치되어 있다. 현실 그 자체가 상황이 되는 것이다. 작가가 제시한 상황은 관객의 참여와 함께 작품으로 완성된다. 관객이 직접 연주하고 녹음하는 과정과 라면을 끓여먹는 이 순간들은 사회성을 내재한 공존의 공간이다. 작가는 작품이라는 완성된 오브제를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제시하며 그 상황이 작품으로 완성되기 위해 필요한 장치들을 전시하는 것이다. 1997년 뮨스터 조각전에서 윈터(W. Winter)와 훼벨트(B. Horbelt)는 플라스틱 박스들을 쌓아 올려 놀이공간을 만들었고, 이 번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도 관객의 휴식을 위한 구조물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들이 제시하는 플라스틱 박스의 진열은 관객이 그것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플라스틱 박스로 만들어진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며 옆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사회적 공존의 공간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계약관계와 공동작업

   도미니크 곤잘레스 포스터(Dominique Gonzalez-Foerster)는 개인전 전시로 가브리엘 모브리(갤러리스트)에게 그의 전기를 만들겠다는 제의를 했다. 가브리엘 모브리는 그 제의를 받아들이고 곤잘레스-포스터에게 자신의 삶의 일 부분들을 보여주며 작가는 그의 사생활을 단편적으로 수집한다. 전기를 주문한 사람과 실행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밀하고 사적인 관계를 탐구하며 서로 공동작업을 시도하는 것이다. 곤잘레스 포스터의 작업에서 이러한 전기작업은 사진, 텍스트, 오브제, 비디오 이미지등이 동원되며 초상화의 형식을 취한다. 마오리치오 카틀란(Maurizio Cattelan)은 자신의 갤러리스트인 엠마뉴엘 페로댕을 위해 남성 성기에서 유래한 토끼형상의 우스꽝스러운 옷을 디자인한다. 갤러리스트는 작가와 전시기간 동안 그 옷을 계속 입고 있겠다는 일종의 계약을 한다. 샘 사모어(Sam Samore)는 개인전에 화랑주인이 찍은 사진을 전시한다. 작가의 역할은 갤러리스트가 찍은 사진을 선택하고 전시를 기획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작가는 화랑주인과 공동작업을 하며 보이지 않는 계약관계를 가시화 한다. 이들은 사회체제에 존재하는 작가와 화랑 사이의 계약관계를 거부하거나 파기하지 않는다. 작가는 계약관계를 작품으로 끌어들이고 그들과 상호적 교류를 유도하며 사회의 “간극”으로 존재하려 한다.

   노리토시 히라카와는 피에르 휴버 화랑의 개인전에서 작가와 함께 그리스로 여행할 동반자를 구한다는 광고를 낸다. 동반자와 여행중 얻은 경험과 자료를 토대로 전시가 꾸며진다. 또 그는 점장이에게 자신의 미래를 물어보고 그것을 녹음한다. 전시는 녹음을 들을 수 있는 워크맨과 점장이의 세계를 담은 사진, 슬라이드 등으로 구성된다. 작가는 직접 점장이를 찾아가거나 여행 동반자를 구해서 여행하는 현실상황에서 얻어진 예기치 않았던 만남을 작품으로 만들어 낸다. 관객은 녹음된 작가의 미래를 들으며 동반자와 여행한 흔적들을 보며 작가의 사생활 속으로 들어간다.

   전문적 관계

   도미니크 곤잘레스 포스터는 파리 시립미술관 전시에서 “전기작가”로 변신한다. 미술관 내에 사무실을 열고 관객들의 예약을 받는다. 관객은 작가에게 자신의 인생담 중 가장 흥미 있는 부분을 이야기하고 작가는 그것을 토대로 그들의 전기를 만든다. 과학을 전공했던 카스턴 홀러(Carsten Holler)는 과학자로 변신하여 사랑에 빠지는 묘약을 만들기도 하며, 각종 실험을 통해 기괴한 기계와 제약기술을 발명한다. 리암 길릭(Liam Gillick)과 헨리 본드(Henry Bond)는 신문사에서 속보가 들어오는 순간을 포착해서 신문기자들과 거의 동시에 사건현장에 출두하고 신문사에서 쓰는 모든 방법을 철저하게 적용하고 준수하지만 그들은 의도적으로 사건과 아무런 관련 없는 자료들을 취재한다. 그들은 픽션(취재)과 넌픽션(사건과 무관한 자료)을 나란히 제시하며 관객들이 그것을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게 한다. 전문인으로 변신한 작가들은 현실로 쉽게 스며들 수 있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관계를 직접 체험하고 그것을 토대로 작가마다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 나간다. 그들은 예술과 현실의 경계를 없애는 것이 목적이 아니며, 현실 속의 다양한 관계를 통해 작가와 타자와의 직접적인 교류를 유도한다. 여기서 생산되는 형태가 즉 작품이 되는 것이다.

   파브리스 이베르(Fabrice Hybert)는 파리 시립미술관 개인전에서 제품업체로부터 직접 구입한 상품으로 이루어진 수퍼마켓을 만들었다. 작가는 자신이 만든 “UR(Unlimited responsability)”이라는 회사를 통해 이 수퍼마켓(자신의 작품)의 상품을 관객에게 판매할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상업행위를 통해 현실과 예술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관객은 이러한 상황에 당황하게 된다. 헤거(Heger)와 데자노프(Dejanov)는 미술관 전시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공간을 회사나 일반인에게 대여하고 거기서 얻은 이익은 자신들의 작품을 컬렉션 하는 데 사용한다. 마티외 로레트(Mathieu Laurette)는 신문이나 잡지에 “마음에 안 들면 환불해 드립니다”라는 광고를 내고 우편판매를 통해 자신의 작업을 판매하며 그 수입으로 생활을 한다. 얼마나 오래 전 부터 예술은 시장경제 시스템을 거부하기 위해 투쟁하였는가! 일종의 선동적 행동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행동은 선동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피할 수 없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역으로 이용하며 그 안에서 작가로 존재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반대로 보나치니(L. Bonaccini), 안드레아스 포르(A. Fohr), 자비에 프르(X. Four)는 자본주의사회의 가치에서 벗어나는 무료라는 개념을 발전시킨다. 그들은 파리 시내에 빈 공간을 빌려서 “프리랜드 구역”을 만든다. 매주 목요일마다 간단한 다과가 준비되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들어와 차를 마시며 서로 대화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무료로 제공한다. 오늘날 작가는 우리에게 예술의 이상적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기존 체제에 좀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존재방식으로서 다양한 사회적 모델을 시험하고 제시하는 것이다.

   전시와 작품과의 관계

   피에르 죠셉(Pierre Joseph),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 피에르 페랭(Pierre Perrin)은 니스의 한 화랑에서 “천국의 제작실”라는 전시를 기획했는데 이 전시는 문자 그대로 전시기간 동안 갤러리를 물리적으로 점령하고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그들의 전시는 프러덕션 스튜디오를 연상케 한다. 화랑에 전시를 보러온 관객들은 “공포”, “고딕”등의 문자가 새겨진 옷을 입고 변장한다. 변장한 관객은 서로 즉흥적인 반응을 보이며 일종의 연기를 하고 갤러리 한 쪽에서는 시나리오 작가가 관객들이 전개시키는 게임을 컴퓨터에 즉시 입력한다. 비디오게임의 인터악티비티의 개념을 전시에 참여한 관객들에게 전이시킨 것이다. 관객의 상호교류에 의한 즉흥적 연기는 일종의 “리얼타임 영화”로 생산된다. 이러한 유형의 전시는work in progress의 개념을 발전시킨 작업으로 전시기간 동안 관객들은 언제든지 작업에 참여하여 진행중인 작업의 방향을 변형시킬 수 있다. 작가는 전시공간을 변형이 가능한 유연한 상황으로 만들며 여기에 관객의 참여는 필수적이고 그 참여가 작품을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Felix Gonzalez-Torres)는 전시장에 강렬한 색으로 포장된 사탕들을 수북히 쌓아 놓는다. 작가는 전시를 보러오는 관객이 이 사탕을 가져갈 것을 요구한다. 관객은 사탕을 가져가면서 작품의 소멸에 일조하며 사탕이 다 없어지면 비로소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다. 사탕 쌓기-관객의 참여-작품소멸-작품완성의 형태가 끊임없이 반복된다. 곤잘레스-토레스의 작품은 소멸되는 순간에 탄생한다. 결국 그는 어떠한 오브제보다도 영원히 존재하는 무형의 형태를 창조한 것이다.

   오늘 날 전시공간의 역할은 과거의 전시처럼 각 각의 오브제를 진열하거나 설치하여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장치로서의 오브제들의 집합과 관객의 참여가 작품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 존재하는 경우가 점 점 증가하고 있다. 90년대 예술은 전시장에서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작품을 보여주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전시의 방법에 달려있다. 70년대 “인 시튀(in situ)”작업과 그 연장인 인스톨레이션은 새로운 유형의 공간과 작품과의 상호관계를 탄생시켰다. 90년대 현대미술도 마찬가지로 작업과 전시방법과 공간의 새로운 형태의 관계를 필요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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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서 다루었던 90년대 현대미술은 과거와는 다른 사회 문화적 컨텍스트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작가들과 같은 상황에서 함께 호흡하지 않으면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니콜라 브리요의 이론은 각기 다른 작업방식으로 예술형태를 만드는 90년대 작가들의 공통분모가 무엇인지를 찾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유형의 작업들만이 90년대를 주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80년대와 90년대를 비교했을 때 이러한 형태의 예술이 90년대의 특징적 경향으로 다가왔으며, 한국에도 이러한 작업을 하는 젊은 작가들이 점 점 증가하고 있기에 이 번 기회를 통해 자유로운 토론의 장을 열어보고자 한다.
* 박승호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6-26 00:33) It is sad to say, however, that not utile site all of them offer quality and reliable mobile phone monitoring services

삶 속의 惡, 예술 속의 善

삶 속의 惡, 예술 속의 善

윤지선(시인)

< 1 부 >

우선 몇 개의 이정표…

   그것은 자그마한 상처였을 뿐이다. 소향은 며칠 전부터 그녀의 팔뚝 위에 그어진 상처가 아주 미세했기에 보지 못했다. 충무로 이층의 해가 잘 드는 커피숍 창가에 남자친구와 앉아 있을 무렵, 상처 난 팔뚝 위에 앉은 파리를 쫓으려 무의식적으로 한 팔을 휘둘렀고, 이 더러운 생물체가 다시 윙윙거리며 똑같은 장소에 앉으려는 순간, 비로소 그녀는 발그스름한 상처를 보았다. 끝 부분에는 더 작은 암갈색 고름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커피 잔 밑에 깔린 휴지로 부드럽게 닦아 냈다. 파리는 되돌아 왔고 그녀는 다시 쫓아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그 상처 안에 파리가 알을 깐 후였다. (- 어떻게 모든 것이 취소되었는가, 김현아)

   오후 2시 27분, 대형백화점이 무너지며 수백 명의 손님들이 상상할 수 없는 무게의 철근콘크리트 벽과 바닥에 깔려 사망했다. 이후 몇몇 사망자들을 파헤쳐 냈지만, 8층 건물의 무게에 깔려 납작해져버린 그들의 신분을 밝힌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잔해 속에서는 그 유명 백화점의 핑크 빛 외벽들이 눈에 띄었지만, 이제는 공동묘지 묘비 위에 떨어진 꽃잎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시멘트 덩어리에 불과했다. (- 동아일보, 95년 6월 27일자)

   나는 그에게 오직 그와의 성 관계만이 흥미 꺼리라고 했다. 그는 소년이었다. 난 그를 집으로 초대했고, 일단 문을 걸어 잠근 후 여기저기 썩은 시체토막들에서 풍기는 악취를 맡았을 때, 내가 절단하고 물감으로 치장하고 부엌 선반 위에 가지런히 나열해 놓은 머리통들을 보았을 때, 그리하여 그를 향한 나의 진정한 저의를 깨달았을 때, 그는 고함을 지르며 뒤돌아 도망치려 했다. 나는 현관 입구에 놓아둔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로 그의 뒤통수를 내리쳐 혼절시켰다.

    이웃들은 우리 집 아무 곳에서나 흘러나오는 고함소리에 익숙해 있다. 그럼 냄새는? 사실 이 건물에는 부엌이 너무나 많이 있고, 여름에는 돼지고기와 그리고 찢겨진 쓰레기 봉투에 담겨 복도에 내버려진 쓰레기 냄새를 구별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소년은 쓰러졌고 나는 그를 소파로 질질 끌고 가 옷을 찢어버리고, 섹스를 하고, 제 정신이 들어 눈을 뜰 때마다 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그가 거의 죽어갈 무렵, 축 쳐진 그의 몸뚱이를 목욕탕으로 끌고 들어가 토막내고 톱으로 썰었다. 목욕탕이란 곳은 이런 일에 매우 실용적이다. 왜냐하면 목욕탕 내부의 집기들과 벽을 그냥 씻어내면 되기 때문이다. 그의 내장은 펄펄 끓는 물에 오랫동안 삶았고, 몇
조각은 튀김을 했고 다른 것들은 냉동시켰다. 닭 날개 같으면서도 그보다 약간 더 도톰하고 쫄깃쫄깃한 그의 손들은 점심으로 삼았다. 선반 모서리에 그의 머리를 잘 올려놓은 후 이제 진짜 일을 시작했다.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 망치, 윤석우)

   섹스, 순수, 무의식, 살, 나의 입 속에, 그의 손은 나의 머리를 꽉 움켜잡고, 그의 성기에 나는 밀착되어 나의 혀위로 꽂아 넣고, 숨이 막혀 코로 숨을 쉬고, 맥박의 고동을 들으며, 딱딱해진 풀 뚜껑을 열 때 터지는 폭발 같은 액체, 액체. 이제 그만 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갑자기 한 시간 전쯤 말끔히 다림질 해놓은 나의 면와이샤쓰를 등으로부터 찢어내기 시작했다. (- 집안에서의 정사, 박형진)

바지를 벗기 전까진
그녀를 안아야 할지
토드는 어찌할 줄 모르고 목졸린 그녀는 암퇘지마냥 고함을 지르고
토드는 바지가 발밑에 걸린 채
철석철석 그녀의 따귀를 때리고
이제 그녀는 무서워 도망갈 궁리만 하지만
창가에 앉아서 깔깔거리고 웃기만 하던 벤은
그녀를 낚아채 토드를 향해 바닥에 내팽개쳐 결국 그는 바지에 걸려 넘어지고 이 멍청이는 부츠끈을 풀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지
잠시 숨을 돌리고 나서야 이 멍청이는 끈을 풀지만 뒤로 나자빠지고 말아
그는 유리컵 위에 엉덩방아를 찧고 만약 내가 낄낄거리면 나를 죽이려 들테니
의자 밑에 총이 있다는 사실을 제발 그가 기억 못했으면 좋겠는데,[…]
(- 텍사스에서 보낸 휴가, 차윤숙 )

   상해보험을 타기 위해서는 꼭 해야 할 일이라고 확고히 결심한 김씨는 다음 한 달을 과연 용기를 낼 수 있을까 하고 고통스럽게 반문하며 보냈다. 문제는 단순했다: 어떻게 포기하지 않고 이 끔찍한 고통을 이겨내어 다리를(또 어느 다리를?) 자르고 성공리에 끝낼 수 있을까. 귀나 손가락은 일순간에 끝나니 다른 문제지만 자신의 살을 톱질하듯 잘라 뼈까지 썰어댄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 상해보험에서의 사기를 감지하는 방법, 송현식 주간)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 (- 속담)

   충격적인가? 네? 아니오? 많이? 조금? 전혀? 충격 받는다는 것이란? 그것은 충격적인 행위나 사건에 의해 도발된 감정적 상태를 의미한다. 충격적인 행위 혹은 사건이란? 그것은 어떤 행위 혹은 사건이 평온한 감정적 상태를 불쾌하게 뒤흔들어 놓을 경우를 말한다. 고요한 감정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불쾌한 혼란을 야기시킬 수 있을까? 고약하고, 불경스럽고, 잔인하고, 끔찍하고, 기괴하고, 환상적인 따위의 행위 혹은 사건을 바로 그에게 또는 다른 이에게 행함으로써. 그럼 어떤 행위 혹은 사건이 고약하고, 불경스럽고, 잔인하고, 끔찍하고, 기괴하고, 환상적일까? 그것은 삶 속의 선(善)을 뒤흔드는 어떤 행위 혹은 사건이다. 삶 속의 선은 무엇인가? 그것은 삶 속의 악(惡)에 반(反)하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들을 선택한 나의 목적은 하나의 작은 입증을 위해서였다: 삶의 고약함, 불경스러움, 잔인함, 끔찍함, 기괴함, 환상은 예술에서보다 글에 의해 더 잘 표현된다. 글은 원래 예술보다 더 충격적이다. 글은 전인류의 정신과 영혼을 표상하기 위해 그림문자기호 즉 예술의 최초의 발전 단계에서부터 장려되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훈적인 문체를 사용하자면)자신의 정신과 영혼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글이 최상의 상태로 드러나는 예는, 비범한 반성과 감정의 상태를 번뜩이는 문체로 표현하는 것이다. 비범함… 파스칼은 모든 악이 자기 집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아라공은 모험이 바로 길거리 한구석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두 사람은 비록 상반되는 욕망이지만 그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양자는 모든 것이 아침에 눈을 뜨면서 공동의 삶에 부딪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순간 시작된다는 생각을 표현했다. 정확히 무엇이 시작되는가? 선의 삶? 그 정반대이다. 여기서부터 삶의 요행일지, 불행일지 제발 행운이기를 바라는 그런 재난이 발생한다. 글은 인간의 최악의 상태를 묘사할 때 종종 최상의 형태로 나타난다.

    혹은 내가 잘못 알았을 수도 있다. 위의 인용된 예에 있어 특별한 점은, 무엇인가 불경스러운 것을 – 즉 도발적인것을 – 표현하려는 최상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은 그저 ‘글줄을 극적거림’에 머무를 뿐이다. 충격의 또 다른 단계(단지 상투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는, 상투성 그 자체일 뿐인 격언, 커피숍에 파리가 출현하는 장면과 대형백화점의 붕괴장면, 이어 펠라치오 장면을 거쳐 집단강간을 암시하는 싯귀절, 그리고 마지막에는 연쇄 살인자의 이야기로 끝맺듯이, 이 작가들의 글은 악의 이치를 논하면서 모순적으로 그와 반대되는 선으로 변모시킨다. 그들이 우리에게 악의 예를 소통하기 위한 지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충격을 가하지 못한다. 악은 그들을 피해 나간다. 물론 다른 작가들의 경우, 심지어 위의 바로 그 작가들 역시 다른 맥락 속에서라면 삶 속의 끔찍함에 관한 더 많은 세목들을 명료한 사실주의 방식으로 묘사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글의 힘은 항상 글로 변환된 현실보다 더 강렬할 것이다. 그 힘은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고통을 글을 통해 즐거움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그 힘은 작가들에 의해 노력없이 행해지는 것이다. 본래 그 힘은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 없이 글은 그처럼 기능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글이 삶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너무 고통스러워 읽을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며 따라서 마술에 합류할 것이다. 사드(Sade)는 우리보다 먼저 그 사실을 감지했다. 그는 비록 지극한 정성을 쏟아 묘사했고, 자신의 의사에 반해 사디즘(Sadism)의 창시자가 되기까지 했지만, 기껏 그가 이루어낸 바는 때로는 우리를 매혹시키고 때로는 지루하게 만든 것일 뿐이다. 현실은 수상하거나 아니면 비극적이며, 물론 이는 대부분 미디어를 통해 소통되어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삶 속의 모든 문제가 글 속에서는 용이하게 해결되어 묘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술에서도 동일할까?
   그것이 불경함이건, 끔찍함이건, 잔인함이건, 심지어 환상적인 것이건, 우리는 악에 대해 말한다. 한 인간이 타인에게 행하는 범죄들을 그 심각함에 따라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끔찍함이 잔인함을 현저히 앞서 있고, 그 다음에 불경스러움이 따라오게 되는데, 이는 불경성이란 것이 단순한 언어적 선언이며 그 표현의 무게가 신의 무게보다 가볍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환상적인 것은 일단 스필버그류 공상과학 영화의 방식으로 선(善)의 한 부분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상적인 것은 다른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악의 적당량이 제외된 모든 삶은, 그것이 환상적이건 아니건 간에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혹은 환상적인 삶은 우리의 그다지 환상적이지 못한 삶에 합류한다. 일단 단순히 표현하자면, 선의 나타남으로 규정할 수 있는 ‘정상적’ 삶의 현실로부터의 도피인 환상성을 포함하여, 위에 열거한 모든 어휘들은 크건 작건 악의 명백한 드러남이라고 하는 사실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와 같이 악을 논하며, 그것은 삶 속에서의 선의 진행을 방해한다. 다른 순간에 다른 문화 속에서 그리고 오늘 우리 문화 속의 어떤 이들에게 있어, 악이란 것은 기괴한 부류의 사람들을 통해 체현된다. 어떤 이는 이를 악이라 부른다. 가끔 그는 사탄으로 불리기도 한다. 삶 속에서 그의 유혹은 악을 향한 내디딤이고 그들을 악마들이라 한다. 모든 남 자와 여자에게는 악마가 그의, 그녀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모든 행동, 사고에는 선한 의도가 담겨져 있다해도 그 안에는 악의 싹이 돋아나고 있다. 인류의 역사는 그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도. 인류의 역사는 다분히 비인간성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침묵 속에서 진행된다.

   이제 다른 이정표를 경유해 보자: 삶에서 무엇이 가장 끔찍하고, 괴물스럽고, 잔인한 행위일까? 물론 그것은 홀로코스트(유태인 대량학살)이며, 이는 악에 대한 지고의 상징이 된다. 아니, 홀로코스트는 그 자체가 지고의 악이다. 두 번 째 것은 첫 번 째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홀로코스트의 절대적이고도 상상 불가능한 공포를 상기시킨다는 단지 그 점 때문에 주목되는데, 이것은 참혹함으로 점철되는 일상생활의 사례들이다: 죽거나 심한 불구가 되는 끔찍한 재난, 마지막 단계에 접어드는 불치병, 인질에게 행하는 고문, 전문가나 변태적 애호가의 손아귀에 사로잡힌 정치범과 아동 등등, 이 모두를 포함하여 단순히 인간의 그 어떤 역사가 아니라 역사 그 자체로서의 일상생활의 모든 총체성 말이다. 이러한 모든 일상생활은 인간이 끔찍함에서 끔찍함으로, 흉악함에서 흉악함으로, 잔인함에서 잔인함으로, 그 어떤 교훈도 배우지 못한 채 – 교훈이 있다면 어떤 교훈도 없다는 단지 그 점일 뿐 – 살아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지나간 또는 차후의 행위이며 사건으로서, 홀로코스트를 완성해 나간다는 것이다. 삶이란 그것의 강렬한 역사적 순간들만을 염두에 둔다면 삶을 향한 불경스러움일 뿐이다. 불경스러움의 관념적 정의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 이 글 뒷부분을 읽어 보라.

   일단은 이것이 악을 대표하는 두 수상자들이다. 세 번 째 수상자도 있는가? 몇몇 예술적 시위(示威)가 그것일까? 의심할 여지없이 어떤 전시의 몇몇 예술작품들은 기괴하다고 규정해 볼 수 있다 – 그러나 그것은 오직 그것을 창조한 창조자의 무능 혹은 부주의에 의해서이다. 끔찍, 기괴, 참혹한 예술을 창조하는 방식으로 우연보다 더 낳은 방식이 있을까? 예술 속의 악에 관해 논한다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일까? 우리에게 끔찍함을 환기시키고 흉악하게 다가오는 여느 문화적 사물들을 포함하여 삶과 예술이 반대되는 것이라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삶의 끔찍함이 예술에 반영될 수 있을까를 결정하는 일, 만약 이에 대한 명확한 한정이 힘들다면, 몇몇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에게 있어 끔찍한 예술 – 실례! – 예술 속의 끔찍함이 있다고 추정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봄은 항상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우선 인간의 역사에서 결코 피해나갈 수 없는 대표적 흉악함인 홀로코스트에 대해 우리는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술에 있어, 특히 전후 독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이고, 그에 대해 다시 심사숙고해 볼 의무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운 예술가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바, 특히 유럽의 몇몇 작가들은 ‘홀로코스트의 눈물’이 지루하다고까지 말한다. 그들이 투정하는 바는, 그러한 예술은 불쾌감을 주는 가식적 감동에 불과하며, 진지한 예술 나아가 예술 그 자체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잘 알려진 추상화가와 근래 저녁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볼탕스키의 작업을 매우 싫어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그의 작업이 가장 비극적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인간의 참상을 이용해 먹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매우 지적인 이 추상화가는 추상화란 것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이미 커다란 감흥을 야기시켰던 점을 당연히 기억할 것이다. 이 감흥의 근원은 어디에서 있을까? 색채, 선과 점의 감동적인 발견에? 아니면 색, 선, 점이 고집과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작가의 비극적 운명이라는 그러한 정신과 영혼을 제시하기 때문일까?

   모든 사람이 알거나 혹은 외면하듯이, 종종 예술은 도저히 고백할 수 없는 생각들로부터 창출된다 – 이는 단지 당신의 동료 예술가들에게 물어 보면 솔직히 시인할 것이다. 예술가들은 각각 그들 방식대로 끔찍해질 수 있다는 점을 모두 알고 있다.

   끔찍함, 흉악함, 잔인함의 후예에 관한 몇몇 이정표들을 다시 거론하겠다. 그것은 또 다시 홀로코스트이지만 나는 이 질문에 대답하고 싶다: 왜 예술가들은 가까스로, 나아가 끔찍함에 전혀 미치지도 못하는 그런 작품들을 만들어 낼까? 왜 삶 속의 악이 예술세계의 내부에 영입되지 못할까? 삶 속의 참혹함, 흉악함, 잔인함을 영상화하고 그 많은 설명적 자료들을 보유하면서, 왜 인간은 조잡한 복사물들을 감상하고 추구하는가?

   한 추상화가는 말하기를, 그의 작업은 편리함이나 멍청함에 의존하는 정서들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고, 이로써 우리로 하여금 지성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50년대 이후 생산된 수많은 추상화들의 경우, 오늘날 그리 더 나아진 것이 없거나 단지 지루함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지성’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상상력으로는 이르지 못할 만큼 끔찍하거나 기괴한 실제의 사건들 앞에서, 이것과 경쟁하려는 예술가들의 경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리고 그들의 실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 점을 예술가는 인식하고 있을까? 왜 그리고 어느 순간에 예술가는 가상적인 그만의 방식으로 ‘우리들을 끔찍함과 기괴함에 마주치게 하는 작업을 창출해야 한다’는 식의 절박함 – 진지한 작가에게는 항상 당연한 표현으로 다가오는 바이지만 – 을 가지게 될까?

   죽음이라는 마지막 끔찍함에 대면하여서는, 세계 전체가 악의 희생자가 된다.. 그 나머지 시간, 대부분의 세계는 끔찍함의 거대한 소비자이다. 심지어 우리는 저 멀리 있는 끔찍함을 향해 살고 있다고까지 할 수 있다.그러나 끔찍함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삶의 끔찍함에 동조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끔찍한 삶이란 것은 분명 존재하고, 우리 내부와 주변에 산재하지만 그것은 수시로 흡수되어 우리의 아주 미세한 일부분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것은 길거리에, 우리의 시각에서 멀리 혹은 가까이에 존재하지만, 우리의 방문을 닫으면 그 방문 밖에, 우리의 삶 밖에 멀리 있는 것이 된다. 우리는 그것을 느끼고, 겁을 먹고, 또 행운인지 불행인지 그것이 우리에게 직접 닥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방식대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가 창조한 방식대로 존재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끔찍함을 감지하는 순서이다. 제일 먼저 객관적, 과학적, 혹은 의학적 차원에서의 끔찍함의 피해자들을 나열해 볼 수 있다. 과학자와 의학자, 경찰과 군인, 응급환자 후송요원과 시체를 취급하는 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삶 속의 악에 대한 특권층이다. 그들은 끔찍한 사고나 행위를 직업적으로 자주 대면한다. 두 번째로, 가능한 한 그와 같은 참상이 결코 닥치지 않게 하는 정치적, 법적 행위를 들 수 있다. 세 번째는 학구파와 작가가 행하는 지적 분석과 반성이다. 네 번째로는 참상을 대중화, 범속화하는 미디어, 특히 TV가 있다. 우리가 삶의 가장 끔찍한 사건들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접하는 것은 대부분 바로 이 미디어를 통해서이다. 이제 다섯 번째로 예술가들이 있다. 이들은 세계로부터 분리된 채, 이미 익히 알려진 실제의 사실들을 취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순서의 제일 마지막 지점에 있는 이 예술가들은 대부분 TV, 영화 그리고 대중문학을 통해 끔찍한 일을 접하고 활용하기 시작한다 .

   참상은 시각적이다. 예술은 도발하는 것 – 불경함이라고 읽으시길 – 이고, 이러한 도발을 위해 신문의 잡다한 기사나 기타 끔찍한 현상을 사용하는 예술가는 어느 면에서, 삶의 매혹적 분석과 관찰을 뒤따르는 것밖에는 아무 일도 못한다. 그러나 과학자, 정치가, 지식인, 작가 그리고 미디어만이 불행과 악에 매료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인간의 근본적인 특징을 보건대, 인간은 악과 불행만을 감지할 줄 알고 그는 그것만이 사유와 행위로 구성된 이 삶에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다. 인간의 정신은 삶 속의 재난 속에서만 비로소 발동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인생이 그 어떤 충돌없이는 살아야할 가치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은 그렇게 살기만을 꿈꾸고 그들 상당수는 그런 삶을 영위하는데 성공할 것이다 – 아니, 그러한 충돌이 없다면 삶은 과학자, 정치가, 지식인, 작가, 미디어라는 영역을 점유할 가치가 없을 것이다. 불행이 존재하지 않는 삶은 그 누구에게도 흥미롭지 않다. 타인의 행복은, 심지어 우리의 행복조차도 가끔은 지루하다. 행복한 삶은 우리 눈앞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실제로 죽은 삶이다. 상대적으로 불행한 삶은 더욱 우리를 매료시킨다. 극단적으로 불행한 삶, 즉 끔찍하고 참혹하고 잔인한 삶은 우리를 극도로 매혹한다. 악은 매혹적이며 다행스럽게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생존한다는 것은 악과 대항하는 것이다. 모든 남자와 여자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자기 나름대로 삶의 매 순간 악에 대항해 나감을 스스로에게 사명으로 부여한다. 그리고 물론
모든 남녀는 그러한 사명이 결국은 죽음이라는 실패로 종결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도발적인 예술가들, 간단히 말해 예술가는 극단적인 것을 가지고 유희한다. 어떤 작가는 꽃을 소재로 한다. 어떤 작가는 인간의 육체를 퇴비로 하여 자라나는 꽃의 모습을 그린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상인 인간의 육체를 취하여 이를 다시 파괴하는 것이 곧 악의 정의라는 점은 결코 우연은 아니다. 죽음은 인간에 관한 가장 공포스러운 사실이고, 절대적 악이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이 아름다운 육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시각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문학, 어떤 영화, 나아가 어떤 예술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이미지는 없다. 고문당한 육신과 예술적으로 활용된 끔찍한 죽음, 죽음의 미학, 그리고 감동의 눈물까지 자아내는 그 어떤 역사적이고 일상적인 주제: 이것은 분명 하나의 모순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술에서의 끔찍함의 기능이다. 그리고 육신의 빠르거나 혹은 느린 파괴과정을 아름다움과 양립시키는 것은 바로 예술가들이 내건 도전이 된다. <불경전>의 경우, 문신을 한 신체파편, 칼자국이 난 얼굴, 날짐승으로 재구성된 절단된 신체, 램브란트식의 재합성된 고기, 절단된 머리의 쾌락, 기형화된 플라스틱 군인모델, 손톱에 할퀴고 이빨자국이 난 자신의 신체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는 추함과 아름다움, 고통과 즐거움, 죽음과 삶을 화해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 화해가 용이하게 이루어지는 이유는, 예술 속에서 모든 것이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에서의 아름다움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아마도 극히 소수의 작품만이 수세기를 거듭하며 미와 도발성을 동시에 보유한 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예술은 충돌없는 삶처럼 아름다움으로 규정지어질 것이다. 그들은 항상 아름답겠지만 우리를 결코 매료할 수 없는 미를 보유할 것이다. 모든 예술은 본래 아름다움이기 때문에, 적절한 예술의 방식이란 것은 피할 수 없는 실패를 인식하면서도 가능한 한 가장 추한 것을 창출하여 이 아름다움에 도전하는 과정이 된다. 끔찍하게 추한 것, 실제의 모습으로 구현된 악보다 더 추한 것은 없다. 이와 같은 식의 미를 창출하면서 예술가는 영원을 창출한다고 믿을 것이다. 르느와르의 살찐 여자들이나 키키 드 몽빠르나스(Kiki de Montparnasse)에 이르기까지 미의 기준은 항상 변화하며 당혹스럽기까지 하지만, 불구나, 난장이, 비천함 등은 한 세기 이전이나 현재나 즉시 식별해 낼 수 있다. 미술사는 예술가가 이상적인 아름다움에서보다 추의 도발을 위한 작품에 더 비중을 두는 이같은 시도로 가득 차 있다. 결국 극단적인 도발성을 사용하는 가장 극단적 방식이 있다면 그것은, 이상적 아름다움과 끔찍함을, 평온한 아름다움을 괴기스러움과 병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미녀와 야수”와 같은 주제일 것이다. 구체적인 예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혹은 그리스도가 자아내는 열정에 매료된 예술, 드라큘라, 킹콩, 아름다운 인간이 짐승으로 변한 신화적인 신들과 행하는 성교, 천사같은 소녀의 손에 이끌려 가는 작품 시리즈인 피카소의 “눈먼 미노타우로스”등이 있을 것이다. 이같은 병치는 결코 아이러닉하지 않다. 아마도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 자신을 미와 동일시하기보다는 짐승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러한 예들의 저변에는, 삶이란 공상적이고 이상적인 미와의 본능적 투쟁이라는 사실, 그리고 너무나 현실적인 추함 바로 그것이 인생이고 나아가 우리의 것이라고 하는 윤리적 규범이나 확증이 존재한다. 미로의 비너스는 팔이 없다. 그녀의 코는 영원한 불치병인 시간이 갉아먹어 가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위치한 루브르 박물관의 관중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예술작품 속에는 항상 미를 옹호해내는 심오한 불균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미의 단순한 메카니즘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단지 이 기괴하게 절단된 여자의 신체와 그리고 현실적 삶에 존재하는 다리가 절단된 앵벌이 걸인들의 신체를 비교해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기서 우리는 갑자기 끔찍한 혐오를 목도하게 된다. 예술은 원래부터 아름다움이지만, 실제의 삶의 경우 아침에 일어나 머리를 빗고 그리고 저녁에 이를 닦고 자리에 눕기까지, 그리고 여러 예쁜 물건들이나, TV, 냉장고, 장식품을 사기 위해 돈벌이를 하는 모든 대부분의 시간을 인간은 절망적으로 미를 추구하며 보낸다. 미의 탐구는 인간의 본성에 있어 그 일상적 삶 속에 너무나 깊이 편재하여 있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라도 불쑥 솟아나 아름다운 하루를 파괴할 수 있는 또 다른 변증법적 상대자를 잊게 한다. 그러므로 사유는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한다. 미의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추구는 지루할 정도로 병적인 것이고, 결국 죽음같은 침묵만을 불러올 것 같은 무미건조한 음악처럼 그의 어두운 반대편을 은폐한다. 이러한 일상적 반복 속에서 공공성을 띤 상업적 공간을 통해 나타나는 예술세계는 마치 악의 지평선 위에 나타나는 이 추한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순수하게 장식적인 미와 가상적인 추 사이에 중간이 존재한다 – 추함은 예술 속에서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낯설은(strange) 미(美) 혹은 낯설음 그 자체이다. 예술에서의 낯설음, 톨스토이의 사상을 따를 경우 “오스트라네니”(Ostranenie)라고 표현되는 이러한 낯설은 미는 하나의 강력한 악의 양상이 되는데, 그 이유는 낯설음은 공포를, 공포는 위험을, 위험은 재난과 병적 행동을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상한 점은, 예술작품이란 것이 오직 선만을 행한다고 사람들은 믿지만, 실은 바로 자신의 낯설음을 통해 악을 이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스트라네니 이론은 특히 문학에 적용될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은, 존재하지 않는 주인공의 행위들을 체험한다고 하는 우리의 회의심을 유보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문학의 기적이다. 그렇다면 관객은 미술작품 앞에서 그의 회의심을 유보하도록 스스로를 방치할까? 문학적 사유란 것이 조금씩 읽어나감에 따라 미적 감동을 얻는 것임에 반해서, 예술적 시각이란 것은 전적으로 그 자체가 감성인 것이며, 그 시각은 종종 비예술적인 시각과 혼동되기도 한다. 독서의 눈은 응시하는 눈과는 다르다. 독서의 눈은 따르고 복종하는 눈이지만, 예술작품을 보는 눈은 방랑하고 반동하는 눈이며, 다른 세계로 몰입하기 위한 어떤 특정한 규칙이 없는 눈이다. 예술작품을 응시하는 눈은 정신분열증적이다. 그것은 작품에서 작품으로 왕래하고, 존재하지 않는 규칙을 작품 안에서 혹은 밖에서 찾아나간다. 예술이 낯설고 기이할 수록 그만큼 더 우리를 사로잡고, 또 삶의 기이함과 경쟁하게 된다. 예술에서 결과란 존재하지 않는다. 낯설음과 기이함으로써 강력한 악은 관객에게 어떤 위험부담도 주지 않는다.

   악은 일상적 삶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죽음을 운명적으로 수긍해야 하지만 그 순간이 우리에게 불현듯 닥치리라는 것을 외면한 채 살고 있다. 끔찍함이란, 시간에 의해 인간의 육체가 더 빨리, 더 느리게 파괴되어 나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파괴를 더욱 촉진시키는 행위들과 사고들이다. 이것은 마치 생존하기 위해서는 망각의 함정 속으로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같다.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고 공격하고, 그의 적이 되기도 하고 사랑에 빠지기도 하는 오상길의 <제 살 핥기>와 <제 살 뜯기>에서처럼 말이다. 비가 내린 후에는 화창한 햇살이 든다. 햇살이 지나가면 이제 비가, 또 비가 내린다.

   매 순간들, 일상적 삶의 모든 행위들은 신체적으로는 죽음을 향한 행진으로 느껴진다. 삶의 매 순간은 끔찍함으로 다가오며, 죽음과 삶 사이를 오간다. 몇몇 사람들에게 이러한 상태는 견뎌내기 힘들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종말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종말 그 자체보다 더 끔찍하다. 이제 신체적 끔찍함은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사유한다는 것은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지 않다면 삶에서 왜 그렇게 유치한 오락들이 필요할까? 왜 그렇게 많은 망각의 방법들이 필요할까? 왜 고독을 그리 두려워하는가? 왜 그리도 잠자려 드는가? 그리고 심지어 수면 속에서도 죽음이 존재한다. 죽어도 잊지 못하게 하는 악몽 말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이 하나의 존재이유가 된다. 모든 종교, 특히 기독교는 매주 그리스도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에 관한 의식을 전념한다. 모든 기독교적 가르침은 영원한 죽음과 영원한 삶 사이의 왕래에 관한 것이다. 일요일마다 행해야 하는 그 의식(儀式)은 ‘무(無)’보다도 더욱 끔찍한 것, 즉 죽음이란 악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그 가르침의 도구는 유럽의 가장 유명한 박물관들에 소장되어 있는 성서적 예술과 텍스트들이다.

   망각이란 것이 삶의 호흡이며 행위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인류의 역사에서 홀로코스트는 죽음의 망각을 가장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행위이다. 홀로코스트는 죽음에 대한 희롱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가장 궁극적 숭배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죽음을 희롱한다. 이같은 끔찍함과 참혹함의 서열에 있어 다시 예술은 가장 마지막에 서게 된다. 예술은 그것이 십자가이건, 조엘 피터 위트킨 (Joel-Peter Witkin)의 사진의 절단된 시체이건, 혹은 임영선의 절단된 머리이건 간에 오직 끔찍함과 희롱할 뿐이다. 예술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하지만 인간에게 한정된 규율에는 복종하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진정한 참혹, 진정한 끔찍함, 진정한 악을 허용하지 않는다. 몇몇 예술가들에 있어 작업이란, 조금씩 그리고 가능한 한 가까이 진정한 악을 향해 다가가는 것을 의미한다. 살이 찢겨진 채 피 흘리는 순교자를 그린 유화, 괴이한 합성수지 조각들, 징그러운 칼자국이 난 여자의 두 얼굴을 담은 이강우의 대형 사진작업 등은 바로 우리가 사실주의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주의는 작품이 결코 사실 그 자체일 수 는 없다는 점에서 헛된 노력으로 돌아간다. 몇몇 작가는 이러한 헛됨에 불안해 한 나머지, 라텍스로 가짜 살을 만드는 대신 김영헌의 <30일간의 매달림>에서처럼 수퍼마켓의 진짜 날고기로 대체한다. 관중은 그 메시지를 읽고, 입맛을 잃지만 그 고기의 외양은 살아남는다. 외양(appearance), 바로 그것이 예술이다. 예술가는 인간의 진짜 살에 대한 권리가 없으며, 그렇지 않으면 예술가가 아니라 정신병자가 되리라는 의미에서의, 그런 피상적이고 깊이 없는 외형, 바로 그것인 것이다. 더이상 예술가가 리얼리즘의 코메디를 연출하기를 포기하고, 캔버스가 더이상 비현실적 깊이를 가질 수 없다고 선언한 외양의 혁명 이후, 그리고 이러한 혁명이 금세기를 관통하고 그 혁명이 50년대 추상미술과 함께 사망한 이후, 이제 다시 외양이란 것이 강압적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감동은 추상에서는 점점 더 희귀한 보상물이고, 반대로 끔찍함에서는 점점 더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값싼 감동에 불과하며, 끔찍하고 비극적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우스꽝스럽게 해변가에 떼죽음을 한 고래 떼와 같다. 예술에서의 끔찍함은, 신기하고, 기념비적이고, 경외심을 자아내고, 인상적이면서도 하지만 절대로 정말로 끔찍하지는
못한 이 고래들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불에 익어 타버린 고기 덩어리를 더 많이 닮은 이탈의 <도살장의 성 요한나>는 어디에서나 편재하는 참혹한 사건을 닮고 있다. 예술에서의 끔찍함은 아름다움이라곤 전혀 없는 식인풍습의 경지에 다다를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술의 끔찍함은 정치, 지성 그리고 마지막엔 미디어 특히 모든 것을 미화시키는 영화를 통해 여과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오상길의 두 비디오 작품은 세련된 방식의 사디즘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것 때문에 잔인하기보다는 관능적이다. 실제 삶에서의 잔인한 현장은 스캔들이 되지만, 예술에서는 숭고함에 다다른다. 삶의 끔찍함은 결코 아름답지 못하지만 예술에서의 끔찍함은 원래부터 아름다운 것이다. 조금 더 보태자면, 예술에서의 끔찍함을 묘사하기 위해서 새로운 어휘를 찾아내야만 할 것이다.

< 2부 >

   예술은 헐리우드의 수단을 동원한 제 7예술에 직면하여, 악에 대한 헛된 탐구와 경쟁하든지 아니면 차라리 거리를 두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아름다운 끔찍함과 우스꽝스러움, 그것이 원래 영화이다. 이런 장르의 영화 심리학은 교훈적인 것과 관련되는데, 그 이유는 예술에서의 끔찍함에 관한 기준을 더 많이 제시해주는 것은 일상의 삶이 아니라, 바로 영화이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들겠다. 작년 뉴욕 크리스티의 “엔터테인먼트 메모라빌리아” 경매에서 5000-7000불의 가격으로 경매에 부쳐진 물건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설명문이 기입되어 있었다: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사이보그를 연기한 아놀드 슈왈제네거를 실물크기로 사실적으로 묘사한 좌상. 라텍스로 제작된 머리와 가슴 윗부분은 우레탄 수지로 채워져 있고, 얼굴 왼쪽 일부의 살은 찢어져 강철로 된 안드로이드의 해골을 드러내며, 왼쪽 눈구멍으로부터는 불빛이 반짝인다. 이 몸통은 부상당한 터미네이터의 정면 촬영을 위해 제작되었다.” 독자들이 기억한다면 그것은, 터미네이터가 사고로 소용없게 된 왼쪽 눈을 칼로 도려내기 위해 거울 앞에 서있는 그 장면의 정면에 해당한다. 찢어진 살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실제 상처는 없다. 바로 그것이 예술이 모방하고 초월할 수 없는 영화적 끔찍함의 본질이다: 외형은 기만적인 것이다. 위에서는 테크놀로지적 영혼의 발굴이 주제였지만, 절단된 머리 3개로 구성된 임영선의 <소년>의 경우, 그러한 영혼은 이미 작업을 할 때 발굴되었다는 전제 위에 놓인 작업이다. 절단된 3개의 머리는 전기선과 시간제약 타이머, 모터에 연결되어, 회전하고, 떨고, 경련을 일으킨다. 이 곳에서는 영화적 리얼리즘을 조롱한다. 의심없이 임영선은 헐리우드식 영화에 도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고유의 이집트 왕과 같은 권위에 따라 작업한다. 하지만 예술뿐만 아니라 영화에서는 모든 것이 눈속임이다. 기가 막힌 비현실적 사실을 그려내었던 18세기 유화에서처럼, 영화의 눈속임은 관객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속임수로부터 깨어나게 해준다. 터미네이터가 눈을 제거해내는 장면은 눈속임이 아니라, 영화의 가장 본질적 진실이다: 모든 것은 가짜인 것이다. 그리고 예술이 부각시키는 것은 바로 그 가짜이다. 임영선의 작업은 그것을 가식없이 확인해준다.

  가짜가 없다면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의 진실은 그의 가식에 의존한다. 예술의 아름다움은 어제는 유화물감의 붓질이었지만, 오늘은 라텍스 덩어리와 합성수지를 통해 창출된다. 바로 이 가식에서, 속임수에서, 예술의 근본적인 감동과 기쁨이 분출한다. 아니면 관객의 더욱 강도 높은 기쁨 속에서, 또는 오상길의 경우처럼 창조자의 기쁨 속에서 말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예술의 끔찍함은 오직 기쁨만을 자아낸다. 손과 발이 못 박히고 면류관이 살을 뚫고 있는 십자가의 예수는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었다는 사실, 그가 하늘로 승천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사했다는 사실이 기쁨을 주지만, 특히 천재적인 예술의 방식으로 묘사되었다는 사실이 기쁨을 주는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를 알현하기 위해 수많은 거대한 미술관에 몰려드는 사람들만 보아도 그 점은 여실히 드러난다. 악은 특히 미세한 부분에서 우리를 매혹한다. 악마는 그 미세한 부분들 속에 있다: 십자가에 매달린 손과 발, 그리고 <제 살 핥기>와 <제 살 뜯기>에서 물리고, 뭉개지고, 쓰다듬어지는 살. 오상길은, 진정한 – ‘가짜’로서의 – 잔인함은 예술이라는 사실, 그 사실에 대해 숙고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인식시킨다. 혀로 살을 핥고, 이빨로 살을 깨무는 매 순간들은, 아름다움과 살의 덧없음, 아름다움의 형태에 복원하지 못하는 살의 그 초라한 능력에 대한 사유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살이 찢겨나간 예수와 터미네이터의 찢어진 살의 비교는 결코 우스꽝스럽지 않다. 둘 다 모두 신체적이기보다는 미적인 아름다움으로부터 그 영감을 받고 있고, 둘 다 모두 그러한 미적 쾌감을 우리에게 전한다. 그 이유는 우리들 각자는 단지 예술을 통해서만 알려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실제의 상처나 부상을 어떤 미적 기쁨을 가지고 바라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예술 특히 사진과 다큐멘터리 영화의 힘은, 실제의 부상, 실제의 상처, 실제의 피로부터 아름다움에(을) 발견하게 해주는 능력에 있다. 삶 속의 끔찍함은 그저 추하다. 그 추함은 예술 속의 끔찍한 추함처럼 미적인 방식으로 복원되지 않는다. 예술 속에서의 끔찍함은 단지 미적인 추함과 동의어일 뿐이다: 예술에 추함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예술에서의 추함이 곧 실제의 아름다움이 되며 이에 따라 끔찍함이 곧 아름다운 것이 된다면, 우리는 끔찍함이 끔찍하다고 말할 권리가 있는가? 예술에서의 끔찍함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시각적으로 볼 때, 삶의 끔찍함은 죽음의 종말에 이르는 육신의 파괴로 요약된다. 지적인 면에서 삶의 끔찍함은 육신의 파괴를 의미하는 악으로 요약된다. 그것이 성경이건, 헐리우드이건, 예술이건, 삶이건 간에, 모든 행위와 해석들은 선과 악을 확인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선은 침묵 속에 진행되는데, 그 이유는 선이란 것이 단지 충돌없는 행복의 이미지로 점철되는 일상의 삶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일상적 삶을 전복시키는 충돌들, 운명이란 이름의 삶의 철학에 따라 사고처럼 닥치는 불행의 이미지, 삶의 악, 아주 간단히 말해 악, 이것이 없다면 성경도 할리우드도 아무 존재이유가 없을 것이다. 육신의 파괴는 자신의 것이건 타인의 것이건, 둘 다 악의 결실이기 때문에 흉칙한 행위이다. 하나의 질문을 던지자: 왜 악을 행할까? 그 답변: 기분을 선하게, 좋게 만드니까. 모순일까? 아주 조금은 그럴 것이다. 사탄(악)이 없다면 신(선)은 존재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리고 사탄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악을 이행할 아무런 사유가 없다. 그들은 성경과 헐리우드, 그리고 당연히 예술과 일상의 삶의 양극점이며 친구/적이다. 삶에서의 신은 선을 행하는 절대적 권위를 의미한다. 그러면 사탄은? 그는 물론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가엾은 악마이고 정부는 우리 자신과 항거하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그 곳에 있다. 그러한 정부는 나름대로의 존재이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 홀로라면 어떻게 선과 악을 구별해낼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좀더 복잡하게 혹은 좀더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이다. 계몽시대의 몇몇 철학자를 따르자면, 우리는 잔인하고, 타락한 인간들에 우리의 본래적 목적으로부터 벗어나 버린 불쌍한 악마들이다. 왜 삶 속의 악에 관해 이리도 시간을 소비하는가? 삶과는 달리 예술 속에는 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까? 악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당연히 끔찍함도 잔인함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원래 같으면 예술에서 정말로 악을 행하려는 예술가는 사실 예술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종속된 사회의 규칙에 의해 처벌되는 범죄적 행위, 한마디로 그는 불행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예술가가 그의 작품에서 진정 표상하려는 바가 괴물스러움, 잔인함, 끔찍함 그 어느 것도 아니라면, 그는 정확히 무엇을 창출하려는 것일까? 그가 창출하는 것은 아마도 나쁜, 아주 나쁜 꿈일 것이다. 악몽을 꿀 때 우리는 실제의 상황으로 착각을 하고 결코 꿈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와 같이 나쁜 꿈을 꾸는 동안은 정말로 그렇게 살거나 또는 겪는 것이 아니면서도 악에 가장 가까이 근접할 수 있다. 꿈은 영원히 그렇게 살리라는 믿음 때문에 가상적인 삶보다 더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 나쁜 꿈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실제 삶 속의 고통에 완벽하게 접근하고 동질화된다. 그처럼 악몽은, 나쁜 꿈은 삶 속으로 들어온다. 흔히 하는 말로 악몽은 꿈에서보다 현실에서 체험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예술 속의 끔찍함은 나쁜 꿈의 빈약한 복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불안과, 심장의 급격한 고동과, 식은 땀을 수반하지 않는 나쁜 꿈이다. 악마의 손과 갈퀴에 얽매인 수난자를 묘사한 그림에서부터 중세기에 발명된 흉칙한 지옥도를 거쳐, 오늘의 예술가들에 의해 사진에 담긴 시체와 기형의 인간에 이르기까지, 예술은 모든 공포의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실에 들어서서 그 어떤 것을 실제의 끔찍함이라고 생각하며 정말로 놀라는 적이 몇 번이나 되는가? 그리고 단지 공포를 느끼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라면 왜 끔찍한 영화를 보러 가는가?

  우리는 어떻게 삶과 예술을 착각하는가? 그것은 하나의 도큐멘터리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의 ‘사실주의적 연출’에 의해, 관중은(희한한 관중이지만)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단지 진실을 기록한 정도가 아니라, 감시카메라로 담은 비디오처럼 삶 그 자체라고 믿게 될 정도로 속아넘어가기를 기대한다. 여기에 약간의 뉴앙스를 더하자. 자신만의 작고 끔찍한 가게를 연출해 낸 함진의 설치작업처럼, 우리는 가끔 예술을 – 영화가 아닌 회화작품을 –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기를 원한다. 오상길의 비디오 작품을 제외한다면, <불경전>에 전시된 작가들 중 유독 함진의 작은 인물상들은 우리들의 정신을 그의 머리 속에 내포된 악마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도록 유도하고, 삶의 거대하고도 흉칙한 꿈과 예술의 그것을 착각하게 한다. 우리가 보는 것, 즉 폭발하고, 절단되고, 용해된 작은 용병들, 달콤한 약국선반, 우주비행사의 여행을 위한 듯 조심스럽게 저장된 음식찌꺼기나 액체같은 것들, 십자가에 매달린 작은 악마들처럼 심술궂은 모습으로 벽에 꽂혀 있는 작은 인물상들을 보면서, 우리는 바로 “리얼리티 쇼”와 대면하고 있으며, 또한 여기서 보는 것들이 예술적 창조물이 아니라 예술가의 방식대로 행하는 취미생활, 즉 삶 자체라 기대하게 된다. 우리는 그가 한쪽 귀를 자르지 않을까, 혹은 이 사물들이 가식이 아닌 진실성을 증명하듯 그가 정말로 끔찍한 어떤 범죄를 저지르기를 기대한다. 꿈은 이제 끝난다.

  원칙은 이렇다. 오직 삶 속에서만 끔찍함은 존재한다. 예술에서의 끔찍함이란 것은, 자신 앞에 펼쳐지는 끔찍함에 의해 순간적으로 공포를 느끼든지, 아니면 들어서기 전에 이미 그것은 게임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든 간에, 단지 관중을 안심시킬 뿐이다. 늘 그랬듯이 예술에서의 끔찍함은, 교회의 권위가 기독교 예술에 멍에를 지웠던 것처럼, 음울한 일상의 삶을 해독하고 악을 물리치기 위한 교훈적 도구로서 사용되는 법은 적다. 정면으로 클로즈업된 남자의 얼굴 하반부만을 보게되는 오상길의 비디오를 보며, 우리는 영상에 담긴 한 사람이 지루한 삶의 고독을 좌절시키려고 몸부림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불경전>에는 전시되지 않았지만 <침 뱉기>란 비디오 작품에서는 침을 연신 뱉는 남자의 입모습을 볼 수 있다. 이보다 더 정상적일 수는 없다. 그보다 더 평범하고 슬플 정도로 일상적일 수는 없다. 그보다 더 지저분하고 끔찍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길에 침 뱉는 것을 하루에 몇 번이나 보는가? 반복해서 침을 뱉는 사람의 행위 속에 삶의 어떤 철학이 있으리라고 우리는 몇 번이나 생각했는가? 그 어떤 사유? 그 어떤 권태? 그 어떤 역겨움? 그 어떤 병적 징후? 그 어떤 도전? 죽음에 이르는 그 어떤 방법? 작가는 이와 같이, 홀로 있는 사람 특히 그가 외부로부터 보여질 때, 그보다 더 아름답고 더 잔인한 존재는 없음을 보여준다. 인간은 끔찍하건 유쾌하건 예술을 사랑한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지옥의 흉악한 악마들에 의해 고문당하는 희생자들, 영화의 모든 고문장면들을 즐긴다. 관중은 오상길의 두 비디오 작품에서 두 남자가 자신을 고문하고 – 이 단어가 너무 강하다면 자신을 가학한다는 표현이 낳겠다 – 그 혼자만이 상상할 수 있는 잘못을 질책하기 위해 자학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술은 삶과 같지 않다. 삶은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마다 재난의 모든 가능성을 대면시킨다. 예술은 그것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아무 걱정없이 팽개치든지 하면 된다. 예술을 감상하는 자는 단지 그 자신의 기쁨을 위해 감상할 뿐이며, 이것이 전부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강요도 없다. 그처럼 끔찍한 영화를 감상한다는 것은, 끔찍할 정도로 평범한 삶에 대한 심리치료의 경우처럼 병적인 것과 관련을 맺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이러한 치료를 갈구하는 자는 바로, 다음 전철을 기다리거나 혹은 기다리지 않으면서 홀로 플랫폼에 앉아 다리 사이로 끊임없이 침을 뱉는 바로 그 남자(혹은 여자)이다.

  실제의 삶… 아니 삶 그 자체는, 기분이 좋거나 나쁜 꿈을 꾸면서 보낸 지난 밤의 숙면 이후 우리를 갑자기 덮치는 그런 것이다 – 이 삶은 두 가지 범주의 끔찍함을 보여준다. 하나는 길거리 한 구석의 끔찍함이고 또하나는 끔찍함이 없는 끔찍함이다. 길거리 한 구석의 끔직함은 인간의 어떤 역사를 잘 요약해 준다. 그것은 홀로코스트같은 사건을 필두로 하여, 악의 싹 같은 것을 소유한 모든 행위와 사건들이라 할 수 있다. 악은 질병처럼 인간 속에 존재하고 그 숙주 안에 거주한다. 악을 행하는 그 능력은 치명적 바이러스 못지 않게 흉칙한 것이다. 그러나 끔찍함이 없는 끔찍함, 비가시적이거나 눈에 잘 띄지 않는 악, 이것은 결코 신문의 화보를 장식하지 못하며, 과학자들과 정치가들에 의해 애써 외면된다. 그러나 문필가와 지식인은 그렇지 않다. 아마 예술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의 작업이 아니라면 악의 지적, 시각적 드러남은 실패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작품 속에서 악은 선으로 변화한다.

  악은 선의 적이 아니며, 대립을 통해 서로를 매혹시키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교환될 수 있다. 다시 한번 꽃을, ‘아름다운 정물’을 예로 들어본다. ‘정물’이란 뜻의 프랑스어인 ‘nature morte’란 표현 안에는 이미 ‘아름다움 속의 죽음’이라는 모순이 발견되고 있다(‘nature’는 물론 자연을, ‘morte’는 ‘죽은’이란 의미이다). 하나의 아름다운 정물, 혹은 ‘아름다운 죽음’, 이것이야말로 당신 앞의 탁자에 혹은 그림 속에 있는 꽃병이 던지는 의미이며, 또 모든 죽음의 의미인 것이다. 그것이 정물화이건, 풍경화이건 혹은 조각상이건 악은 거기에 존재하며 선 속에 편안히 안주하고 있다. 의기충천한 악은 동네의 사진관에서 포즈를 취하고 과장된 크기로 완성된 끔찍한 가족사진, 결혼사진, 아기 돌 사진 그리고 졸업과 입학사진에서처럼 가장 평범한 초상들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굳이 살아있는 얼굴에 칼자국을 내려 할 필요가 없다. 이들은 어느 집에 가보다도 멋지게 액자에 담겨 벽에 의젓하게 군림하지만, 범죄자 수배전단만큼이나 황당하다. 그 기념적인 이미지들은 무엇을 기념할까? 행복, 사실은 이미 지나가 버린. 덧없고 인공적인 행복, 의도적으로 연출되고 비사실적이고, 거짓으로 차있는 행복, 단지 불행으로부터 보호해 주기 위한 부적, 미래의 불확실성과 죽음의 확실성, 전체의 삶 속에서 영원히 살아남는 권태의 순간, 길거리 사진관의 사진사에게 복종함으로써만 겨우 지울 수 있는 이 불길한 현실들. 화가 로만 오팔카(Roman Opalka)는 작업으로서 자신의 정면과 측면 모습을 매일 사진에 담는다. 자신의 매일을 나열해나가는 그 자화상들은, 비극이나 혹은 성장하는 암세포처럼 죽음의 예찬을 상기시키며, 몸의 깊은 곳으로부터 해가 바뀔 때마다 아주 조금씩 진척되어 마지막으로 얼굴 위의 조금씩 그 흔적을 나타내는 파괴의 과정이다. 오랜 시간의 차이들을 표상하는 이 자화상들을 드문드문 관찰해 보면, 그것은 칼에 찢겨진 그 어느 얼굴보다도 더 잔인하게 인간을 갉아먹는 진행적 악의 존재를 냉혹하고 거의 준-과학적인 방법으로 시각화한다. 그러나 우리가 오랫동안 헤어졌던 사랑하는 이를 다시 해후하면서 얼굴 위의 황폐한 늙음을 발견하고, 시간의 덧없음을 괴로와하고, 게걸스럽고도 괴물같은 종말의 운명을 마음 깊은 곳에 다시 억압하려 할 때, 바로 이러한 순간에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러한 악이 이 초상들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결국 예술 속에서의 악, 가상적인 악은 그와 같이 선이라 할 수 있다 – 이 예술적 악은 삶의 악과 비교하면 너무나 하찮은 것에 불과하여, 심지어 미니멀 예술의 하위장르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준다. 예술에서의 악은 정숙하고, 분별력 있는 악이다. 그 악은 마치 걷어내고 싶은 유혹을 일으키는 부드러운 하얀 장막처럼, 모든 미술의 역사가 아름답게 녹슬게 한 그런 악이다. 여자의 누드나 신체의 일부분의 사진을 프린트한 정영훈의 아름다운 백색 드레스들은, 우리가 흠모하던 여인이 어느 날 자신의 야릇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그 옷을 걸치고 나타나 주기를 고대하게 할만큼 정연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의미는 이미 그 안에 함축되어 있다: 예술작품은 우리를 생존하게끔, 아름다운 삶을 창출하게끔 충동한다. 문학과의 차이점은, 미술의 경우 무용이나 음악처럼 덜 설명적인 예술의 장르라는 것이다. 그것은 양식화되고, 단지 암시적일 뿐이고, 구석에 선하게 자리잡고 있는 그런 악이다. 훼손된 얼굴? 잘려진 머리? 그것은 캔버스의 유채, 합성수지, 라텍스, 사진 몽타쥬 같은 것들, 또는 실제로 절단된 신체를 찍은 사진들(이것이 가능할까?)이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로 귀결된다: 우리의 반성 속에서 순식간에 꺼져버리는 감정의 불꽃같은 것이다. 우리는 함진의 작품이, 사유 이전의 존재가 드러낸 빙산의 일각이며, 그 안에서 점점 더 깨어나고 있는 괴물을 향하고 있다는 점을 실제로 믿음없이 믿는다. 손등을 이빨로 물어뜯고 가슴을 쥐어뜯는 오상길의 <제 살 핥기>와 <제 살 뜯기>의 주인공들을 보며, 우리는 예기치 않게 피가 솟구치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물론 잘못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피가 솟구쳐도 그것이 우리를 감동시키기 위한 것이 아닌 그런 다른 세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시각예술은 삶과는 달리, 영화보다도 훨씬 적은 양의 핏방울만으로도 감동을 준다.

  모든 예술작품은 선(善) 속에 깊이 젖어있으며 이로 인해, 아주 미세한 탈선일지라도 관객들에게는 마치 커다란 부상인듯 느끼지게 한다. 우리는 예술세계에서 존재하고 그 규범은 현실의 것이 아니다. 예술의 지표는 예술이 절대적으로 그 의미를 취하고 있는 삶이다. 또한 그만큼 중요한 예술의 지표는 미술사 자체이다. 예술 속에서 악과 불경스러움, 잔인함과 환상성이라는 것을 논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 내재적인 하나의 변화가 발생한다. 예술 속에 표출된 악은 순간적으로 삶의 사건으로 일치하고, 무의식적인 변화가 실행되며, 이제부터 예술은 예술 그 자체에 일치되어 버린다. 병적인 면을 지닌 예술의 스캔들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오직 그보다 덜 스캔들적인 예술과 비교하여 논하는 것일 뿐이다. 충격적으로 병적인 예술과 삶 속의 악을 비교하는 모든 시도는 방법적으로 부적절하든지 가소로운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러한 실수는 예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부에서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술을 대면하여 실수를 저지른다면 그것은, 우리의 몸의 반응에 뒤이어 필연적으로 언어화하고 마는 정신적 반성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 에세이는 원래 악을 보여준다는 것이 그 시초의 출발이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텍스트라는 이유만으로 선을 시위하기 시작한다. 모순은 여기에 있다: 말하고 쓸 수 있는 언어는 하나이지만 세계는 현실과 비현실이라는 두개의 형태로 존재하며, 그 하나의 언어가 두개의 다른 세계들을 표현해야 한다. 불가능하겠지만 논리적으로 예술세계를 위한 또하나의 언어가 존재해야 할 것이다. 즉 표현되는 순간 “예술은 비현실이며 그것이 표현하는 정서는 이 고통스런 세계에 대한 위안에 불과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려주는 그런 언어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여기에 부주의가 개입하고 이에 따라 예술 속의 비현실을 마치 실제 삶 속의 악을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그런 함정, 혹은 유혹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언어를 통해서 예술은 부당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물론 독자들이 읽는 이 텍스트도 그같은 오해를 도모하고 있다. 글쓰기가 예술이라는 무의미한 세계와 삶의 의미있는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역할을 하듯, 예술가들 역시 작품과 텍스트를 병치시킴으로써 그러한 오해를 만들어낸다. 예술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의미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의미한다. 삶 속의 악에 직면하여 볼 때, 예술 속에서의 선의 나타남 역시 무의미하다. 인간의 역사를 숙고해 볼 때, 그리고 자연의 모든 참사까지 간주해 볼 때 삶에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영원히 실패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와 반대로 예술에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매우 용이한 일이기 때문에, 그러한 선은 예술적 마티에르의 무게 속에서 하나의 하찮은 표현으로 전락한다. 그러므로 악을 자신의 작업에서 표현하려는 예술가의 노력은, 삶에서 악이 창출되는 그 용이한 가능성만큼이나 불가능하고, 악을 헤치고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선을 창출한다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다.

  예술은 글쓰기의 경우처럼 삶 속의 악으로부터 우리를 막아주는 보호막이다. 특히 형편없는 예술들과 그리고 삶을 싸구려 흥미로 채우려는 장식적 예술의 경우 더욱 명백하다. 이러한 예술이야말로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예술, ‘좋은 예술’이라고 평가되는 예술보다 더욱 중요한 예술이며, 그것이 도처에 흩어져 나타나는 한 그 아무 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는 그런 예술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으로, 우리가 집에서 삶을 만들고 용모를 가꿀 때 아무런 의식없이 용이하게 획득하는 예술이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로 가장 장식적이고, 그것 없이는 벽은 도배가 되지 않은 벽, 바닥은 장판이 깔리지 않은 바닥에 불과하다. 장식적인 면을 조금만이라도 혹은 기어이 모두 파괴해내려는 의도를 드러내는 예술작품은, 살인에서만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는 연쇄살인자처럼, 잠재적으로 병적인 모든 삶의 악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장식성은 결국 비극의 배경이 될 뿐이다. 뛰어난 예술작품은 악에 대한 우리의 반성을 강요하고 그를 향해 나아가게 하며, 우리에게 다소라도 방심하지 않도록 경각심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를 갖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나는 여기서 철사망과 차가운 푸른빛을 사용한 간략한 설치를 통해 우리에게 홀로코스트 학살에 대한 반성을 촉발시키는 오상길의 또다른 작품 <우츠 게토 The ??? Ghetto,1996>에 대해 생각한다. 홀로코스트에 관한 반성에 있어 가장 고통스러운 모순 중의 하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면 할 수록, 그것은 논리적 언어의 영역 안으로 편입되어 간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다. 지고의 참혹함은 원래 같으면 사유의 한계를 지나 지나쳐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이처럼 이성 속에 영입된다. 악은 인간의 한계를 항상 넘어간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이 항상 악을 만들어내는 이유이다. 인간은 삶 속에서 극단적 범죄를 범할 능력이 있지만, 모순되게도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후에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다시 사유하고, 분석하고, 급기야 그 분석은 죄악의 정당성을 부분적으로 만회시켜 준다.

  뛰어난 예술이 지닌 여러 기능 중 하나는, 우리 스스로를 조금이라도 조롱하면서 삶의 비극을 용이하게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이다. 행복에 겨운 사람이 자신의 행복을 홀로 가지고 있을 수만은 없어 그 멍청한 행복을 우리에게 큰 소리로 표현해대는 것처럼,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졸작들이 지닌 그 좋은 의도와 끔찍할 정도의 성실함이다. 그러한 좋은 의도에 비해, 수작은 종종 냉소적이고 악의에 차있기도 하다. 그것은 실제의 삶에는 없고 오직 예술과 글쓰기에만 있는 블랙유머이다. <불경전>의 작가들은 불경스러운 행위를 즐기고 있다. 이강우의 칼자국 난 얼굴에는 시치미 뗀 듯한 웃음이, 공성훈의 콜라쥬된 신체의 비행에는 찢겨진 몸의 기쁨이, 비비 꼬아대는 임영선의 절단된 머리에는 빈정거림의 쾌감이 있다. 함진의 작은 인물들은 그 자신도 알고 있는 바이지만 매우 유아적이다. 한편 다른 작가들은 진지한 테크놀로지적 수완을 구사하지만 실은 우리들로 하여금 엷은 냉소를 유발시키려는 가식적 목적에서이다. 김영헌은 파편화된 바비(Barbie)인형의 몸 속을 기어다니는 수줍은 생쥐들을 비디오 카메라에 담는 동시에, 실제보다 훨씬 크게 확대한 영상을 기하학적이고 미니멀한 구조물 위에 – 마치 이 구조적 복잡성과 재료에 현실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필요성과 의미가 있는 것처럼 – 걸쳐진 망사조각들을 통해 투영한다. 그것은 농담이고 이 농담은 예술이라 불린다. 여기에서 그 기술들은 정확히 무엇을 능가하고 있을까? 잔혹함? 지루함? 전혀 아니다. 생쥐들은 편안한 보살핌을 받았으니까. 여기에는 악이 존재하기는 커녕, 단순히 비디오-농담이 있을 뿐이다. 공포는 아주 미세한 전율일지라도 아주 먼 곳에 있다. 인조 피부에 그려낸 김준의 문신은, 살갗 안으로 바늘이 파 들어간 듯한 실제의 문신과 비교해 볼 때, 당혹스럽기보다는 수수께끼 같다. 예술은 실제의 악과 실제의 고통만을 빼고는 모든 것이 허용된 경기장이다. 이 경기장에서의 퍼포먼스 내용은 바로 그 어떤 가짜의 연기(演技)이다. 로마의 콜롯세움은 모든 것, 즉 실제의 고통과 실제의 악이 허용된 전혀 다른 종류의 경기장이었다. 거기에는 검투사들의 죽음을 눈앞에 둔, 그리고 삶을 위한 진정한 투쟁이 있다. 이것과 예술적 경기장과의 차이점은 후자가 농담이라는 것이다. 60년대 미국영화 <프로듀서>에서는, 뉴욕 브로드웨이 극장의 프로듀서인 두 유태인이 복잡한 세금문제를 풀기 위해 크게 실패할 수밖에 없는 내용의 뮤지컬을 의도적으로 제작하여 초연한다. 그들이 내 건 제목은 <히틀러의 봄>이며, 주제는 노래와 춤으로 엮어지는 홀로코스트이다. 그리고 그들의 주인공은 히틀러 총통이고, 그들의 생각은 이 같은 불경스러운 제작물이 단 1회 공연을 끝으로 문을 닫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공연은 처음 부분에서 관중들의 항의성 야유가 있은 이후, 이내 폭소의 연속으로 발전한다. 연극은 대성공이었다. 결론: 삶의 비극은 예술의 행복으로 이어진다.

  예술에서의 불경은 일종의 ‘超불경(metablasphemy)’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결과가 없는 불경스러움이며, 필요하다면 불경이 아닌 다른 것을 입증한다. 예술의 기능 중 하나는 말할 권리가 없는 것을 말하고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보여줌으로써 모든 것이 결국 허락되는 셈이므로, 예술에서의 언어와 사물은 삶 속의 언어나 사물과 동일한 무게를 지니지 못함이 명백하다. 삶에서의 암흑은 유머는 커녕 단지 암흑일 뿐이지만 예술에서의 암흑은 유머에 차있다. 예술과 문학은 냉소적 유머의 매개체이다. 그들은 웃음을 주기 위해 혹은 조롱하기 위해 존재한다. 삶 속에서 우리는 눈물을 흘린다. 그것이 바로 열쇠다: 이 에세이의 첫머리에 제시한 사실적이고 시적인 인용문들을 읽으며 비록 약간 변태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즐기게 되지만, 우리가 삶의 동일한 사건 앞에서 이같은 감동을 느낄리는 없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읽는 신문기사는 <타이타닉> 같은 헐리우드 영화의 성격을 띄게 된다. 우리는 예술과 문학의 냉소적 유머로부터 기쁨을 느끼며, 그것은 삶에 대한 심각한 생각에 들어가기 전에 필요한 휴식같은 것이다.

  냉소적 유머의 하위장르는 유아성(幼兒性)이지만, 관객들은 그것을 너무 심각하게 취급한 나머지, 예술이란 것이 실은 온갖 심각함에 대비되기 위한 ‘쓸모 없음’이란 점을 잊는다. 유아성은 인색함의 한 종류이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히스테릭하게 뒹굴며 우는 아이의 고집과 변덕 그리고 찡그린 표정의 냉혹함이다. 그것은 또한 쓸모없음이며 헛됨이다. 함진의 수많은 작은 인물들, 각자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불쾌한 인상을 쓰고, 우리에게 음부를 드러내는 이 작품들을 어떻게 색다르게 묘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또 몸이 찌그러지고, 갈라지고, 머리가 터져 버린 플라스틱 병정들은? 그 작은 괴물들은 풍자적이며 귀엽고, 냉혹하기보다는 재미있고, 근심스럽기보다는 천진난만하다. 함진은 그 작은 인물들을 잔인하게 대하지만 그것은 즐거운 잔인함 혹은 전혀 잔인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생명이 없는 사물을 고문하고 학살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는 고개를 숙여 그 꿰어진 머리들과 녹아버린 신체들을 보며 무자비한 미소를 짓는다. 함진은 예술적인 고문자이다. 즉 진짜 고문자가 아니라 마치 그런듯이 행위하는 귀여운 악동이라는 것이다. 그의 미니어쳐 작품들은 21세라는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경이로울 정도로 유아적이다 – 이제 그에겐 그의 전 생애를 통해 계속 그렇게 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일만 남았다. 어디에선가 피카소는 어린아이처럼 그림을 그리기 위해 50년을 허비했다고 말한 바 있다. 영리한 아이에게는 한마디면 된다. 사디즘에 대해 말해 보자. 서양에서는 방화벽이 있거나, 동물을 괴롭히기 좋아하거나, (그리고 엄마를 향한 사디즘일수도 있는) 유뇨증遺尿症이 있는 어린이에게서 장차 연쇄살인자가 될 가능성을 본다고 한다. 또한 이 범죄의 삼형제들은 항상 변함이 없는 것 같다. 만약 아이가 자신이 제작한 인물을 고문한다면? 그가 만약 투명한 플라스틱 봉투에 갖가지 신체 분비물을 담고 소장하는데 전념한다면? 그가 약국의 온갖 약물들에 정신이 팔려 있다면? 피를 멈추기 위해 그가 사용했던 반창고가 자신의 마스코트라면? 병원 측의 진단은 ‘아무 문제없음’이다. 이 아이는 정상보다 더 정상이고 평균치를 초월하며 심지어 재능까지 있다. 심지어 과학이나 예술을 할 운명을 가진 아이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가족의 걱정스럽던 드라마는 끝을 맺는다: 즉 인문학이야말로 당신 아이의 천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마조키즘은? 예술에 마조키즘은 없다. 예술가는 본래 마조키스트기보다 사디스트에 가깝다. 유아적이기도 하고(미니멀 예술가 온 카와라의 유아성과 혼돈하지 말기를) 심지어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예술로 우리를 폭격해대는 그들의 집념을 사디즘이 아닌 그 외의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마조키스트적 예술가는 넌센스이며, 차라리 바보에 대해 논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자신을 고문하는 예술가는 실패한 논리학자이다. 그러나 <제 살 핥기>와 <제 살 뜯기>에서 오상길은 우리에게 이러한 예술논리의 간략한 예증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예술에서의 논리란 마치, 남녀의 2인 무용(pas de deux)이나 홀로 하는 자위행위처럼 이상할 정도로 삶 속의 마조키즘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처럼 이 주인공들은 그들의 육신과 피부를 사랑하고 아름다움을 보유하며 또 고문한다. <제 살 핥기>에서는 한 남자가 접혀진 살 부위를 혀로 핥으면서 이빨로 손등을 물기도 하고, 가혹하고도 엄중하게 자신의 육신에 대한 반성을 한다. 그는 마치 고문전문가가 그의 직업적 도구를 들고 천천히 예술적으로 숙고하며 고문하듯이 그의 혀와 이빨을 통해 숙고한다. <제 살 뜯기>는 제작에서는 겸손하고 욕망에서는 영웅적이다. 곧 모든 파열이 올 것이며, 주인공은 육체의 나약함을 주장하는 논증들과 다름없는 매우 ‘정신적’인 고조 속에서 우쭐해 한다. <제 살 핥기>와 <제 살 뜯기>는 사실 육신을 망각하지 않게 하려는, 그리고 정신을 위한 옹호이다. 즉 사려있는 남자나 여자조차도 머리를 쥐어뜯고 살을 찢어내야 할 정도로 절망적인, 이러한 예술 속에서 실패하는 정신을 위한 옹호 말이다. 그리고 모두 알고 있듯이 정신은 악의 시초이다. 정신은 육신보다 더욱 더 삶을 의미한다.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고통의 열매인 기쁨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인가? 기쁨의 열매인 고통을 어떻게 느낄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살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악을 대면하여 우리는 자문한다: 왜? 혀로 핥고 살을 찢는 매 번의 움직임은 하나의 질문 같은 것이다: 왜? 누구라도 공중목욕탕에서 절차에 맞추어 때를 밀어보았다면 – 참을 수 있을 만큼 고통스럽다라는 의미로 읽기 바란다 – 살과 삶이 주는 기쁨의 이유에 대해 사유해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삶의 기쁨은 화창한 날씨와 동일한 이유 속에서 존재한다: 즉 자신을 고문하기 위해서. 아마 인간이 왜 존재하느냐 하는 질문(악을 감내하기 위해서? 괴물이 되기 위해서?)을 제외한다면, 그 어떤 질문도 그만큼 우리의 사유를 괴롭히지는 못할 것이다. 악의 존재이유는 모든 창조와 또 모든 크고 작은 파괴들의 근원에 숨쉬고 있다. 그것은 삶을 감지하기 위한 접촉의 욕망이며, 오상길의 비디오 속 영웅과 나아가 다른 이에게 악을 겪게 할 책임이 있으면서도 그럴 능력이 없는 모든 남녀의 방식에 따라 삶을 생각하려는 욕망이다. 악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악을 거부하든 창조하든 간에, 창조가 아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예술은 그 자체가 자신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이다. 왜 창조하는가라는 질문의 대답은 그 자체가 창조이다. 예술은 악에 대한 결정적 대답일 뿐이지만, 삶 속에 악이 지속하는 한 끝없이 반복되어야 할 운명을 가진다.*

* 박승호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6-26 00:33) This can also serve as proof of cyber bullying in case you want to act http://celltrackingapps.com legally on it

不敬스러움-그 罪의 힘을 향해

不敬스러움 : 그 罪의 힘을 향해

김 원 방(미술평론)

< 1 부 >

오직 극단적 난폭함 만이 인간의 객체화된 몸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성스러운 힘을 분출시킬 수 있다.

― 죠르쥬 바따이유

I. 절망적인 전시, 불경스런 독해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 지금 눈 앞에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 되는가? 바로 그것은 ‘이미 있는것’, 또는 ‘있어도 되는 것’이라는 모순적 존재상태가 될 것이다. 없는 것을 있게 하려는 시도, 비가시적(非可視的)인 것을 가시화하려는 시도, 상상과 현실 사이의 모순적 만남을 이루어내려는 시도 속에 이 전시의 의도 또는 불경(不敬)스런 욕망이 있다.

   이 전시에서 보여진 모든 잔인함과 징그러움을 통해 그러한 불경스런 욕망을 어느 정도까지는, 심지어 영구적으로 흡족하게 해주고자 했던 것이 전시를 기획한 나와 일부 관객들의 기대였겠지만, 그러한 약간의 흡족함은, 이 전시에서 우리가 본 ‘그 어떤 잔혹함’, ‘그 어떤 괴물스러움’, ‘그 어떤 환상적인 것’들의 명료하기 짝이 없는 ‘시각적 출현’ 속에서 오히려 소진(消盡)되어 버린다. 그 작품들이 공표하고 구사하려 했던 모든 불경스러운 작태는 그것이 눈 앞에 목격되던 바로 그 순간, ‘이미 있고, 있어도 되는 것’으로 역사화하고 공인(公認)해주는 ‘의식적 이성(意識的 理性)’의 순치(馴致)에 의해, 가장 아늑하고 무거운 장막 아래에 미이라처럼 잠들어 버렸다.

   ‘불경스러움(the blaspheme)’. 불경성의 자리는 결코 그 어느 곳에서도 실현되거나 고정될 수 없는 자리이다. 그를 위한 권좌는, 그것이 심지어 지옥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거기’라고 지칭할 수 있는 그 어떤 공간도 점유하지 않는다. 불경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이 전시는,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것들을 성공적으로 모아놓은 동물원’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경성은 그 어느 곳에도 하나의 스펙타클로서 ‘온전히’ 보여지고 보호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침범의 궤적으로서, 반사적으로 내뱉은 가래침으로서, 벌어진 상처, 정액의 삼킴, 순간의 들킴으로서 나타나고 사라진다. 그것이 바로 불경함의 생태성이다. 이 전시와 작품들은 불경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의 계기, 결절점일 뿐이다. 따라서 이 전시에 있어서 불경성은 그 ‘메세지화된 내용’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작품과 전시 전체를, 나아가 이 글까지도 가로지르고 곧바로 사라지는 하나의 충격 또는 허탈감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불경성은 ‘명료하게’ 전시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이 전시의 한계이며 이 한계를 통해 불경스러움의 지칠줄 모르는 충동이 지속된다.

   이 전시의 기획의도를 가장 인습적인 방식으로 규정하면, “잔혹하고, 괴물스럽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다루는 최근의 미술경향에 포커스를 맞추어 새로이 부각시키며, 이를 성상파괴적인 불경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현대미술 전반의 맥락과 연결짓는다”라는 정도가 될 것이다. 협소한 범위 내에서 그것은 사실이다. 미술계의 정보에 촉각을 세우고 있는 관객이라면 아마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성향으로서 충분한 전시와 이론적 점검을 거친 바 있는 ‘비천한 예술(abject art)’같은 것을 이 전시에 연관지어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연관성은 분명 타당하지만, 이 전시의 마지막 목적은 ― 만일 ‘비천한 예술’을 비교의 예로 삼자면 ― 가능한 한 그러한 ‘비천한 예술의 쟝르적 특성과 그 문화적 의미’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까지도 파기하고 지연시키는데 있다. 즉 나의 목적은, 잔혹, 괴물, 환상, 그리고 비천함까지 포함하여, 오직 그것들 만이 불경한 것은 아니며, 그것들은 단지 ‘불경함’이라는 ‘완성될 수 없는 행위’를 초혼하고 곧바로 사라져버리는 무수하게 잡다한 모든 시공간적 계기들의 한 분과로서만 간주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어떤 특정한 ‘잔혹예술/괴물예술/환상예술’이라는 ‘쟝르’개념만을 내세우거나, 심지어 “피가 튀기고, 징그러운 괴물이 하늘을 날라다니면 이것이 가장 불경스러운 예술이다”라는 식의 쇼맨쉽적 큐레이팅과 대중적 야합을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현대미술 전반을 통해, 수많은 불경한 예술을 익히 보아왔다. 다다, 아방가르드, 초현실주의, 팝아트, 심지어 사물로의 전락을 서슴치 않은 미니멀리즘에 이르기까지, 소위 사물을 ‘재영토화’하는 모든 실험들과, ‘아직 안 말하여진 것을 말하려 하는 모든 언어적 시각적 행위들’은 그 자체가 불경한 욕망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불경함의 정의는 아주 단순할 수 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 보여질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당연히 공포와 혐오, 분노를 수반할 수록, 억압을 통해 드러날 수록 그것은 더욱 불경스러운 것이 된다. 그렇다면 잔혹, 괴물, 환상을 ‘소재’로 사용하는 예술들은, 그러한 불경성을 최상위권에서 독점한 예술로서가 아니라 단지 불경함으로의 욕망을 일시적으로 충족시켜주기 위한, 그 가래침을 뱉어내기 위한 또다른 방향타로서만 작용할 뿐이다. 즉 이들 특정한 스타일들은 단지 가장 최근의 ‘쟝르’로서, 그러한 카테고리적 고정관념에 역설적으로 힘입기 위해 ‘일단’ 동원된 것이다. 이 말은, ‘이 전시의 절반은 실패일 수 밖에 없으며, 나아가 그 절반의 실패를 통해서만이 불경스러움이 드러날 수 있다는 숙명’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실증주의적-생산지상주의적’ 악습이 지배하는 ‘미술계 지향적’ 독해의 층위에서는 소위 ‘새로운 트렌드(trend)’같은 것의 촉각을 제공하는 듯 행세하여 하챦은 인기를 얻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모순되게도), ‘자기파괴’라는 충동을 끊임없이 발동시켜 ‘잔혹, 괴물, 환상의 미술’이라는 특정한 쟝르들의 성립 자체를 다시 잔혹하게 부인함으로써 불경스런 욕망의 충족을 목전에서 좌절시키고 바로 그럼으로써 그 욕망을 더욱 빗나간 방식으로 부추기는 것, 그리하여 막상 눈에 보이는 전시 자체는 단지 불경의 흔적으로만 남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이 전시의 핵심이다. 결국 이 전시는 ‘창조자’의 작품이 아니라 불경한 행위의 흔적 또는 적출물 정도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불경함을 예술 전체의 가장 기본적인 충동과 생태로서 간주한다면, 미술사적 진보의 역사란 창조의 역사가 아니라, 적출물들의 역사, 좀더 정확히는 ‘적출물의 기념비화(記念碑化)’라는 모순의 역사로 정의될 수도 있을 것이다.

II. 잔 혹

   이탈, 홍영아, 김영헌, 함진, 오상길, 임영선, 김준 등에 이르기까지 고루 나타나는 잔혹성과 폭력성, 사도마조시즘(sado-masochisme)적 성향은 대중들에게는 ‘남근적인 것’과 무조건 동일한 것으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실은 그와 반대로, 외부로부터 고착되고 코드화되는 몸정치학적 권력에 대한 가장 ‘위반(transgression, violation)적’이고 ‘탈 남근주의적’인 실천의 방식이 된다. 예를 들어 사드(Marquis de Sade)의 폭력적 오르지(Orgy, 混淫, 亂交)의 경우를 보면, 이러한 행위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총체적 사회변동 속에서 모든 사회적, 정치적 위협에 처한 몸의 상징구조를 폭력적 에로티시즘을 통해 깨고 재구성하는 행위의 종말없는 반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시할 점은, 외적이고 사회적인 기호들이 몸에 즉각적으로 반영되고 구조화되는 상호작용성이며, 그것이 바로 일체의 몸정치학, 폭력, 에로티시즘이 함께 분절되어 나갈 수 있는 기본 소여가 된다. 즉 ‘권력의 사회적 지도의 주요 윤곽이 몸 공간에 물질화 됨’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이를 매리 더글라스(Mary Douglas)는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의 ‘몸 테크닉(technique du corps)’ 이론의 영향 하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의 몸은 항상 사회의 이미지로서 취급된다. (…) 사회적 차원을 동시에 전혀 내포하지 않는 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 머리와 발, 두뇌와 성기, 입과 항문의 관계들은 일상적 차원에서 모든 위계의 적절한 패턴을 표현할 수 있도록 취급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제, 몸의 통제란 것이 사회적 통제의 표현이란 가설을 제기한다.

   이러한 신체적 상징성(bodily symbolism)이 가장 전형적인 방식으로 발견되는 곳은 바로 사드의 경우이다. 그러한 신체적 상징의 기본유형들은 그가 겪었던 여러차례의 투옥 경험(즉 감옥의 비좁은 공간과 공간의 신체화를 수반하는)에 의해 재작동되고 있었을 것이며, 이리하여 사회적 무질서에 대한 모든 강렬한 지각들의 성애화(性愛化,?rotisation)가 작동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한마디로 “사회적 몸과 성애적 몸의 동형성(isomorphism)”이라고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회적 몸의 상징성과 외적인 자극의 과잉은, 다시 신체적 에로티시즘의 영역에서 광폭하게 재실행되고, 모든 차이들은 성적 차이로 번역되어 마지막에는 그러한 차이의 소멸과 함께 사라진다. 어떤 때는 혼성적인 무차별 속에 빠져드는 방식으로, 어떤 때는 모든 것을 남성적 동질성으로 환원시키는 방식을 통해 사드는 모든 차이를 소멸시키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들을 폭력적 ‘혼음’의 이상적 위계질서에 다시 복종시키는 방식으로 모든 차이를 재창조하고 재긍정하는 것이다.

   홍영아의 작업에서 창궐하는 내장과 성기, 구멍과 분비물, 오상길의 비디오 작업에서 범벅이 되어 나타나는 땀과 침, 함진의 역겨운 신체적 용해물과 그리고 쥐들의 거주지가 된 김영헌의 인형, 이강우의 괴이하게 썩어들어가는 질병적 얼굴사진들은 특히, 폭력적 행위와 더러움(the abject)과의 필연적 연결, 혹은 달리 규정해서 ‘신체 이미지들 간의 폭력적 혼음를 통한 차이의 파괴’를 통해 사회적 실체성과 외부적 시선의 권력에 대한 불경한 위반을 시도한다. 사드의 소설들이 이러한 ‘배설물의 재흡수’로 특징지워지는 것처럼(즉 배설물, 정액, 피 등을 먹고 먹이기), 분비물이 나오는 신체의 모든 구멍들은 사회적 실체성이 가장 파괴되기 쉬운 지점들을 의미한다. 분비물들이 이 경계를 넘어나올 때, 그것은 그룹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며, 이로부터 하나의 위반적, 위협적 행렬같은 것이 생겨난다. 모든 신체적 배설물은 항상 어떤 권력을 내포하고 있으며, 가장 위협적인 배설물은 바로 몸 안으로 다시 흡수되는 그런 배설물이다.

   이러한 괴물적 차이들과 신체적 배설물들이 이루는 혼음적 이미지에서는 바로 사드의 혼음에서처럼, 육체와 이미지와 시선의 내적, 외적 경계가 열리고 섞인다. 그것은 일종의 ‘배설물 탐익(coprophagia)’ 같은 것이다. 이러한 더러움과 끔찍함은 사드에게 있어 그랬듯이, 경계의 위반과 그리고 태고의 모성적 몸으로의 한없는 반복적 퇴행 ― 크리스테바(J. Krist?va)가 ‘비천함(abjection)’이라고 부른 바 있으며, 안과 밖, 자기와 타자 간의 구분이 없는 가장 원초적인 나르시시즘 단계와 일치하는 ― 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차이들의 혼음’은 수행자들 간의 혹은 수행자와 그 희생자 간의 고통과 쾌락의 교환, 나아가 ‘외적인 권력에너지에 의해 기호화되고, 억압되고 과잉된 신체의 보이지 않는 경계들’을 그 시각적, 신체적 혼음을 통해 발산하고 가로질러버리고, 무너뜨려 버림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신체의 태고적 질서로 복귀하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불경한 행위나 이미지는 그 외양적 도상 자체 ― 즉 특정한 살육이나 특정한 괴물 ― 에 주목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보편적 질서로 회귀하려는 반복적이고도 실현불가능한 충동과 관련되는 것이라 할수 있다.

III. 괴 물

   잔혹함, 폭력, 더러움 등과 유사한 맥락에서 연결되는 ‘괴물(monster)’이란 개념은, 적어도 문화비평의 영역에서는 앞서 논의된 신체적 층위 위에 더욱 폭넓은 문화적 코드의 층위가 더해지는 개념으로, 소위 ‘선형적 역사(linear history)의 서사구조’를 더욱 회고적, 순환적 차원으로 변조해낸다. 즉 ‘태고적 복귀’라는 표현의 의미가 그러하듯, 괴물이란 것은 전적인 ‘초월’이나 절대적 타자를 향한 ‘이탈’을 수반하는 개념이 아니라, ‘잠재적(latent) 차원(혹은 억압된 몸)’ ― 이미 항상 진행되고 있었던 ― 의(으로의) 숙명적이고 강박적인 출현(복귀)으로서 이해된다는 것이다.

   괴물은 마치 ‘햄릿의 유령’처럼 억압되어 있고 혼란스러운 존재이지만, ‘사후에(post-)’라고 하는 감각적 순간에 이미 ‘사전에(pre-)’라고 하는 형태적 상처로서 각인되어 있는 그런 존재이다. 괴물은 항시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나를 기억하라…” 괴물은 바로 우리를 ‘사로잡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한 ‘괴물의 잠재적 존재론’은, 나와 괴물 사이의 대화가 고립되었다기보다는 상호의존적 숙명에 놓여있음을 말해준다. 조안 콥젝(Joan Copjec)은 그러한 괴물적 ‘잠재성’의 의미를 다음과 같은 라깡(J. Lacan)적 어조로 규정한다.

잠재성이란 이미 과거에 생겨난 그 무언가가 숨어있으면서 어떤 미래에 갑자기 나타나기만을 기다린다는 식의 그런 실증적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대신 ‘잠재성’이란 것은 우리 자신으로의 접근 불능성을 말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우리가 타자들에게(다른 주체 뿐만 아니라 다른 시간들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괴물은 바로 그러한 잠재적 사로잡음의 힘, ‘불경한 회상’을 행하게 하는 힘을 통해 의식세계를 순간적으로 횡단하고, 파열시키는 충동이다. 즉 괴물은 그 자체가 ‘붕괴된 범주’, 나아가 ‘사유의 종말’로서 잠재해 있으면서 끊임없이 이성과 의식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인식론적 그물망으로부터 언제든지 도망치는 힘이며 존재론이다. 그것은 ‘사물의 질서’에 분류되기를 거절하며, 자신이 지닌 혼란스러운 혼성성(hybridity)으로 인해 어떤 구조적 체계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바로 그래서 괴물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고 금지된다. 이와 관련해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사회적 권력의 그물망을 괴물의 발생학적 소여로서 주목하고, “괴물이란, 사람들의 신체들과 이들의 쾌락들로부터 다형적(polymorphe) 행위들이 , 다양한 권력장치들에 의해 실제로 추출되고, 드러내어지고, 고립되고, 강화되고, 합병되는 소위 ‘판옵티콘(panopticon) 사회’의 강력한 연합물”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괴물을 호출하거나 스스로 괴물화하고 혼성적인 접합을 시도하는 행위는 당연히 가장 ‘부적절한’ 즉 불경한 행위가 된다. 한편 다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트린 민 하(Trinh Minh-Ha)의 표현을 빌어, 괴물적 외피를 가지고 있는 인간을 ‘inappropriate/d others’, 즉 ‘부적절하며 (동시에) 사유화되지 않은 타자들’이라고 규정했다. 이것은 “본래적 존재들과의 관련성’을 전혀 상실했다든가, 혹은 ‘특별한 별도의 영역’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그보다는 ‘타자와의 비판적이고 해체적인 상호관련성 속에 있는 존재’, ‘자기회귀적 합리성이 아닌 분산성 속에 있는 존재’이며, 지배의 가능성을 추월하는 잠재적 접속의 상태이다.”

   가장 ‘궁극적인 괴물’, 또는 순수한 부정적 개념으로서의 ‘괴물성’이란 것은 절대적으로 비가시적이며, 그 전모를 시각화할 수 없는 것, 즉 앞서 말했듯이 그 자체가 ‘범주의 위기’라고 규정된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 공간과 시간 내에서 시각적으로 재현된 괴물, ‘실체화되고 범주화’된 괴물이란 것은 ‘괴물 그 자체’(즉 괴물성의 총체적 구현)라기보다는, ‘괴물’이란 제목의 멈추지 않는 영화에 있어서 그 무한한 지속의 시간대를 초혼하기 위한 ‘영화적 still’ 혹은 ‘괴물로부터 떨어져 나온, 버려진 기호의 단편’, 나아가 ‘괴물의 결정불가능한 전모를 가상적으로 가시화한 모조물(simulacre)’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어떤 구체적 괴물과 접합하는 행위, 나아가 모든 혐오스런 타자들과 접합된 예술들에 있어서의 진정한 ‘괴물성’은, 그러한 가시적 도상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위반적 접합의 경계선에, 그 괴물과의 끔찍한 혼음의 순간에 있는 것이라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이 글의 서두에서 말했듯이, 그러한 예술들의 불경성은 끔찍한 괴물적 도상의 ‘내부’에서 성취되고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라는 범주적 개념 자체가 실패하는 그 순간 속에 있는 것이다. 기존의 동질성과 타자성을 순간적으로 가로지르고 침탈해버리는 보이지않는 횡단선, 즉 그 두려운 ‘잠재성의 강박적 덮침’과 ‘이미 사라졌음에 대한 기억의 시간’을 통해 작품과 전시실 전체에 유령처럼 출몰하는 ‘전후방적 시공간대(avant/arriere, 혹은 pre/post)’에서 이미 그 괴물성이 현현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가, ‘괴물’보다는 ‘괴물성’이라는 비가시적인 것의 생태와 힘에 주목하게 해야 하며, 결코 눈에 보이는 몇몇 신기한 괴물들의 오락적 행진(Freak Show)으로 전락시켜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IV. 환 상

   불경의 개념에 접근하기 위한 세번째 항목인 ‘환상(fantasy)’ 역시 여태까지 유지해 온 논지, 즉 ‘범주적 언어와 이성의 붕괴’라는 문제의 지속이 된다. 단순히 ‘백일몽’과 환상을 동일시하는 고정관념은 앞서 괴물에 대한 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내적인 차이를 절대화한 ‘쟝르’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환상적 도상’을 넘어 ‘환상지향적 상태’란 것은 그 자체가 주류적 흐름 ‘내부’에서 전복적 공간들을 열어나가는 글쓰기의 형태로 보아야 하며, 그것을 어떤 쟝르안에 가두어 환상을 객체화시켜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놀라움’, ‘마술성’, ‘신화’ 등을 환상적 예술의 세부영역이나 변별특성으로 간주하는 것은, ‘환상적 허구(fantastic fiction)’와 ‘실제적 허구(realistic fiction)’의 구별이라고 하는 ‘절대적 차이’의 개념에 기초한 것에 불과하다.

   어윈(W. R. Irwin)의 의하면, 환상이 지니는 역동성은 ‘실제적(real)’ 규범들의 대한 ‘텍스트적 위반(transgression)’에 있다. 이러한 텍스트적 위반은 텍스트가 환상을 위한 유희의 장소로 작동하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여기서 ‘유희(game)’의 목적은 쾌락(pleasure)이며, 이러한 쾌락의 유희는 어떤 이미 내재화된 금지의 한계 내에서, 즉 교실에서는 안되고 놀이터에서만 가능하다는 식의 특정한 시공간적 제약에 의해 한정된다. 그래서 유희는 종종 ‘모든 텍스트들의 쾌락’과 유사한 것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텍스트의 쾌락이나 그것이 포함하는 서사는 텍스트적 장치(외부세계로부터 격리시키는)라는 놀이터 안에 묶여지고, 한계지워지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텍스트의 유희를 그 책 바깥에서의 유희보다도 훨씬 카니발적(carnivalesque)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텍스트의 카니발적 유희는 물론 ‘퇴행적(regressive)’인 측면과의 관계를 부인할 수 없다. 프로이트의 경우는, 환상에 의해 현실의 연대기적 시간(chronology)으로부터 격리됨으로써 무의미한 퇴행들이 일어난다고 보았고, 바르트는 어린이에게 있어서는 물론 어른에게 있어서도 모든 환상적 유희는, 자신의 손아귀를 항상 벗어나는 그런 쾌락의 잃어버린 영역을 찾으려는 충동에 의해 움직인다고 보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건 분명한 것은, 환상적 동화는 실은 두개의 경쟁적 공간차원 ― 즉 환상화된 공간과 그 공간을 주도하려는 주체의 공간 ― 들을 통해 모든 서사의 연대기적 시간감각을 재구성되어 나간다는 면에서, 시간성 자체가 근본적으로 무의미해진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무시간성이라는 외적 틀(frame) 속에는, (별개화된) ‘낮(day)’을 그 기본적 참조체로서 의존하는 연속적이고 구조화된 시간이 있으며 이것이 또 하나의 내적인 틀로 존재한다” 것이다. 이 연속적으로 구조화된 시간이란 것은 텍스트적으로 ‘서사화’된 시간이 아니라, 모든 서사의 재구성(무시간적인)을 조종하는 일종의 ‘공간’이다. 바로 그 공간이 모든 퇴행, 나아가 실제적 규범들에 대한 텍스트적 위반의 욕망이 발생하고 추진되는 공간이다.

   환상공간에서의 그러한 위반적 욕망의 발산은 어떤 현실적 성숙함(즉 연대기적 시간감각)을 상실한 것으로 간주하는 의식에 의해 의도적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점은 환상을 ‘창조적 역동성’으로 독해하는 바르트의 관점을 더욱 뒷받침한다. 즉 환상적 공간에 있어, “자신을 구성하는 언어(즉 글쓰기)는 항상 ‘장소의 바깥(hors de place)’이기 때문에”, 그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텍스트의 기능을 ‘사기’에 연결시킨다.

   이러한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원할 수 있고 사기를 칠 수 있는 바깥의 장소’, 그것은 방금 인용했듯이 텍스트 내부에 있는 ‘내적인 틀’이면서도 텍스트의 바깥이 되는 이중적, 기생적, 도주적 공간이다. 그것은 항상 텍스트의 내부에서 잠재적으로 작동하고, 실종시키고, 뒤섞어내며, 바로 이 점이 환상의, 정확히 말해 텍스트에 대한 ‘환상적 독해’가, 잔혹한 파괴 및 재창조라는 카니발적 차원, 그리고 불경스런 위반과 연결되는 이유이다.

   이제 환상과 관련하여 최종적으로 부각시켜야 하는 바는, 바로 그러한 환상적 공간의 위상이다. 그것은 환상적 공간의 의미를 단순히 , ‘객체화된 환상’, ‘환상을 소재로 한 이야기나 도상(icon)적 결과물’ 그 자체인 것으로 혼동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며, 달리 표현하면 ‘무시간을 재현한 외적인 틀’로부터 그 안에 잠재적으로 작동하는 ‘내적인 틀’을 차별화시킴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 후자야말로 환상이 실행되는 보이지 않는 장소이기 때문이며, 이 말은 하나의 ‘환상(fantasy)’과 ‘환상성(fantastic)’을 개념적으로 철저히 구분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간단히 말해 우리가 눈에 보이는 특정한 ‘괴물’보다는 그 궁극적 상태로서의 ‘괴물성’에 주목하였듯이, 환상에 대해서 역시 그러한 개념적 층위를 분명히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츠베탕 토도로프(Tzvetan Todorov)는 구조주의적 분석의 방법을 통해 환상과 환상성을 구분하면서, ‘쟝르 픽션’으로서 차이화된 ‘환상’에 대해 위반적 사유로서의 ‘환상성’의 의미를 정립한 바 있다. 그것은 앞서 제시된 괴물성의 정의, 그리고 죠르쥬 바따이유나 푸코가 생각하는 위반의 의미에 완전히 합류하고 새로이 강화한다.

‘환상성’이란 것은 (…) 위험에 가득찬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나가며, 그 어떤 순간에도 증발해 사라져 버린다. (…) 환상성은 인정된 질서의 깨짐이며, 변함없는 일상적 합법성 내부로부터 분출하는 ‘허용불가능함’이다.

   토도로프의 ‘환상성’은 기본적으로 텍스트적 경계를 독자의 개입에 열어놓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환상성’은 주저함, 불확실성, 불안정한 양가성(ambivalence)의 장소가 되며, 독자는 갑자기 중요한 주인공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서사적 인물과의 동일시가 아니라, ‘환상성’의 상호작용(interaction)을 통해서 말이다. 그리하여 “’악마’나 ‘공기 속의 요정’, ‘흡혈귀’ 같은 것이 있을리 없는 우리의 이 실제적 세계 내에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정말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한하게 열려있고, 아무 것도 그 안에 담아 밀봉할 수 없는 텍스트’는 고정성과 보수성에 의해 확립된 개념들에 대한 위협이 된다. 즉 환상성은 이제 사회정치적 ‘주변성’과 ‘괴이함(ex-centricit?)’의 탐험을 위한 가장 효과적 형식으로서 독해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토도로프의 ‘순수한 환상성’은 ‘위반’에 대한 미셸 푸코의 정의에 일치해 나간다.

위반이란 것은 한계를 내포하는 행위, 즉 가로지르는 행위의 섬광만이 보일 뿐인 그 협소한 지대이다. (…) 위반이 차지하는 모든 공간은 단지 그것이 가로지르는 선일 뿐이다. (…) 위반은 지극히 짧게 끝나버리는 흐름 속에서 자신의 등 뒤에 곧바로 닫혀버리는 선을 가로지르고 또 가로질러 나간다. 이런 식으로 위반은, 침범불가능한 지평을 향해 또다시 곧바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전개를 정리해보면, ‘불경함’이라는 전반적 개념의 ‘하위개념’으로서 애초에 제시되었던 ‘잔혹, 괴물, 환상’이란 개념들이, 불경성을 실천하기 위한 텍스트적 파편의 수준을 넘어 이제는 ‘불경성’ 전반의 ‘비가시적’ 개념의 차원에 동등하게 접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개념적 층위들의 이러한 확장을 정리해내자면 그것은, 불경(blasphemy)과 불경성(the blasphemous), 잔혹(cruelty)과 잔혹성(the cruel) 괴물(monster)과 괴물성(the monstruous), 환상(fantasy)과 환상성(the fantastic)을 철저히 구분해야 한다는 명제이다. 즉 앞서 언급한 토도로프의 구분에서처럼 이를 사물화(reification)의 차원이 아닌, 텍스트적 파열과 이것의 포착불가능한 지속의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는 ‘잔혹’,’괴물’, ‘환상’의 세가지 개념을 단지 새로운 스타일의 징표 정도로 간주함으로써 또다른 미술사적 역사주의와 모더니즘적 ‘새로움의 신화’ 라는 쟝르적 영토전쟁의 일부로 전락시키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기존의 미술 속에서 잔혹이나 괴물이 아닌 다른 스타일을 통해 이미 시도되었던 불경한 실험들 ― 필연적으로 제도화, 키치화했지만, 기존의 텍스트들과의 텍스트적 ‘차이’를 통해 그 어느 시공간 안에서 순간적 위반을 실행할 수 있었던 ― 의 의미를 근거없이 폄하하고, 나아가 잔혹, 괴물, 환상의 미술이 기존 예술에 대해 새로운 진보주의적 경계(또는 미술사적 경계)를 ‘확고히’ 그어내리는것 처럼 행세하는 대신, 반대로 ‘불경/잔혹/괴물/환상’의 개념을 예술 그 자체의 ‘작태’로서, 예술을 ‘찢어내듯이’ 독해하기 위한 관통선으로서 드러내려는 것이다. 즉 작품 ‘속’에 그려진 햄릿의 유령이 아닌, 작품 위에 출몰하고 작품을 위반하는 유령으로서 말이다.

   그 점이 바로, 이 전시에 범람하는 핏물과, 배설물, 비현실적 백일몽들이 한편으로는 단지 ‘horror fantasy movie’쇼라는 쟝르로 전락하는 실제적 위험 속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 쇼의 한계를 넘는 중층적 층위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중층적 층위란, 보여진 ‘하나의 잔혹’을 통해서는 ‘잔혹성의 잔혹한 궤적’을, ‘하나의 괴물’을 통해서는 ‘괴물성의 괴물적 궤적’을, ‘하나의 환상’을 통해서는 ‘환상성의 환상적 궤적’을 드러내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모든 ‘불경성’의 텍스트적 구조이다.

< 2부 >

V. 불경의 행적들

   이러한 관점 하에서 우리는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의 불경스러운 행적들을 나열해보고자 하는데, 이러한 진술은 물론 잔혹, 괴물, 환상적 이미지라는 볼거리적 측면보다도, 그것들이 행하는 매우 짧은 위반의 순간과 그 사라짐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다.

   군인과 에일리언들의 미니어쳐들, 젤, 곰팡이, 정액, 머리카락, 피, 약, 벌레, 곡식, 부패,…

   함진이 수거하고 파괴하고 또 수집해나가는 이 신체적 파편들은 온갖 이상한 접합, 용해와 폭발들의 실험실이다. 나는 여기서 정말로 약을 사용한 작업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오브제들 역시 ‘약 같은’ 신체와 ‘독 같은’ 신체 사이의 이상한 변환이라는 상징구조 속에서 작동함을 발견한다. 약이란 것이 신체와 정신의 변환을 수반하듯, 이상한 무아경(ecstasy)과 사이키델릭이 지배한다. 함진의 모든 작업들은 이러한 무아경과 변태를 통해 이루어지는 일종의 ‘안락사’이며, 그 실천의 실험실이다. 이것이 특히 불경스러운 이유는, 그 안락사들이 병상 위의 자애스런 묵인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안락사 자체의 무아경을 위해, 수집된 희생양들을 통해 한없이 반복 섭렵해나가는 사로잡힘이기 때문이다.

   이탈의 작업 <도살장의 성 요한나>. 불타버린 두꺼운 책 옆에는 정육점의 기계가 쉴 새 없는 절단의 운동을 해댄다. 선적(線的)인 역사와 지식적 권력의 보고(寶庫)로서의 책, 그러나 그것은 오직 충동적으로 고기를 절단해대는 기계의 사딕(sadique)한 에너지에 점령당한다. 그을려 불타버린 책장 위에서는 여선생을 윤간하는 듯한 불경스러운 향연의 절정감이 지속된다. 그리고 이러한 현장은 동시에 폐쇄회로 비디오로 생중계된다. 그러한 가상적 재공간화 속에서 사딕한 충동은 단순히 기계적 에너지의 암시를 넘어, 바라보는 자의 시각을 그리고 몸 전체를 그 안으로 불러들인다.

   이러한 책에 대한 충동적 오르지(orgy)는 홍영아의 책작업 <로트레아몽의 즐거운 노래>에서 계속된다. 50권의 책 표지들 위에는 내장들, 피, 섹스, 폭력, 에일리언, 변태, 마스크, 성기들이 창궐한다.이 책들을 집어 내용을 펼쳐보면, 과학이론이나 로트레아몽의 시같은 것이 있다. 이들을 다시 원래대로 놓는 순간, 책들은 입과 항문이 뒤집혀진채, 항문으로 소리지른다.

   함진, 홍영아, 이탈에 이어 김준의 문신있는 신체(, ), 그리고 팬티를 입힌 날고기덩어리인 김영헌의 <30일간의 매달림>, 모두 기본적으로는 죽음의 충동을 가시화함으로써 위협성과 모욕을 수반한다. 이러한 몸들이 괴물적인 이유는 우선 비사회화된 살덩어리와 껍질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시선적 권력에 가하는 공격성, 나아가 우리의 신체 자체에 그러한 공격적 죽음을 전염시키는 능력 때문이다. 그러한 비사회적 공격적인 신체는 임영선의 <껍질의 법칙 I>과 정영훈의 의상작업인 <실천적 패러다임을 위하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내부에 있었어야 할 본래의 생물학적 몸은 하나의 추상적, 이데올로기적 결과물로서, 단지 차이에 대한 정치적 사유물로서 드러내어 진다. 그 의상적 껍질은 근대적 인체의 완고한 성스러움에 대한 모욕의 실험장이다.

   혐오스러운 신체를 통해 무의식 깊은 곳의 본래적 신체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는 김영헌의 <1999번째의 희망, 혹은 혐오>에서 계속된다. 실제의 쥐들이 서식하는 인형의 찢겨진 몸통은 사회적 혐오물을 신체 내부에서 평안히 생존시키는 불경스러운 반전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 신체와 무의식 깊은 곳에 파묻어 두었을 모든 금기와, 그 금기로 인해 증식하는 충동들을 드러내는 것 같다. 그리고 이를 비디오로 동시재생하기 위한 스크린들은 갈기갈기 찢겨져 있는데, 이는 세계와 신체의 온전한 ‘그림’까지도 찢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매우 히스테리적이고도 태고적인 몸의 환상이다.

   자기파괴의 충동은 임영선의 광폭하게 회전하는 두상(頭像)에서 지속된다. 그것은 전통적 조각 두상이 그렇듯 명상이나 고뇌가 관조되는 순간이 아니라, 명상과 고뇌라는 관조의 조건 자체를 파괴해버린다. 길이 4m가 넘는 회전하는 기계성기(性器)는 그것이 생산해내는 지나치게 과다하고도 순수한 에너지를 통해, 마치 여성 신체에 대한 남근들의 폭력적 승리인 것처럼 그것이 위치한 모든 시공간에 사드(Sade)적 의미의 ‘통일적 질서’를 만들어낸다. 그 질서의 감각은 ‘성별적, 쟝르적 조화’의 감각이 아니라, 과다한 공격을 통한 ‘자멸의 평온함’이다.

   오상길의 , … 자기 자신의 몸을 한없이 핥고 물어뜯고 찢어발기려 하는 인물, 침과 땀, 할큄의 흔적이 범벅이 된다. 그것은 덫에 걸린 표범처럼 흉폭해 보인다. 오상길의 그러한 행위는 공격욕과 공포감, 절망감이 혼합된 일종의 공황반응(panic reaction)과 같다. 이러한 심리상태는 우리의 의식적 서사의 순조로운 전개가 순간적으로 차단되는 순간이란 점에 주목하자. 즉 그러한 흉폭한 반사작용에는 ‘주어진 역사’와 ‘주어진 사회공간’에 대한 맹렬한 거부와 공포, 그리고 과다한 자기애(narcissism)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위반적, 불경적 행위는 단지 그러한 반사작용일때만 그 의미가 있다. 반사작용은 몸의 가장 직접적이고 ‘실제적’이고, 제도화되지 않은 표현이다. 기획되는 위반이나 폭력은 이미 스스로의 한계 내에서 소멸한다.

   여기서 부주의하게 지나쳐서는 안될 점은, 모든 행위가 비디오 프레임의 지독히 갇혀진 듯한 공간 속에서 진행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물론 ‘감옥’과 같은 시각조건이다. 바로 여기서, 감옥같은 비디오 프레임과 그리고 과다하게 포착되어 잘려나간 신체들이 등가화(等價化)하게 되는 현상, 즉 피사체와 영상매체 사이의 ‘수사학적 환유(metonymy)’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신체와 행위는 보여지는 대신 넘쳐나고 폭발하게 된다. 이것은 분명 자기에 대한 ‘포르노’이며, 이러한 포르노를 통해 그 흉폭함과 절망적 자기애를 시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노출해버린다.

   이강우의 사진작업 <곰팡이>는 이상한 질병으로 문드러져 녹아버리는 듯한 징그러운 얼굴의 확대된 모습을 보여준다. 과거 다른 작업에서 발견되었던 설명적 요소는 사라졌다. 절반씩 나뉘어 고통스럽게 조합된 듯한 그 여자의 얼굴은 그저 눈을 감거나 부릅뜨고 있다. 그러한 징그러운 얼굴은 과거의 휴머니즘적 형상미술에서 자주 그려지곤 했던 ‘절망적, 염세적, 혹은 실존적 위기 속의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그 규모를 통해서, 그리고 두눈의 위협적인 부름뜸을 통해서, 이를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의 모든 영역을 점령해버린다. 그 질병적 얼굴이 징그러워서가 아니라 그 유령적 엄습의 속도 자체에 놀란다. 내가 전율했을 때 그것은 이미 기억으로 변해 나의 뇌리 깊은 곳에서 잠재하기 시작한다. 괴물은 바로 그렇게 출몰한다.

   최우람의 설치작업 는 실제의 담쟁이 넝쿨을 ‘기이하게(uncanny)’하게 변조시킨 것이다. 뒤에 숨겨져 있는 몇개의 모터장치에 의해 삐걱거리며 숨을 쉬는 그 넝쿨은 생물학적 신체와 기계가 사이보그(cyborg)적으로 접합된 혼성물이다. 그러한 혼성적 접합을 가로지르는 선, 이 선 위에는 ‘종’의 숙명으로부터 이탈한 변질의 쾌감이 발생하고 있다.

   공성훈과 최지안에 있어서는 현실세계에 이상한 구멍이 생긴 것 같다. 최지안의 회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연작에서는 흔히 ‘몽상적’이라고 묘사하는 회화들이 그러하듯, 등장인물과 풍경 사이의 상호침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회화적’ 기법이 아니라, 상이한 두가지 공간들과 시점들의 공존으로서 나타난다. 그리하여 마치 거울을 사이에 두고 출입이 가능한 두개의 시공간인 것처럼, 서로 시선의 위치를 바꾸어 바라볼 수 있는 이상한 데페이즈망(d?paysement)적 관계가 이루어진다. 물론 두개의 시공간 중 어느 것이 환상이고 현실에 가까운 것인지는 불분명하고 또 중요하지도 않다.

   공성훈의 <비행 II>에 있어서는 그로테스크한 자기변신이 환상의 소재를 이룬다. 도시의 밤하늘 위를 그 만화적으로 접합되고 변신된 신체가 그냥 잠시 날라다닌다. 구태여 굉장한 이야기는 만들지 않는다. 혹자는 이러한 일련의 환상적 작업을 단순히 백일몽이나 자유로움의 표현 정도로 규정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원래 백일몽이고 자유의 추구이다. 그러한 해석에 있어서 사용되는 ‘환상’의 의미는 앞서 말했듯이 ‘하나의 환상(즉 특정한 내용이나 쟝르로서의)’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일련의 환상들의 ‘환상성’, 즉 그 ‘모든 환상들의 작동구조’를 일종의 ‘구멍’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 구멍을 통해서는 모든 것이 가능해지고, 모든 사유의 정합성에 누출이 발생한다. 이 구멍은 환상에 대한 롤랑 바르트의 표현을 빌면, 무엇이든지 대입할 수 있는 ‘Joker카드’와 같은 것이다. 환상이란 오직 자기 홀로 모든Joker패를 들고 현실과 벌이는 게임이다. 그것은 자유라기보다는 조롱이며 함정놓기, 무한한 도주이다.

VI. 위 반

   잔혹, 괴물, 환상, 이 모든 것은 불경한 위반과 동일한 의미론적 차원으로 합류한다. 그것들은 모두 자기 자신의 쟝르적, 존재론적 안정감을 파괴하려 하고, 생산주의적 삶의 완고한 경계를 순간적이나마(혹은 단지 순간 속에서) 찢어발기며, 그에 비형태적인(informe) 침을 뱉어내는 성상모독적 행위이다. 위반이라는 것은 결코 즉자적으로 실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기존하는 완고한 경계를 통해서만이 이루어지고, 다시 새로운 경계를 만들어나가는 지연(遲延)의 작용이다.

   푸코는 그러한 ‘위반된 경계’와 ‘경계의 위반’ 사이의 관계에 대해, “경계와 그것의 위반이 지니는 밀도는 이미 상호간에 빚을 짐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죠르쥬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n)은 이를 다음과 같이 바따이유적으로 바꾸어 시각예술에 적용한다: “형태(forme)와 그것의 위반이 지니는 밀도는 이미 상호간에 빚을 짐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위반을 포함하지 않는 형태, 형태를 포함하지 않는 위반은 없다. 위반은 거부(n?gation)가 아니라, 혼성성의 열림이며, 전락과 숭고함, 무수한 잡념들의 몰려옴이다. 위반의 사상가 죠르쥬 바따이유는 바로 그러한 ‘확고한 형태성’의 지속적인 위반을 통해 비형태적(informe) 세계관으로 나아갔다.

(세계의 형태들이) 아무 것과도 서로 닮지 않았고 ‘비형태적’이라는 것은, 곧 세계가 하나의 거미나 가래침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바따이유는 그러한 의미에서, ‘닮지 않음’, ‘아무 것과도 유사하지 않음’과 같은 표현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차이는 절대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형태와 형태의 위반을 동시에 드러내기 위한 표현으로서 그는, 거미, 가래침, 뿌리, 부패한 음식물, 불타버린 찌꺼기 등과 같은 표현을 선호하고 이들을 ‘위반적 유사성(ressemblances transgressives)’으로 규정했다. 어떤 ‘비형태성’을 찾는다는 것은 ‘비형태’ 자체를 찾는 것이 아니라, ‘출산’이나 ‘고뇌’ 같은 ‘형태 자신의 작업’이며, 이를 통해 무언가가 찢어지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파열의 과정이다. 비형태적 위반 혹은 위반적 비형태성이란 바로 그러한 ‘유사성과 동질성 속에서의 잔혹함’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속에서 초월하고 죽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불경스런 ‘스캔들’이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푸코가 말하는 ‘비 실증적 긍정(affirmation non positive)’이 성립하며, 이것은 위반과 불경성, 비형태성을, ‘변증법적 부정’으로부터 근원적으로 구별해준다. 그것은 전혀 비생산적인 긍정이며, 그것이 바로 위반의 가치, 위반의 무력함, 그것이 지닌 죄의식의 기원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금지의 두 얼굴이다. 공포는 매혹, 즉 위반의 욕망을 의미하며, 불경함은 바로 금지와 성스러움을 향한 욕망이다. “만일 나의 죄에 대해 말하기를 멈춘다면 그것은 나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 결핍됨을 의미”하며, 죄를 지었다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존재방식이 된다. 이러한 질곡 내에서 예술은 당연히 고뇌라고 하는 부분을 선택하는 수 밖에 없다. 예술은 그 고뇌를 감추려하기보다는 그것이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미 “모든 길은 우리의 공포의 대상에 가장 가까이 인도하도록 마련되어 있다.” 불경함은 바로 그 ‘공포와의 대화’이다…

* 박승호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6-26 00:33) This study assesses the essay writing help in eduessayhelper.org extent to which a change agent role forms part of the personnel

도착과 독창 사이에서 -미술과 다형도착 polymorphism-

도착과 독창 사이에서 -미술과 다형도착 polymorphism-

이선영(미술평론가)

1.도착,’끝까지 가보는 것.’

   현대미술이 진보주의를 가장한 퇴행성의 면모를 띄고 있다는 것이 현대미술에 대한 적대자들의 주장이다.그러나 예술은 상식의 독재 아래 억눌린 다양한 감수성을 간헐적으로 분출시키면서,우리의 새로운 ‘성감대’를 일깨워 왔다.현대에 와서는 상품 역시 그 길을 따른다.예술의 확장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반드시 새로이 발견된(또는 재발굴된) 인간의 감성이 있다.이 글은 다형도착을 살펴봄으로서,미술의 색다른 면모를 읽어 보고자 한다.

   프로이트는 [성욕에 대한 세편의 에세이]에서 성적 호기심이 만일 그 관심이 생식기에서 몸 전체로 돌려질 수 있다면,예술의 방향으로 전환(승화)될 수 있다고 하였다.그는 [문명 속의 불만]에서도 최초의 성적 대상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승화라고 하였다.여기에서 승화란 생식기 이외의 것으로 성욕 확산되는 것,성욕이 배출구를 찾아 다른 분야에 이용되는 것을 말한다.그런데 그러한 과정은 성적인 차원에서 보면,바로 (다형)도착인 것이다.

   따라서 예술의 특수성,즉 그것의 이질성과 다양성에는 (성적)도착이 깔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프로이트는 [문명 속의 불만]에서 미와 매력은 원래 성적 대상의 속성이라고 말한 바 있다.그러나 성기를 보는 것은 언제나 자극적이지만,성기 자체는 아름답다고 평가될 때가 거의 없다고 덧붙였다.언제나 중심보다는 ‘비어 있는 중심’을 향한 주변적인 것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문명 속의 불만]에서 언급했듯이 예술은 문화적 요구에 따라 우리가 오래 전에 단념했지만,아직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욕망에 대한 대리만족을 제공하고,따라서 문명을 위해 욕망을 희생한 사람의 불만을 달래기에 적합한 것이다.예술은 늘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자연 및 문명으로부터 이탈되어 가는 이상성anomaly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도착이 이상이라면 ‘정상적인’ 성은 어떤 것일까? 우리의 정상적인 성은 자연적으로 자명한 것이라기 보다는 사회화된 것,보다 부정적으로 보자면 길들여진 것이자,억압의 산물이기도 하다.극단적으로 억압된 사람은 충동적이고 강압적으로 섹스를 한다.조지 레오나드는 이러한 행위를 일종의 반사적 경련에 불과하다고 하며,이것을 핫hot 섹스라고 말한다.이것은 남성과 여성을 인위적으로 각각의 엄격한 역할에 묶어 두는 것으로,포르노 잡지에 음부와 유방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는 섹스 오브제로서의 여성과 풍선같은 근육을 가진 건장한 남자가 상징하는 바와 같다.핫섹스는 성의 대상을 소유하고 정복하는 것이 목적이다.그것은 배타성에 기초하는 가부장적 사회의 유물이자,이원론적인 편협함의 산물이다.그러나 마샬 맥루한은 미래의 성이 훨씬 다양하고 인간 생활 전체와 감각 전부를 동원하는 것(cool sex)이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맥루한이 말하는 쿨섹스는 확대된 성감대와 관계된다는 점에서 도착perversion과 연결된다.

   성도착에 대해 고전적인 정의를 내린 이는 프로이트이다.프로이트는 [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에서 성욕도착은 해부학적인 의미로 성적인 결합을 위해 마련된 신체 부분들(남녀의 생식기)의 범위를 넘어서는 확장된 성행위이며,’정상적’인 성목적에 이르는 예비과정이 아니라 그자체로 성목적을 대신할 경우에는 성욕도착이 된다고 설명한다.그것은 유아기의 예비적인 성적 대상에 고착된 나머지,생식 기능의 우위가 확립되지 못한 경우를 말한다.프로이트는 성대상 도착자들에게서는 성본능의 저하와 기관의 가벼운 해부학적 위축도 관찰된다고 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도착을 꼭 병적인 것으로 간주한 것은 아니다.그는 [문명 속의 불만]에서 정상적인 성욕과 비정상적인 성도착의 관계는 양화와 음화와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하였으며,성인이 반드시 이성만을 성적 대상으로 선택해야 하고,성기를 사용하지 않는 성적 만족을성도착이라고 하여 금지하는 것은 억압이라고 보았다.프로이트는 [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에서 성욕도착의 부정은 신경증을 낳는다고 주장하였다.

   제프리 윅스는 그의 저서 [섹슈얼리티,성의 정치]에서 ‘도착적’이란 ‘적절하고 올바른 것으로 부터의 벗어남’이란 의미를 가지고,두번째로는 다양성,즉 차이와 연결되어 있으며,’다양한 조건’이라는 의미라고 한다.그는 또한 도착이라는 말이 늘 강한 도덕적 어조를 띄고 있어 상궤로부터의 이탈,혹은 오도된 것에의 탐닉이란 의미를 띈다고 지적한다.그는 성적 소수를 옹호하면서,도착의 병적인 면보다 다양성을 부각시키려고 한다.

   그런데 도착이란 어떤 구체적인 실체가 아니라,관계성의 문제이다.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흥분의 기원이 아니라,어떤 대상과 흥분과의 관계라고 말한다.프로이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년기의 기억]에서 도착적인 특이성은 실제의 행위가 아니라,느끼는 방식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였다.바타이유도 [에로티즘의 역사]에서 불이나 피가 있듯이 외설이 있는 것은 아니며,다만 수치를 느끼게 하는 행위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그것은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라,사람의 정신 사이의 관계인 것이다.들뢰즈에게도 도착증은 주체가 욕망과 관련하여 자신을 위치시키는 특수한 방식이다.그에 의하면 도착증 환자는 욕망의 구조가 매우 뚜렷하게 드러나고,또한 쾌락원칙을 넘어 한계까지 밀고 나가려는 사람이며,할 수 있는데 까지 향락의 길을 따라가 보려는 사람이다.

   도착은 유아 시절에는 누구나 있는 것이다.프로이트는 유아 섹슈얼리티의 다형성polymorphous을 지적하였는데,그것은 섹슈얼리티를 보다 넓게 규정–‘관능과 혼합하는 다양하고 풍부한,다차원적 에너지의 흐름’–하는 것을 말한다.’사물이나 사람들 그리고 육체와 여러 형태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그것은 바로 어린 시절'(미셀 푸코)이다.이러한 다형현상polymorphism을 성인들은 도착행위라고 매도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에서 생식기 부위가 아직 주도적인 역할을 떠맡지 않은 성생활기간을 전(前)성기기라고 정의한다.그는 갓난 아이가 성욕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당시로서는 충격적인 가설을 제시하였다.그에 의하면 유아기에는 성적인 본능이 통합되지 않아 처음에는 대상이 없는 자기성애적 특성을 지닌다.아주 어린 단계에서는 구강 에로티시즘이 지배적이며,이 전성기기의 두번째 단계는 사디즘과 항문 에로티시즘이 우위를 보이고,세번째 단계에 와서야 생식기(남근) 우위가 확립된다고 본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프로이트가 지적하듯이,본래의 생식구조들이 성적 쾌락을 가져다 주는 유일한 신체 기관은 아니라는 것이다.결국 생식기를 생식에 기여하는 최우선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성구조의 최종적인 단계에서나 이루어진다.따라서 정상이 되는데 필요한 성기능 통합이나,생식기 부위가 기질적으로 약한 사람은 도착이 된다.이 경우 사춘기에 일어나야 할 결합은 실패할 수 밖에 없고,성욕의 다른 구성 요소들 중 더 강한 것들이 성욕도착으로 나타난다.그러므로 도착은 어린 시절의 교육 내지 사회화의 실패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어른이 잊어 버린 바로 그 느낌들이 인간의 정신에 가장 깊은 흔적을 남겼고,나중에 모든 발달 과정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그는 [억압,증후,그리고 불안]에서 성인들이 보이는 기묘한 성적 일탈의 원인은,그들이 어린 시절(약 5-6세 무렵)에 느꼈던 이상야릇한 느낌들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성욕에 대한 세편의 에세이]에서도 성적인 금지가 불완전 해서,또는 생식기 체계가 발달하지 못해서 성도착적인 성질을 띨 수 밖에 없는 성적 조짐들,나중에 신경증 환자들과 성욕 도착자들에게서 관찰되는 일탈적 모습의 대부분은 성욕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유아기에 받은 느낌들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한다.단순화시킨다면 도착자는 신경증 환자처럼 성욕이 유아기에 머물러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가설은 신체의 다른 어떤 부분도 성기와 똑같이 자극에 대한 감수성을 획득할 수 있으며,성감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프로이트는 매춘부들의 예를든다.즉 그녀들은 인간 본래의 복합적인,즉 유아적인 소인을 자신들의 직업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한다는 것이다.필자는 여기에 예술가들도 덧붙이고 싶다.그들은 하나의 감각을 극도로 정교화시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상식적인 감각을 넘어서 전감각은 발굴해 내야하고,젖먹던 힘까지도 작업에 쏟아 붓는 존재들이니까 말이다.

   프로이트는 생식기,입,항문,요도 등의 성감대들은 일반적으로 오직 한 부분만 성생활에 이용되며,나머지 부분은 성적인 목적에서 벗어나 다른 목적으로 나아 가는데,이 과정을 승화라고 하였다.’정상적’ 성본능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합쳐진 것이지만,성욕 도착에서는 그 본능이 하나 하나의 구성 요소들로 나뉘어 드러난다.그러한 성감은 분열적이다.동시에 그것은 공감각synthesis이 될 수도 있다.음악을 가시화하려 했던 수많은 현대화가들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프로이트는 [문명 속의 불만]에서 리비도가 지니는 다양한 채널들은 맨처음부터 서로 관통하는 파이프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정신분석가인 프로이트가 도착을 매춘부의 성행위와 비교한 바와 달리,도착을 보다 긍정적인 것으로 본 이들은 바로 성과학자들이었다.앙드레 바쟁에 의하면 정신분석가와 비교해 성과학자들은 보다 ‘기능적’이어서,무엇보다도 오르가슴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다.성과학자들은 성공적인 오르가슴을 위해 환자들로 하여금 갖가지 육체적 테크닉,다소 ‘변태적인’ 행위를 권유하기도 한다.’독약’을 적합한 시기에 적당하게 복용하면 그것은 성적 장애를 치료하는 유사요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성과학자들은 ‘변태’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예전의 변태성욕들은 다양한 테크닉의 변이형으로 간주되며,관대히 볼 수도 있는 소수의 취향을 의미하게 된다.오히려 성적 기능장애가 더 심각한 문제로 간주된다.성과학자들은 오르가슴의 ‘의무’를 강조하는데,이런 의무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성적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지속시킬 것을 전제로 한다.결국 ‘동물기계론적인’ 성의 엔지니어들(성과학자들)은 남성,여성,동물,페티시즘,흥분제,기구들의 다양한 (성적)촉진제들을 기능적으로 대등하며 대체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보다 원활한 오르가슴을 위하여 성과학자들이 열어 놓은 방법이 치유기술로서 보편화 되면서,무한한 인류의 (성적)유물들도 재해석 되었다.

   고고학자인 티모시 테일러에 의하면 5000년 전의 원시 시대에도 현대인처럼 동성애,성도착,복장도착등 여러 가지 육체적 쾌락을 즐겼다고 한다.시베리아 동부의 바위에 새겨진 석기시대의 그림은 사슴과 성교를 시도하는 남자를 묘사하며,빙하기에 유라시아에서 만들어진 돌비너스는 대초원의 가학피학성 변태성욕을 보여준다.돌비너스의 몸을 묶는 모피 끈은 성적인 부분을 강조하며,몸의 자세와 묶인 손목은 복종과 저항불능을 나타낸다.그러나 다양한 변태적 성행위들은 기독교가 지배하기 시작하자 지하로 숨어 들었고,빅토리아 여왕시대에는 피아노 다리조차 에로틱하다고 덮개를 씌운 ‘도착적인’ 성윤리의 시대를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억압이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프로이트는 [무의식에 관하여]에서 억압의 본질은 어떤 것을 의식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하여,의식과 거리를 두게 하는데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그는 [문명 속의 불만]에서도 타고난 소질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고결한 마음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은 모두 신경증 환자가 된다고 하였다.프로이트가 내린 결론은 놀랍게도 도착이 병적이거나 부도덕한 소수 집단의 특성이 아니라,인간 모두에게 내재해 있는 공통된 속성이라는 것이다.티모시 테일러도 처음에는 도착으로 여겨졌던 행위들이 실은 보편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됨에 따라,’비정상’이라고 불리워 졌고,나중에는 보다 긍정적인 용어인 ‘다양성’이 되었다고 말한다.그것은 단순히 용어의 ‘진화’를 넘어 선다.이러한 변화 과정은 나름의 ‘과학적인’ 근거도 있다.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숫컷이 암컷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유전자의 확산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인류의 진화는 다윈식의 적자생존 법칙뿐 아니라 성적 선택의 원칙에 의해서도 이루어진 것이다.티모시 테일러에 의하면 인간의 털이 없어지는 알몸으로의 진화는 성적 신호가 되는 음부가 가려진 것에 대한 보상이다.따라서 단지 인간의 털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음부가 확장된 것이 알몸이다.즉 인간에겐 다른동물과는 달리 몸전체가 ‘생식기’가 된 것이다.모든 것을 전문적으로 나누기 좋아하는 현대인이 그것을 도착이라고 불렀을 뿐이다.

   제프리 윅스에 의하면 프로이트에게 있어 유아기에서 성인의 성으로 성장하는 것은 원시적인 난교 및 도착에서 일부일처제적 이성애로 변화해 가는 전체 종(種)의 가설적 발전을 반복하는 것이었다.프로이트는 각 개체가 인류의 진화과정(계통발생)을 반복한다고 하였는데,성적인 진화는 자가수정에서 양성애를 거쳐 이성애의 단계로 발전한다고 하였다.신생아는 미개사회에서 문명사회로 발전하는 사회적 진화 과정을 반복하며,여기에서 실패하는 극소수는 성도착자나 정신질환자가 된다는 주장이다.그러나 여기에서도 그것은 꼭 부정적인 의미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프로이트는 문명의 억압이 신경증을 낳는다고 비판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프로이트의 고착과 퇴행의 중심 개념이 조프루아의 기형학(정지된 발달과 퇴행)에서 유래한다고 지적하였다.조프루아는 직접적인 변형에 의한 진화를 부정하고,단지 가능한 유형이나 형태의 계층들 속에서 발달이 초기단계에서 멈추어 지거나 ‘퇴행’이 다소 심하게 나타난다고 보았다.

2.억압된 감각들과 관계들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사랑의 다원주의는 사랑 받는 사람들의 다수성 뿐 아니라,그 사람들 각각의 안에 있는 세계,혹은 영혼의 다수성과도 관련된다고 말한다.그는 정신분석학자 가타리와 함께 쓴 [앙티외디푸스]에서 무한한 성,즉 ‘정신분열증적’인 성을 분석한다.난해하지만 현대의 문화비평에도 큰 영향을 준 그 책은 제목이 암시하듯이 프로이트의 성적 구조 개념을 해체하려 한다.

   생산력과 마찬가지로 성은 실제적으로 한계가 없는 것(보드리야르)이다.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사랑이란 그 대상에 대해서도 또 욕망이나 충동의 원천과 목표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이러한 분자(分子)적 성(무의식)은 거세를 모르며,부분적 대상들은 아무 것도 결여하지 않고,자유로운 다양성을 형성한다.들뢰즈에 의하면 성(性)속에 인간적이지 않은 것이 있으며,성의 혁명이 관심을 갖는 것은 대상도 목표도 원천도 아니라,오직 형태 즉 기계적 지표들뿐이라고 한다.욕망과 무의식의 문제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아니고,그것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즉 사용의 문제)이다.

   도착의 종류만큼 다양한 것도 없을 것이다.어떤 이는 도착의 종류를 나열하는 것처럼 지루한 일도 없다고 하였다.호분증coprophilia(똥에 흥미를 느끼고 성적으로 흥분하는 것),호뇨증urophilia,불결기호증mysophilia,방화광pyromania,시간증necrophilia,노인애gerontophilia 등등.

   도착 중에서도 특히 배설물에 대한 성욕은 가장 이해하기가 힘든 항목이다.티모 에이락시넨은 사드에 관한 한 저서에서 ‘사람들은 단순한 사물이다.그들은 피,땀,그리고 눈물을 만드는 기계장치’라고 과감하게 정의하였다.사드가 보여준 바와 같은 배설적인 성욕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의 [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에도 나와 있다.그에 따르면 아이들이 완전한 배설을 거부하는 것은 여러 차례의 배설을 통해 쾌락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그들이 성장해서도 변을 억제하는 것은 항문 성감대가 강하게 발달되어 있는 특이한 성적 체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프로이트는 성인이 되어서도 항문 성감대를 유지하는 사람이 바로 동성연애자들이라고 말한다.

   성과학자 해블록 앨리스도 신체의 배설물이나 분비물 가운데 지금까지 누군가가 황홀한 성적 쾌감의 원천으로 삼아보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단언하였으며,덧붙여 신체에 대해 행해지거나 신체에 의해 행해질 수 있는 일 가운데,누군가에게 선정적인 자극이나 성적 쾌감을 주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였다.

   사드는 사디즘으로 유명하지만 배설물과의 유희도 마다하지 않았다.티모 에이락시넨은 감옥에서 성에 대한 사드의 필사적인 노력은 배설물이나 정자,시체와 같은 생산물에 대한 지배로 변형되었다고 말한다.그에 의하면 성교는 관통과 방출을 통해 공허에 도달하는 방법인데,다른 사람에게 넘겨줌으로서 육체의 일부를 잃는 과정이다.성교와 똑같은 육체적 결과는 출혈이나 방뇨에 의해서도 성취되며 교환 가능하다.사드처럼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도 아닌데,세기 말의 현대예술가들도 오줌,똥은 물론 피,젖 심지어 정액까지 예술적 재료로 사용하고,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그것은 단지 ‘비천함abjection’의 미학을 넘어 도착적인 쾌락과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애초에 물감을 짜서 바르거나,찰흙을 주물러대는 행위에는 어떤 성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더구나 현대예술은 무한한(?) 자유를 구가한다는 미명 하에 어떠한 배설적 행동들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배설에 대한 원초적인 성애적 관심은 세월이 흐르면 사라진다.그러는 사이에 어린 시절에 나타나지 않았던 돈에 대한 새로운 관심(프로이트에 의하면 돈은 오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이 떠오르게 된다.어느 환자가 말했듯이 대변막대기는 최초의 페니스를 ,직장의 점막은 음부의 점막을 상징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배설물을 핥거나 시체와 성교하는 것처럼,성본능이 놀랄만큼 수치심과 역겨움,두려움,또는 고통을 야기하는 경우의 예까지 든다.바타이유는 [에로티즘의 역사]에서 성행위를 대상으로 한 금기(禁忌)는 주로 배설물과 관계한다고 말한다.그는 [에로티즘]에서 ‘우리는 똥과 오줌 사이에서 태어난다'(성 어거스틴)는 통렬한 말을 인용한 바 있다.바타이유는 전체적으로 볼 때 오물,부패,그리고 성은 한 부류에 속하며 그것들은 서로 오밀조밀한 곳에 있다고 말한다.그는 [에로티즘의 역사]에서 성과 배설은 어둠 속에 있으며,이 둘은 기관들이 서로 인접해 있고,부분적으로 어느게 어느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원래부터 관련성이 깊다고 하였다.

   실제로 몇편의 포르노그래피를 쓴 적도 있는 바타이유는 [에로티즘]에서 부패에 대한 자신의 혐오감과 외설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공포심은 자신의 욕망의 원칙이라고 고백한다.그는 ‘생명이 더럽게 작용하는 듯한 미지근하게 끈적거리는 물질들’ 보다 인간에게 공포감을 주는 것은 없다고 하면서,부패와 성행위는 마찬가지라고 본다.성(性)에서 성(聖)을 보려한 바타이유의 사상은 역설적이기까지 하다.먼 옛날에는 종교의식이 성적인 사정(射精) 기능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하는데,현대에 와서 성이 비천한 것으로 추락한 것은 프로이트가 [예술과 정신분석]에서 말했듯이,문명이 발달해 감에 따라 종국에는 신(神)과 성(性)에 관계된 많은 것들에서 성(聖)적인 요소가 제거되기에 이르러,힘을 상실한 성(性)은 끝내 경멸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오감 중에서 시각이나 청각은 고상한 예술의 영역에 자리잡을 수 있었지만,후각만은 그렇지 못했다.후각은 가장 원초적인,그래서 동물적인 감각에 속한다.독일의 한 생물학자는 배고픔과 사랑이 모두 후각에 기초한 화학적 프로세스라고 하였으며,놀랍게도 냄새가 ‘혼의 기원’이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다윈도 [종의 기원]에서 동물의 성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후각이 인간의 성생활에도 작용한다고 하였다.

   스티븐 컨은 [육체의 문화사]에서 도착의 지경까지 정밀해진 근대 예술가들의 냄새에 대한 탐닉을 추적한다.위스망스의 소설 [역설]의 주인공인 방탕한 귀족 데 제상트는 진부한 부르조아 생활을 청산하고,자신의 감각 하나 하나를 계통적으로 연구하여,’냄새의 문법과 통사법’을 통달하기를 원했다.그는 자연을 체험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인간의 감각적 즐거움의 극치라는 통념에 대항하였다.위스망스는 자연은 따분한 것이고,창의력 넘치는 인간이 낳은 인공적 감흥만이 심미적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그의 자기탐닉적 관능주의는 도착의 극치로서 충격을 주었고,예술을 위한 예술 및 퇴폐주의의 대변자가 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후각의 세밀한 세계를 묘사했던 작가들이 실제로는 보통사람보다도 후각기능이 처졌다는 사실(스티븐 컨은 에밀 졸라의 예를 든다)이다.우리는 여기에서 예술의 보상 심리적인 기제를 엿볼 수 있다.어쨌든 모든 예술가들은 냄새를 맡는 존재이고 그들의 작품에서는 나름의 향기,냄새가 난다.그것이 원초적인 살의 냄새이든,썩는 냄새이든 표백제나 포르말린의 냄새이든 간에….

   후각처럼 억압된 감각이 있었다면,금지된 관계도 있다.동물,동성,근친 등등.점차 더 발달해갈 테크놀로지를 염두에 두면 우리는 여기에다 기계를 첨가할 수도 있다.

   자크 솔레는 [성애의 사회사]에서 수간(獸姦)이 실제로 있었다고 지적한다.그것은 예로부터 성적인 난잡함이나 악마의 유혹과 싸우는 신화나 종교 활동의 일부였다.티치아노에서 프라고나르에 이르는 서구의 화가들은 사티로스에게 몸을 바친 여자들을 그리곤 하였다.예컨대 비너스의 새인 백조와의 수간을 신성시하는 소재로 한 그림(Leda)은 서양미술사에서 매우 흔하다.미켈란젤로도 동물의 형태를 통해 욕망의 마력과 황홀경을 추구했으며,근대에 와서도 고전을 소재로 하는 화가들은 요사스런 동물들에게 둘러싸인 여자의 성을 많이 그렸다.

   그러나 루시 스미스는 [서양미술의 섹슈얼리티]에서 인간과 동물의 결합은 실제가 아니라,상징적 결합을 나타낸 것이라고 지적한다.절반은 인간이고 절반은 동물인 반인반수같은 괴물들은 인간의 동물적 욕망을 구체화 하고,[레다]에서 백조의 몸체와 긴 목으로 성기와 고환을 공공연하게 암시한다.루시 스미스는 이런 그림들에 대해 항상 짐승과 짝이 되는 것은 여성이며,이는 여성을 향한 사디즘적인 충동을 표현한다고 비판한다.

   단지 미술상의 소재가 아니라,예술창작의 근본적 동인이 되곤했던,성적 관계로 동성애를 들 수가 있다.동성애는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여겨지기도 한다.앙드레 지드와 오스카 와일드같은 작가는 자신의 수치심을 극복하고,동성애 충동을 심미적 우월성의 징표로 간주 하였다.동성애 때문에 감옥에서 [옥중기]를 써야했던 오스카 와일드는 1890년대에 걸쳐 문단의 총아로서 다채롭고 현란한 유미생활을 시작하면서 바닥을 모르는 관능과 완벽한 해방과 탐미를 추구하였다.

   오스카 와일드는 [옥중기]에서 ‘단 것은 달고 쓴 것은 쓰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욕망은 필연적으로 쾌락을 향해 있다’고 썼으며,’인간은 생명이 있는 한 그것만을 맛보려고 한다’고 하면서,’영혼의 정화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시도해서 안되는 육체의 퇴폐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그는 후에 다소 의기소침해 하면서 ‘사유의 세계에서 나를 차지하던 역설이 정열의 세계에서는 도착이 나를 차지했다’고 약간 반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지상주의자였던 오스카 와일드는 같은 책에서 근대예술의 세계에서는 이제 전형이라는 것을 탈피하여 예외–‘나는 법칙을 위해서가 아니라,법칙의 예외를 위해서 만들어진 사람이다’–를 추구하자고 주장한다.보들레르나 위스망스도 암시하듯이,근대예술은 자연과 대립하는 인공성을 추구하면서 예술 역시 극도의 작위성을 띤다.그것이 예술지상주의처럼 문화종교의 탈을 썼든,형식주의처럼 유사(類似)과학주의의 색채를 띄었던 간에 말이다.

   스티븐 컨은 오스카 와일드의 추문이 알려주는 것은,인간의 육체가 여러 가지 다양한 성적 자극을 원하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유성생식이라는 최소한의 요건을 능가한다는 것,육체는 개인의 흥미에 따라 즐길 수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오스카 와일드가 죽은 지 100여년 만에 복권되어 그의 흉상 제막식이 열리던 때,영국 문화장관은 ‘오늘날 우리는 와일드 덕분에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말하였다고 한다.예전의 남색가는 일시적인 탈선자였으나,오늘날에는 하나의 부류로 자리 잡았다.그것은 린 헌트가 말했듯이 점차 젠더 영역이 해체된다는 증후이다.

   프로이트는 동성애는 성적 발전의 중지에 의해서 생겨난 성적 기능의 변형이라고 보았다.동시에 그는 동성애 공포증이 인간이 본래 갖고 있는 동성애 욕망에 대한 은밀한 욕망과 관련되며,성적인 동등성에 대한 공포와도 밀접하다고 본다.특히 프로이트는 레즈비어니즘에 대한 관음증적 관심이 관음자의 거세 공포와 직접 연결된다고 하였다.보통 여성동성애는 남성동성애보다 훨씬 더 추하고 비정상적으로 묘사된다.남성 동성애자들은 동성애를 열렬하게 변호하면서도 여성의 동성애는 무시했고,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한다.린다 노클린는 [페미니즘 미술사]에서 쿠르베의 [수면]의 예를 들면서,여성 동성애자들을 주제로한 미술의 관중으로 고려된 것은 언제나 남성들임을 지적한다.여성동성애는 오늘날 너저분한 포르노 잡지에서도 단골 메뉴가 되고 있다.

3.예술작품,그 도착적인 정밀함과 다양성

   프로이트는 [문명 속의 불만]에서 실제로 성도착자는 문화적 승화에 유난히 적합한 본능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보며,[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에서도 예술적 소질이 있는 개인의 성격을 분석해 보면,성욕도착 그리고 신경증의 모든 부분이 혼합되어 나타난다고 한다.그는 이 책에서 성적 본능의 구성요소들이 보다 폭넓게 승화되면서 문화의 업적이 가능했다고 본다.한편 프로이트의 계승자이자 비판가였던 빌헬름 라이히는 만족된 성은 문화를 촉진시키고,만족되지 않은 성은 문화의 성취를 억제할 뿐이라고 한다.즉 라이히는 프로이트처럼 문화가 성충동을 다른 곳으로 승화시켜 이룩된 것이 아니라,충족된 성충동이 왜곡되지 않고 이전된 것이라고 본다.

   물론 예술작품은 질병이나 욕망,광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직접적인 증거,즉 증상은 아니다.들뢰즈는 마조히즘을 연구한 책,[냉정함과 잔인성]에서 ‘증상’은 질병의 존재를 보여주는 일종의 특별한 기호이며,’증후군’은 다양한 문맥과 서로 다른 출처에서 기원한 현상들의 집합장소 또는 교차점을 의미한다고 본다.그리고 예술 작품에서는 단순히 병의 증상이 아니라, 증후군이 중요한 문제라고 한다.우리는 예술에서 도착의 증상이 아니라,들뢰즈가 말한 증후군을 읽어내야 할 것이다.

   현대 철학의 주도적인 흐름인 후기 구조주의적 사유는 성도 해체함으로서 다형도착을 보다 긍정적으로 본다.성 역시 결정적 구별 상태에서 불확정성으로 이행한다.장 보드리야르는 [사물의 체계]에서 성도착을 탈구조화한 사물이라고 말한 바 있다.프로이트의 성적구조를 해체하고자 하는 보드리야르는 [섹스의 황도]에서, 프로이트에겐 유일한 성욕과 리비도만이 있다고 비판한다.그것은 바로 남성의 성욕이라는 것이다.그러한 (남성적)성욕은 식별가능한 견고한 구조이며,남근과 거세,아버지의 이름과 억압에 집중되는 것이다.(남/녀의)대립자체가 본질적으로 남성적인 것이고 성적인 궁극성을 지닌다.그러나 구조가 와해될 때는 더 이상 남성도 여성도 없게 되며,’유혹’이 탄생한다.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유혹은 욕망의 무한한 잠재성을 가진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여성의 특수성은 성적 쾌감을 여러 부위에서 감지 할 수 있다는데 있다.’그녀’의 쾌락은 전 육체적으로 분산되어 있고,다면성을 띈다.즉 그가 보기에 (남/녀가 분리불가능한) ‘여성적’인 것이 바로 유혹이며,도착적인 것이다.보드리야르는 (여성적)유혹만이 남근적 구조를 와해시키며, ‘운명으로서의 해부학’에 철저히 대립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유혹은 가상에 속하며,실재와 존재의 힘에 대항한다.유혹은 섹스의 목적을 불확실하게 하여 쾌락을 더욱 증가시킨다.(도착이라는 말에는 ‘질질 끄는’이란 의미도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유혹은 놀이이고 섹스는 기능이기 때문이다.여기에서 유혹은 의례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고,섹스와 욕망은 자연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유혹은 그자체가 성의 기준을 깨뜨리는 형태이며,놀이와 도전의 공간,즉 열정과 기호 차원의 작용이다.유혹의 규칙은 부단히 이루어지는 의례적 교환으로서,거기에서는 유혹하는 사람이나 유혹당하는 사람의 놀이가 결코 끝나지 않는다.반면에 성적인 것은 절박하고 평범한 종결을 맞는다.욕망을 성취한데서 오는 즉각적인 형태인 쾌락을 얻게 될 뿐이다.이상이 보드리야르의 유혹에 관한 가설인데,요점은 그가 ‘남성적’인 성욕을 해체하고 무제한적인 성적 요구,즉 쾌락의 무제한적인 요구를 옹호한다는 것이다.보드리야르에 의하면 남성의 성의 표지는 예전에 발기성과 수직성,상승,성장,생산의 모든 도식을 유지하다가,오늘날에 와서는 사라지고 있다.한편 매혹은 불확정적인 것,끊임없이 변동하고 겉잡을 수 없는 성욕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연적인’ 성은 물론 유기체 마저도 해체하려고 한다.그들은 [앙티외디푸스]에서 도착자란 인위적인 것을 진정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들뢰즈는 ‘기관없는 신체’, ‘욕망하는 기계’등의 낯선 신조어를 통해 다형적–그의 용어로는 정신분열증적–성을 옹호한다.그는 이 책에서 억압적인 자본주의적 사회조직체와 반대되는 것은 ‘기관 없는 신체’,즉 ‘욕망의 탈코드화 한 흐름들이 흐르는 광야’라고 묘사한다.

   ‘기관들 없는 신체’의 개념은 들뢰즈가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묘사한 거미의 생태와도 같다.;즉 ‘거미는 거미줄 꼭대기에 올라 앉아서 강도 높은 파장을 타고 그의 몸에 전해지는 미소한 진동을 감지할 뿐이다.눈도 코도 입도 없는 이 거미는 오직 기호에 대해서만 응답한다.이 기호들은 파장처럼 거미의 신체를 관통하고,먹이에게로 덤벼들게 만든다.거미줄과 거미,거미줄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기계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앙티 외디푸스]에서 ‘기관들 없는 신체’ 위의 욕망을 유일의 주체로 삼는다.들뢰즈는 사물도 정신도 부정하며,오직 육체만을,의미가 아니라 오직 사용들과 작동들만을 긍정하였다.유기체가 아니라,’조직되지 않은 것’,즉 신체와 기관들의 욕망을 중시하는 것이다.여기서 (도착적 쾌락의 대상이라 할 수 있는)’부분적 대상들’은 ‘기관들 없는 신체’의 직접적인 힘들이다.’성감대는 유기체의 한 단편이 아니라,개체 이전의 또 인물 이전의 단일체들의 분포 상태이다’.(르 끌래르) 들뢰즈에 의하면 그것은 ‘분산되고 무정부적인 순수한 다양성이요,통일도 전체성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큰 덩어리를 이루는 유기체와의 대립하는,기관들 없는 충만한 신체는 비생산적인 것,불모의 것,태어나지 않은 것,소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 역시 성적 다양성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그는 [문명 속의 불안]에서 문명이 성생활의 기준을 정해 놓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행실을 요구하는 것은 사회적 불공평의 사례라고 비판한다.어떤 사람은 타고난 체질 덕택에 아무 어려움 없이 그 기준에 따를 수 있지만,어떤 사람들은 심한 정신적,육체적 희생을 강요당하기 때문이다.그는 [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에서 인간은 인간의 모습을 거의 무한정 다양한 방식으로 인지한다고 하면서 다양성을 긍정한다.다만 프로이트의 계승자이자 비판가들은 성적행태는 성적구조를 가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성적 소수자를 옹호했던 제프리 윅스는 ‘이제 정상성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대륙을 둘러싸고 있는 난잡함이란 군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대신 우리는 서로 끊임없이 움직이고,각각의 독특한 증식방법과 지리학을 지닌 크고 작은 섬들의 군집체를 마주하고 있다’…..’결국 정체성이란 어떤 형태의 관계이며,그것은 단지 쾌락을 즐기기 위한 게임이나 전략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고 주장했다.

   예술가야 말로 욕망의 다형성을 긍정하는 족속들이다.왜냐하면 프루스트가 말했듯이 예술만이 우리가 헛되이 삶 속에서 찾으려 했던 것,즉 ‘삶에서 여행에서 찾아 다녔지만 찾지 못한 다양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예술의 다양성에는 이와 같은 다형성이 내재되어 있다.특히 모든 금기를 풀어 헤쳐가는 현대 미술가들은 다양한 실험을 통해 감추어져 있던 어두운 신체의 대륙과 이질적인 섹슈얼리티의 무한한 보고를 캐내서 자신의 독창성의 근거로 삼는다.이지점에서 도착과 독창의 구별은 모호해 진다.여기서 독창이란 더 이상 근대적 의미의 진보,주체,새로움에 관련된 바의 ‘독창성’은 아닐 것이다.차라리 그것은 ‘억압된 것들의 복귀’,타자성에의 지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 미술에서 몸이 복귀하고 있다고 한다.그러나 신체는 본래 정체성의 최초의 근원이며,성은 가장 먼저 특권을 부여받는 구역이었다.’성은 삶과 죽음의 유희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주체의 윤리적 형성에서 특권적인 영역을 이룬다'(푸코) 우리의 육체는 변하고 있으며,육체윤리 역시 극도로 상대화 되고 있다.차이를 긍정하자는 것이 오늘날의 ‘절대적’인 윤리이자 미학일 것이다.그자신이 성적 소수자였던 푸코는 ‘우리가 오늘날 견딜 수 없는 것으로 체험하는 모든 것은 다시 평범한 것이 될 것이다’고 강조한 바 있다.현대미술처럼 그 예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다형적 성은 불평등한 관계,특히 폭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오르가슴–그것은 ‘변태적인 것’,즉 상대방을 사물처럼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과는 무관한 것이다.우리는 후자의 예를 현대의 포르노에서 흔하게 볼 수 있으며,일부 물화된 현대미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푸코는 [성의 역사 3권]에서 모든 영적인 유대는 평등한 교환에서 나오는 상호성 위에 기초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욕망의 다형성이란 생산이나 소유,전쟁이 아니라,상징적 교환과 놀이,평화속에서만 가능한 쾌락이 아닐까? 만약에 몸에도 민주주의가 있다면,그것은 우리 스스로를 구성하는 다양한 육체적 경험 형태의 확대,그리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에 기초할 것이다.예술 역시 그 토양 위에서만 진정한 다양성이 가능하리라 본다.

* 박승호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6-26 00:33) http://paper-writer.org/

매체 속에 잠재하는 욕망

매체 속에 잠재하는 욕망

조광석(미술평론가)

   지난 20년간 우리 사회문화 현상에서 나타나듯이 문화적 보수와 급진주의의 거리는 좁혀지는 듯하게 보여지지만, 내부적으로는 상당한 거리감을 아직도 지니고 있다. 우리가 과거에 지니고 있던 자연환경이 도시화, 대중화를 통한 문화환경의 조성은 그 변화가 아주 빠르게 진행되면서 자연 혼란스럽고 불투명하게 나타나고있다. 또한 서구의 다른 나라들과 다른 전통문화를 지닌 우리가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급진적으로 전환되면서 본래의 가치관을 보존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여있다. 결국은 우리 사회가 자유경제 체제 아래서 새로운 경제력을 지닌 자들에 의해 주도될 것이며,새로운 세대의 의식 구조에 의해 변화될 것이다. 더구나 대중 매체를 핵심으로 하는 최근의 문화는 이전까지 유지되어 왔던 예술경험방식을 바꾸게 만들고 있다. 새로운 세대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자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게되고, 자신에게 최대한의 만족을 줄 매체를 선호한다. 이는 현실적 문화현상에서 흔하게 경험할 수 있는 실체이면서 우리 스스로가 그곳을 빠져 나오지 못하는 모순이다.

   소비를 목적으로 한, 즉 재화의 효용을 소멸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이러저러한 특정매체와 그것이 전파하는 이미지에 대한 소비욕구는 가치체계의 변화를 이루게되고 이제까지 예술작품이 누려왔던 인위적 가치를 소비하게된다.

  매체는 사물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으며 인위적 인식에서부터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초기단계의 사물에 대한 가치는 인식소와 상관없는 유용성과 연결되었다. 그것은 대상으로서 욕구와 관련을 가짐으로써 인식적 서열을 부여받게 되고 매체로 진화하게 된다.

작품의 탈신비화

   “오늘날 우리의 주위에는 사물, 서비스 및 물적 재화의 증가에 의해 이루어진 소비와 풍부함이라는 상당히 자명한 사실이 존재하는 데, 이것은 인류의 생태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풍요롭게 된 인간들은 지금까지의 어느 시대에도 그러했던 바와 같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사물’이 경제사회의 산물로 평가될 때 다양한 인식의 변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현대사회에서 점점 더 풍요해지는 물질적 욕구만큼이나 가속화된 경제발전, 사회변동의 결과 주체 스스로가 존재에 대한 장악력을 크게 하려 시도하게된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는 주체와 사물사이에서 주체가 추구하는 욕망의 중심이 사물로 옮기게 되는 역전의 결과를 보게된다. 주체의 욕망에 의해 사물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지닌 매력이 그것을 주관하는 주체의 사유를 지배하는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말한다. 예술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미에 대한 욕망이 서서히 호사스럽고 풍부한 것으로 전환되어지면서 작품을 질료화시키고 교환가치로 평가하게 되는 과정은 스스로 예술작품의 탈신비화를 초래한다.

    예술은 유토피아에 대한 공상적 비전을 지니고 있었으나, 이와 같은 물화의 과정에서 스스로의 꿈이 사라지게 만들고있다. 또한 예술작품의 수용은 미적 태도와 관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미학자들의 주장에서 나타나듯이 철학적 전제를 포기하고 있다. 예술작품은 이상적인 사용가치를 벗어 버리고 시장조건과 유행에 적응하는 ‘교환’가치를 수용하게 되어 의사소통보다는 가치평가가 가능하고 편리한 재화의 소유를 기대한다. 많은 사람의 관심은 미학으로부터 벗어나서 품위와 위신을 위해 수집을 하게되고 대상에 대해 무언가 실질적인 대가를 찾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적어도 개별적 특징을 음미할 수 있는 작품을 구사하지만 결국 수용에서는 다른 목적을 보이게 되고 육체로 체험할 수 있는 질료적 풍요는 탈신비화를 지속시키게 된다. 따라서 작가에 입장에서는 항상 주관적 사유를 동반하는 것에 대한 부담과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현실 사회에 실천적 활동으로서 작가가 취할 수 있는 것은 비판적 테제로서 그와 같은 ‘탈신비화’를 수용하게된다.

   직접적이며 비언표적이며 아무런 힘이 없던 사물자체가 의미구성체인 언어행위로서 매체가 된다. 사물은 풍요한 사회의 핵심에서 나타나게 된다. 사물은 사실이며 사물에 대한 제시자의 의도와 수용에 관해서는 수용자의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물에 의한 의미구성의 시도는 전통적으로 추구되어온 진리에 대한 假想이 와해되고 새로운 사유로 해방의 계기가 된다. 즉 사물에 대한 미메시스적 계기와 합리적 계기가 교체됨으로써 가상을 통한 정신의 위선적 도피를 파괴한다. 미메시스에서 간직하고 있던 진리에 대한 신화적 지식에의 집착이 약화되고 현실체험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는 스스로 해체하게 된다. 이제 사물은 실질적 만족감을 제공하고 항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개연성과 욕망을 충족시키는 경제적 가치로 정신을 지배하게된다. 이는 유토피아가 미래에 전개될 것이라는 기대보다는 지금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토피아의 실제성이 확산되는 현상은 사물이 매체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제작되지 않고 선택되어지는 것 Ready-Made의 사용은 작품에 대한 구조적 변화를 만들고 있다. 이제가지 작품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은 작가의 섬세한 손길에서 이루어지는 고유의 제작 방식과 그것을 다른 사람이 재현할 수 없다는 특수성으로 평가되어 왔었다. 따라서 작가 의도가 작품 내용의 해석에 따라 간접적으로 수용되는 암시적 제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상황이 된다. 작품들이 가치를 지니고있었던 것은 그것들이 기호로서 무한한 기의의 연쇄작용을 수용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호의 기능은 의미를 항상 불러내는 힘을 지니고있었으며, 그 작용은 항상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기호자신과 다른 기호와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주술적 행위처럼 자신이 만든 주문을 통해 스스로 변화와 역사를 제시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작품처럼 소통의 담론을 전제로 하여 스스로를 감추기도 한다. 사물에서 하나의 질서가 이루어지고 담론으로 혹은 담론에서 질서로 옮겨가면서 그것들을 위계화 한다. 그 질서는 사물과 작품 사이에 이어지는 상황과의 닮음이라는 체계를 말한다. 마그리트의 구체적인 형상이나, 클레의 기호들, 칸딘스키의 색채에서도 닮음을 전제로 한 질서가 있다. 그것이 단순한 재현이라는 의미와 함께 유추를 통해 기의로 미끄러진다. 현대적 기술이 무미건조하지만 유용한 형태로서 생기를 찾게되는 계기는 커뮤니케이션, 즉 접촉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소비사회를 특징짓는 의식의 부재가 아니라, 라디오의 쓸데없는 농담이나 퀴즈 프로그램도 교회의 미사나 미개사회의 번제와 마찬가지로 의식 중에 하나를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단적수용(communion)은 의식이 더 이상 종교처럼 상징을 통해서가 아니라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기술적 매체를 통해 분배되는 것은 더 이상 하나의 문화-살아있는 물체 집단의 현존, 지식도 아니다. 기호와 그것을 준거하는 희미한 기억과 지적 신호체계의 미묘한 집합체가 된다. 그것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어들임으로써 소비가 되고 경제적 효용이 나타난다. 근래에 두드러진 설치와 테크놀로지-아트는 그러한 질서가 역전되고 있다. 그것들은 사물들 가운데서 파생된 기호들이면서 그 기호가 우리의 사유를 지배하는 상황을 말한다. 새로운 기술은 우리의 사유 밖으로 빠져 나가고 있으며 우리는 주체를 못한 채 뒤쫓고 있는 실정이다. 그 유행은 우리 사회의 관심사를 잘 반영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이러한 현대 미술에서 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 기계화와 전자 정보 기술의 확장된 인식은 이미 20세기 초에 시작된 ‘미래파’의 기술에 대한 예찬과 순교자적인 예술의 죽음을 예견하는 ‘다다’와 무관하지 않다. 사진기와 영화와 같은 이미지 재생기술의 확산은 미술에서 간직하고 있던 숭고와 같은 엘리트적 전망을 볼거리로 진화시킨다. 또한 볼거리는 계속 볼거리를 요구하게 된다. 이제 시각 예술의 범위를 확장시킬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미술에 이러한 새로운 시각적 테크닉의 대중적, 총체적 도입은 대중과 좀더 가깝게 서게 된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출현과 물질적 풍요와 함께 나타난다. 그것은 사실과 시대성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갖고 있는, Ready-Made의 일상성을 통해 잘 확인된다. Ready-Made에서 ‘일상의 신화’들은 소비 사회문화와 Mass media, 기계 기술의 환상적 기대와 반항의 이중적 욕구와 함께 작품화되어 진다. 조금 더 구체적이며, 조금 더 사실적인 표현 방법으로 일상적인 사물(Object) 자체가 작품으로 직접 등장하게 되고, 작가들은 일상적인 사물(Object)들의 사용을 통해 현실과 대립하고 경제적인 사회에 대한 비판성을 나타내며, 다른 면으로서는 풍요의 확인을 통해 초현실적 과제-유토피아도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Ready-Made의 사용은 우리 삶의 일부가 과거의 미술 표현을 대신하면서 요즈음에 이르러서 더욱더 포괄적인 의미로서 사회 참여를 추구하고 있다. 새로운 미술은 그 영역을 점차 확산하여 모든 장르를 초월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아트가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기술 지상주의는 엘리트주의 미술을 나약하고 쇠약한 문화로 전락시킨다. 후기 산업사회의 특성으로서 등장한 Ready-Made는 이제 혼성모방을 넘어서 포식적이며 히스테리적인 과장으로 전환된다. 그 위에 순간적 재생능력을 보유한 비디오의 등장은 이미지 조작을 통해 대상이 없는 파생된 이미지를 생산하게된다. 또한 새로운 테크닉으로서 컴퓨터의 기능을 사용한 하이테크 작품에서 정보 사회적 관심을 표현하는 경우는 좀더 다른 차원에로의 전환을 이루게된다. 이제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는 테크놀로지는 제작되어진 기술이 아니라 반대방향으로 전환되어 진다. 즉 현대인의 사고에서 테크놀로지가 없이 추리가 불가능해 진 것이다. 최근까지 테크놀로지는 가상을 구체화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 예로서 테크놀로지를 대변하는 TV는 대중매체로서 지위를 확립함과 동시에 새로운 사물로 포괄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기존의 TV를 통해 제시되는 이미지는 정보의 지위를 벗어나 사유와 소비의 대상으로 나타나게 됨으로서 기성화 된 사물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TV에서 제공되는 영상 이미지는 사물의 밖에서 재생된 것이 아니라 물리적 실체로서 Ready-Made가 된다. 따라서 TV모니터는 하드웨어로서 Ready-Made, 비디오의 이미지는 소프트웨어로서 Ready-Made와 결합한다. 초창기 비디오아트에서 TV 모니터가 이미지 전달을 위한 단순한 매체로서 물감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Ready-Made로서 TV 모니터는 새로운 미술의 초기적 성향은 벗어나 전통적 회화 체계를 탈피하는 데 많은 관심을 두게된다.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해체하고 TV 모니터는 그것이 담고 있는 이미지와 동일화 한다. 따라서 작가들이 선택한 이미지는 TV 모니터들을 사용하여 연역해 낼 수 있는 사건과 관련되어지는데, 이미지 자체의 시각적 사실성과 의해 사 Funding of the oppression of palestine, unprovoked aggression in iraq, and now http://www.pro-homework-help.com/ an alliance with.

비디오 아트의 미학

비디오 아트의 미학

조선령(미학,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1. 서론

흔히 ‘영상시대’로 이야기되는 오늘날, 캔버스와 물감 대신 모니터와 카메라, 스크린으로 구성되는 소위 ‘비디오아트’는 더 이상 주변적인 장르가 아니라 현대미술의 주요한 표현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비디오아트 작품을 감상할 기회가 늘어나는 만큼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가 깊어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서구에서도 비디오아트는 “미술사적 승인에 요구되는 특질들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 독립된 비평체계를 갖지 못한”(주1) 미술로 평가된다. 미술사에 편입시키기거나 이론의 대상이 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을 뿐 아니라 과거의 평가기준을 적용시키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비디오아트가 생겨난지 불과 30여년, 미술세계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역사가 더 짧다. 그러나 그 미학을 기술하기가 어려운 것은 단지 역사가 짧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비디오아트가 그 전신격인 개념미술이나 퍼포먼스보다 현대의 기술문화에 더욱 가까이 밀착되어 있고 따라서 그 어느 장르보다도 ‘물질적’ 기반에 의해 그 성격이 결정된다는 점 역시 그 어려움에 일조를 하고 있다. 디지털 문화가 낳은 컴퓨터 프로세싱 기법, 레이저 디스크의 보급, 인터엑티브적 작품을 가능하게 하는 전자공학적 기술 등 날로 세련되어가는 오늘날의 기술환경은 비디오아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테크놀로지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기 쉽게 만든다. 실제로 초창기 비디오아트의 감상자들은 작품이 ‘못보던 신기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우선 흥미를 느꼈다. 이런 점은 창작자들이나 비평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새로운 시대, 테크놀로지의 시대가 오고 있다’하는 것이 비디오아트의 상투적인 소개방식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비디오아트를 기술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단순한 시각은 많이 극복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비디오아트가 독자적인 미학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떤 차원에서 그러한가, 또한 비디오아트에서 우리가 무엇을 감상하고 분석하고 비평할 것인가 하는 점은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지 못하다. 비디오아트에서 테크놀로지가 문제시된다면, 그것은 단순히 새로테크놀로지의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현대의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현대의 인간과 기술의 상호관계는 무엇이며 비디오아트에서 그것은 어떻게 구체화되고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이며, 그러한 부분은 단지 기술적인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적인 차원을 떠난다고 했을 때에도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대부분의 비디오아트는 단지 내용적인 차원에서 접근했을 때는 무의미한 작품이 많을 뿐 아니라, 테크닉적인 차원에서 볼 때도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비디오아트는 영화처럼 어떤 고유의 문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내러티브를 뚜렷하게 갖는 것도 아니다. 또 조형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것도 말처럼 쉽지는 않다. 비디오아트의 양태는 갤러리라는 울타리에 묶이기에는 너무 다양하기 때문이다. 퍼포먼스의 기록매체로서의 비디오, 모니터를 조형적 요소의 일부로 도입한 비디오 조각, 환경적이고 건축적인 요소를 도입한 비디오 환경-설치, 텔레비전이나 케이블에 방영될 목적으로 만든 대안매체로서의 정치적인 비디오테이프 등등…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비디오’라는 공통점을 가지며 비디오아트라는 이름 하에 묶인다. “‘비디오아트’라는 용어는 비디오그라피적인 작품에만 전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종종 나왔지만, 실제에 있어서 이 말은 더 복잡한 영역을 포함한다. 오늘날 이 용어는 예술적 생산의 맥락에서 비디오 매체를 사용하는 모든 경우를 망라한다.”
요컨대 비디오아트는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잡종의 예술이며 통일된 기법적, 장르적 특성을 갖지 않은 예술이다. 따라서 비디오아트의 ‘단일한’ 미학을 정립한다는 것은 어려울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불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예술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데 있어서 미학적 원리를 정립한다는 것은 당연하고 또 필수적인 일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비디오아트를 테크놀로지의 차원에서나 내러티브적인 차원 혹은 조형적인 차원에서 일방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렇다면 이 모든 차원을 한꺼번에 고려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 이 글은 혼합적인 접근방법이 해결책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비디오아트에 차용된 다양한 기법들은 하나 하나가 독립된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전혀 다른 효과를 내기 위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통일된 미학을 정립하거나 절충적인 접근방식을 대입하는 것이 어렵다면, 다양한 비디오아트 작품들의 공통점은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 이 글은 내적 원리를 종합하는 데서 눈을 돌려 비디오아트가 탄생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에 따라 이 글은, 비디오아트는 어떤 전환이 일어난 시점에서 생겨났으며 그 전환을 기록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하는 예술이라고 주장한다. 비디오아트는 0세기 후반, 캠코더라는 저가의 촬영장비의 탄생과 새로운 텔레비전 문화의 영향으로 탄생했다. 그러나 이 기술적, 문화적 변화의 근저에는 깔린 더 중요한 변화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 사이에서 일어난 일종의 존재론적 변화이다. 비디오아트의 유일한 공통점은 이 변화를 기록하는 것이다. 비디오아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것은 기술적 세련이나 조형적 혁신이 아니라 철학성이다. 다시 말해 이 글은 비디오아트라는 예술이 자기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철학성이며 이 근거역사적 배경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이 글은 또한 비디오아트가 철학성을 정체성의 근거로 삼는다고 할 때 그것을 구체화하는 것은 ‘매체’라는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다시말해 물질성과 철학성을 매개하는 요소가 ‘매체’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매체는 수동적인 도구로 이해되는 전통적인 매체 개념이 아니라 마샬 맥루한이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새로운 매체 개념이다.
이 글은 첫부분에서 주로 맥루한의 매체 개념을 통해서 현대의 철학적 예술로서의 비디오아트가 어떤 존재론적 전환을 가져왔는가, 그 내용은 무엇인가를 살펴본다음, 구체적인 작품을 몇 가지 예로 들면서 비디오아트의 매체적 특성과 그 함의를 좀더 자세히 논의해보겠다.

2. 본론

2-1 ‘매체’의 새로운 개념과 탈주체성의 경험

오늘날 미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양식이나 장르라는 말보다 ‘매체’라는 말을 즐겨 쓴다. 그런데 이때 매체라는 말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 매체라는 말은 보통 작품을 구성하는 물질적이고 객관적인요소, 다시말해 하드웨어적인 요소를 지칭한다. 그러나 맥루한과 같은 이론가는 이러한 객관주의적 해석이 오늘날에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맥루한의 유명한 명제 “매체는 메시지이다”라는 말은 객관주의적 시각을 비판하는 일종의 선언이다. 이 말은 모더니즘 미학의 전형적인 선언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매체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모더니즘 미학과 맥루한의 시각은 다르다. 맥루한의 이 말은 현대문화의 일반적 성격을 이론화하는 명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에 따르면 “매체는 메시지이다”라는 것은 오늘날에야, 맥루한의 용어로는 ‘전자시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밖으로 드러난 사실이다. 즉 맥루한은 이 말로써 과거와 오늘날 사이에 일어난 어떤 단절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매체는 메시지이다”라는 말의 우선적인 의미는, 매체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그 매체의 성격과 분리될수 없다는 것이다. 보통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쓰이는 매체라는 개념은 메시지를 담는 중립적인 도구로 인식된다. 말하자면 메시지는 정보를 전달하는 주체에 속한 것으로, 매체는 정보를 담는 그릇으로서 객체에 속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맥루한은 매체는 중립적인 도구가 아니라 그 매체에 담기는 메시지를 결정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매체가 능동적인 힘이라는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맥루한에 따르면 매체라는 말은 인간의 감각기관의 확장으로 이해되는 모든 것을 지칭한다. 예컨대 망원경은 눈의 확장이고, 자동차는 발의 확장이며, 전자정보망은 신경기관의 확장이다. “이것(매체는 메시지다라는 말)의 의미는 간단하다. 그것은 모든 매체가 우리 자신의 확장이며, 이 매체의 개인적 및 사회적 영향은 우리 하나하나의 확장, 바꾸어 말한다면 새로운 테크놀로지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도입되는 새로운 척도로서 측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주3)
매체가 우리 감각기관의 확장이라는 이 말을 받아들인다면, 매체는 더 이상 인간과 분리된 객관적 결과물로 간주될 수 없다. 매체의 변화는 인간의 감각기관의 변화를 야기하게 되고, 변화된 감각은 인식에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매체는 결국 인간의 개념 그 자체를 새롭게 정의내리는 능동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매체는 주체 대 객체라는 이분법의 한 극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와 ‘융합’되는 심리적-물리적 과정 내지 일종의 ‘장'(field)에 가까운 개념이 된다. 비디오아트의 초기 이론가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비디오아트의 특징은 인간의 심리가 하나의 매체로 사용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경우도 맥루한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능동적으로 확대된 매체 개념이 도입되고 있다. 맥루한이나 크라우스에게 있어서 매체는 인간 앞에 놓인 객관적 결과물이 아니라 인간과 결합되어 있으며 인간을 규정하는 것이다.
맥루한은 매체의 발달에 따라 시대를 구분한다.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로 대표되는 ‘기계시대’는 추상적 사고와 언어의 시대이며 개인주의의 시대이다. 이 시대는 직선적,중앙집중적, 객관적, 전문적, 분석적, 문화를 갖는다. 반면 오늘날의 사회를 지칭하는 ‘전자시대’를 대표하는 것은 통신망과 텔레비전이다.
전자시대는 순환적, 분산적, 총체적, 비전문적, 종합적, 다중감각적 문화를 갖는다. ‘매체는 메시지이다”라
는 말은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것이지만, 맥루한에 따르면 전자시대 이전에 이런 사실은 은폐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확장’이 그다지 많이 등장하지 않았을 때 테크놀로지는 고립적으로 발전했고 그 방향은 중심에서 방사상으로 뻗어가는 것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전자시대 이전의 시대, 즉 기계시대는 ‘외부폭발(explosion)’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 폭발이 어느 한계에 도달하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갑자기 반대방향으로 돌아선다. 이것이 ‘내부폭발(implosion)’의 시대인 전자시대이다. 전자시대에 이르러 테크놀로지는 단순한 발전이 아니라 상호연관성을 중심으로 발달한다. 내부폭발의 시대는 반대방향의 힘이 역작용하는 시대이므로 상호간섭이 주요한 힘이 된다. 예를 들어 개개인을 더욱 더 고립시키는 것으로 보였던 컴퓨터는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오히려 전세계를 동시에 하나로 묶어주게 되었다. 전자시대에는 전체적 영향을 한 분야의 발전보다 더 중요시하는 시대이므로 내용보다는 전체적 효과를 더 보게 된다. 따라서 매체와 매체의 관계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기계시대가 시각을 특권화하고 정신을 육체와 분리시켰다면, 매체와 매체의 관계 혹은 전체적 상호작용이 중요시되는
전자시대는 감각의 다중적 사용과 신체의 재등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때의 감각이나 신체는 더 이상
기계시대의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물질의 발달에 의해 시대의 단절 내지 변화가 일어났다는 맥루한의 관점은 유물론적인 색채를 띠고
있고 기술결정론적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그 외에도 맥루한의 이론은 검증되지 않은 선언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그러나 비디오아트의 미학을 철학적 전환 내지 단절이라는 관점을 통해 정립 하는 데 있어서 그의 이론은 일정 부분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어떤 예술이 문제가 될 경우 철학 적 전환에 대한 논의라는 것은 구체적인 작품 속에서 그것이 어떻게 물질화되어 있는가를 말하지 않고 서는 공허해지기 쉽다. 맥루한은 ‘매체’ 개념을 통해서 철학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연결을 시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물질화의 동인 내지 근거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 한다.
비디오아트의 시대에 살지 않았던 맥루한은 전자시대의 전형적인 매체로 텔레비전을 들고 있지만, 총체적, 종합적, 분산적, 참여적이라는 특성에 있어서 비디오아트는 텔레비전보다 더욱 전자시대의 정의 에 더 잘 들어맞는 매체이다. 비디오아트를 비롯한 전자시대의 문화적 산물들이 관객에게 주는 경험은 분명 모더니즘적 작품의 경험과는 다르다. 그러나 매체에 대한 객관주의적 입장을 고수하는 한 이 새로 운 경험의 성격은 규정내리기 힘들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처럼, 비디오아트는 “주체와 객체를 똑같이 지배하고 탈인격화시키면서 전자를 후자에 대한, 그리고 비디오 이미지 혹은 ‘총체적 흐름’에 대한 기계 적 시간을 기록하는 의사물질적 기구로 변화”(주4)시킨다. 통일된 주체성과 단일한 자아의 감각을 더 이 상 유지할 수 없는 비디오아트의 감상경험은 이미 매체가 주체에 대해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주체의 신체와 의식 속으로 침투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말은 이미 오늘날 주체성이나 인간성 혹은 신체라는 개념 자체가 매체에 의해 변화했다는 것을 뜻한다. 비디오아트와 같은 전자시대의 장르 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인간과 기계는 융합되는 경향을 띤다. 전자시대의 매체는 “인간을 기계화하고 기 계를 인간화”한다. 우리는 기계 앞에 주체로서 선 인간이 아니라 기계와 인간가 융합된 심리-물질적 장 안에 서 있는 유사-기계적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맥루한 이론이 궁극적으로 내포하는 결론이자 우리가 의미있게 받아들여야 할 주장이다.
비디오가 주는 탈주체성의 경험은 “모든 매체는 인간의 확장”이자 동시에 “축소”라는 역설적인 맥루 한의 말 속에서도 이해해볼 수 있다. 맥루한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역사는 인간의 감각이 점차 확장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지만 동시에 인간의 감각을 축소시켜온 과정이기도 했다. 맥루한은 발전이 어떤 한계 점에 달하면 그 반대방향으로의 변화가 역사를 통해 항상 일어났다고 주장하면서, 전자시대가 바로 그 러한 역전의 시대라고 말한다. 속도와 거리, 양 등 모든 것을 밖으로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기 계시대의 문화(예를 들어 교통수단의 발명과 발달에 따른 이동속도의 증가, 지식의 양적인 축적을 교육 의 일차 목표로 삼았던 것 등)는 인간의 감각을 점점 더 외부로 노출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그에 따른 자극과 긴장도 역시 높여놓았다. 이 긴장도가 일정 수준에 이르면 인간은 일종의 감각마비를 일으켜 긴 장을 없애려고 한다. 이것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일상에서도 쉽게 관찰되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인간 의 두뇌는 일정 정도의 기억용량만을 갖고 있다. 만약 망각이라는 작용이 없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 다면 인간은 스트레스를 받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너무 심한 충격을 받으면 기절하는 것 역시 같은 원리이다. 맥루한은 매체에 관해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고 주장하며 이런 현상을 ‘감각의 마비’ ‘사지 절단’ 또는 ‘지각의 폐쇄’라고 부른다. 전자시대는 테크놀로지의 자극에 의해 인간의 감각이 극도로 ‘축 소’된 시대이다. 전자시대의 매체를 경험하는 데 있어서 인간은 감각을 축소하고 그 감각에 대한 통제력 을 스스로 “기계”(인간의 분신인)에 넘겨줌으로써 더욱 더 테크놀로지와 융합되며 기계 속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규정당한다. 전자시대의 전형적 매체인 비디오아트 앞에서 서는 인간은 기계 앞에 선 관조자 로서의 선험적 자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와 험, 즉 단일한 자아의 감각을 해체시키는 탈주체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맥루한에 따르면,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확장”이라거나 “매체는 메시지”라는 사실은 어느 시대에나 적 용될 수 있지만, 물질문화가 일정 수준 이상을 넘어선 전자시대 이전까지는 그러한 사실이 은폐되어 있 었다. 전자시대의 매체가 달성한 중요한 일은 이러한 인식을 인간에게 가져다준 것이다. 이런 관점을 받 아들인다면, 비디오아트가 철학성을 그 근거로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는다. 앞에서도 주장했듯이, 비디오아트는 인간의 존재론적 인식에 커다란 전환을 가져다준 예술이며, 그 전환을 기록하는 것을 임 그렇다면 비디오아트에서 새로운 개념의 ‘매체’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러한 탈주체성의 경험을 발생 시키는가 ? 비디오아트의 매체적 특성은 전자시대의 다른 매체들과 어떻게 구별되며 어떤 방식으로 작 동하는가 ? 다음 장에서는 비디오아트의 매체적 요소들을 몇 가지 추출하여 이를 논의해보겠다.

2-2 비디오아트의 매체적 요소들

앞에서 말했듯이 이 장에서는 탈주체성의 경험을 발생시키는 비디오아트의 매체적 요소들을 신체, 시 간, 공간, 언어/음향으로 세분화시켜서 논해보겠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이 요소들이 가져다주는 효과가 비디오아트의 공통적 원리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효과들은 비디오아트의 다양한 매체 적 가능성 중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

2-2-1 신체

퍼포먼스에 한 기원을 두고 있는 비디오아트는 신체의 문제를 처음부터 중요한 소재이자 주제로 다루 어왔다. 초기의 많은 비디오 아티스트들은 스스로가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했으며 이점은 최근의 비디 오 아티스트들에게도 계승되고 있다. 비디오아트에서 신체는 작가의 신체로, 때로는 관객의 신체로, 또 한 작가의 신체와 관객의 신체간의 상호작용으로 구체화된다.
비디오아트는 시각만을 특권화하고 다른 감각과 분리시키는 모더니즘적 미술과는 달리 모든 감각을 총체적으로 요구한다. 서구에서 오랫동안 ‘눈’은 인식에 연결되는 우월한 감각으로, 그밖의 감각은 저급 한 ‘육체적’ 감각으로 간주되어왔다. 모든 감각이 다시 합쳐지는 전자시대에 신체가 다시 주요한 매체로 등장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필연적이다. 그러나 이때의 신체는 인간의 주체성을 담보하고 있는 자율 적인 신체가 아니다.
데카르트적 주체 개념을 무의식과 기표의 개념으로 전복시키고자 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거울 단계’ 이론을 통해서 선험적이라고 생각되었던 자아의 단일성이 사실 항상 신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구축된다는 것을 밝혀내었다.(주5)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비디오아트의 탈모더니즘적 성격을 이 거울단계 이론으로 설명하면서 비디오를 본질적으로 나르시시즘적 매체라고 정의내린다. 크라우스가 이야기한 나 르시시즘의 특성은 주체와 객체의 융합이라는 측면이지만 사실 거울단계 이론은 이 융합의 행복감이 일 시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라캉은 ‘나(자아)’는 항상 ‘나 외부에 있는 나 아닌 것(거울상, 타자)’을 통 해서만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있어서 근원적인 소외를 각인시킨다고 말한다.
이 융합과 소외의 경험은 항상 신체라는 매개(체)에 의해 중개되는데, 비디오아트, 특히 비토 아콘치 나 댄 그래험, 피터 캠퍼스 등으로 대표되는 초기 비디오아트 시대에 관객 혹은 작가 자신의 신체는 종 종 이 거울단계 속의 신체와 같은 방식으로 기능한다. 비디오아트 특유의 직접성(immediacy), 즉 폐쇄회 로 설치나 생방송용 카메라의 피드백 구조 등이 만들어내는, ‘지금 여기, 현재’의 성격은 공간 속에 현존 하는 신체를 작품의 주요 구성요소로 삼을 수 있게 한다. 또한 비디오아트 속에서 신체는 하나의 거울 앞에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종종 멀티채널 모니터나 거울과 모니터의 무한한 반영작용 속에서 분산되 어 라캉적인 분열된 자아의 경험을 극대화한다. 자아의 분열을 발생시키는 매체로서의 신체는, 일종의 텅 빈 신체, 일종의 ‘장소’로서의 신체가 된다. 신체는 비디오아트의 물질성을 규정하는 한 요소로 환원 된다.
비토 아콘치는 신체를 물리적, 심리적인 자아 탐구를 위한 장소로 사용하는 초기 비디오아트의 대표 적 작가이다. 70년대 작품들에서 그는 종종 고정된 카메라에 의해 실시간(real time)으로 촬영된 자신의 신체를 모니터로 보여주며 그 모니터 앞에서 거울 앞에 선 라캉의 어린아이처럼 자기에게로 되튕겨져오 는 독백을 중얼거린다. 예를 들어 그의 <방송시간(Airtime)>(1973)은 더 큰 퍼포먼스적 장치의 일부분 으로 제작된 비디오테이프인데, 모니터에는 아콘치가 거울을 보고 40분 동안이나 혼자 퍼포먼스를 벌이 는 장면이 방영된다. 그는 거울 속의 자기 모습에 대고 중얼중얼 독백을 늘어놓고, 마이크를 대고 말하 기도 하며 머리를 쥐어뜯기도 한다. 그는 거울 속의 자기 자신을 ‘나’라고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너’라고 부르기도 한다. 거울 속의 신체와 마주한 작가의 신체 그리고 인칭대명사의 혼란스러운 전환은 나르시 시즘적 융합과 소외의 이중적 경험을 글자 그대로 보여준다.
댄 그래험의 <시차를 두고 작동하는 마주보는 거울과 비디오 모니터(Opposing Mirrors and Video Monitors on Time Delay)>(1974)는 관객의 신체를 이러한 이중적 경험을 위한 매체로 사용한 작품이 다. 이 작품에서 거울상의 경험은 카메라, 거울, 모니터라는 3중의 장치를 통해 극대화된다. <시차를 두 고…>는 장방형의 방 양쪽 벽에 설치된 전면거울과 두 대의 카메라, 두 대의 비디오 모니터로 구성되어 있다. 관객이 거울과 카메라 사이에 서서 카메라를 향하면 그는 모니터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거울에 비친 모습, 그 거울상을 다시한번 촬영하는 카메라에 의해 보여지는 반대편 모니터 속의 모습 등 겹쳐 지는 영상의 현란한 중첩을 경험하게 된다. 거울의 공간은 무한히 확장되는 듯 펼쳐지고 그 소실점을 향해 무수히 중첩되는 반사상의 유희 속에서 관객의 지각경험은 분열되며 관객의 신체는 단일한 감각으 로 인식되기를 그친다.

2-2-2 시간

시간은 과거의 미술과 비디오아트를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그러나 시간이라는 요소는 사 실 미술과 늘 함께 했었다. 예를 들어 중세예술이나 원시예술에서 설명적인 시간의 요소는 종종 등장한 다. 단지 망막에 작품이 포착될 때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현존성’이 강조되는 모더니즘 시대, 즉 기계시 대의 미학이 미술에 있어서 시간의 경험을 부인했을 뿐이다. 맥루한의 용어로 말하면 ‘재부족화’가 일어 나는 전자시대에, 시간의 경험은 다시 중요시된다. 그러나 비디오아트의 시간 개념은 일반적으로 이해되 는 시간경험과는 다르다. 비디오아트에서 시간은 직선적인 시간이 아니라 불연속적이고 파편적이고 순 환적인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 개념을 가능하게 한 것은 현대의 물질문화이다. 비디오아트의 시간은 피 드백이나 반복시청 등의 테크놀로지를 통해 항상 현제시제의 특성을 획득하며, 이 즉시성(instantaneity) 은 시간의 경험과 공간의 경험을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라는 비디오아트 의 시간은 항상 공간 속의 현존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또한 비디오아트의 시간은 동시성(simultaneity)이 라는 특성을 갖는다. 한 카메라가 촬영한 이미지를 여러 개의 모니터로, 혹은 여러 대의 카메라가 촬영 한 이미지를 한 모니터에 전송할 수 있는 비디오의 기술적 특성은 순차적인 시간의 흐름이라는 사고방 식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인간의 주관에 특권을 부여했던 기계시대의 철학자 칸트는 시간이 대상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지 각의 형식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 형식은 만인에게 공통된 것이고 일종의 선험적 조건과 같은 것 이다. 따라서 시간 그 자체는 중요하게 부각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비디오아트와 같은 전자시대의 매체 에서 시간은 더 이상 중립적이거나 균일한 형식으로 남아있을 수가 없다. 감상경험을 결정하는 능동적 인 요소로 작용하는 시간은 이제 그 속에 담기는 내용보다 더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다. 비디오아트에서 시간에 대한 통제력 내지 주도권은 더 이상 인간의 편에 있지 않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대로 비디오 아트의 시간은 더 이상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기계의 시간’이다. 즉 비디오아트의 시간이 갖는 기계적 속성은 관객에게 탈주체성의 경험과 유사-기계적 존재로의 변형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빌 비올라는 이 시간이라는 요소를 세련된 하이 테크놀로지에 의해 뒷받침되는 작품 속에 시적으로 통합시키는 것으로 유명한 작가이다. 그가 9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한 연작 <매장된 비밀(Burried Secret)> 중의 하나인 <만남(the Greeting)>(1995)을 보자. 비디오 프로젝션을 이용한 이 작품은 미술사 의 고전적 도상에서 인용해 온 것으로, 세 여자의 만남을 소재로 하고 있다. 중년의 여자와 좀 더 나이 든 다른 여자가 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젊은 여자 한 명이 다가온다. 임신한 듯한 이 오렌지 색 옷의 여자는 중년여자를 무시하고 나이든 여자에게 다가가 뺨에 키스를 한 뒤 귀에다 대고 “저를 도 와주실 수 있어요? 지금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라고 속삭인다. 이 만남의 장면에 소요되는 실제 시간은 총 45초이지만 비올라는 이를 10분간에 걸쳐 극도로 느린 슬로우모션으로 보여준다. 이 여자들 의 만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작가는 해석을 일체 부여해주지 않고 있다. 이 작품에서 이 만남의 수수 께끼같은 성격을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름아닌 ‘시간’이다. 30배로 확대된 이 극도로 느린 속도는 관객으로 하여금 현미경적인 미시적 시간의 세계를 체험케한다. 여기서 시간은 우리가 통제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에 관객의 인식능력을 방해하고 관객을 이 ‘기계적 시간’에 통합된 수동적 존재로 전락시킨다.

2-2-3 공간

비디오아트는 원래 전시장 안의 오브제라는 미술 개념에서 탈피해 미술을 공공의 공간으로 확장시키 고자 했던 대지미술이나 설치작업과 유사한 맥락에서 미술계에 도입되었다. 이미지가 인간의 신체를 둘 러싸는 하나의 ‘장소’ 내지 ‘환경’이 되는 비디오 설치작업에서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 작 품을 지배하고 관객의 신체와 정신에 작용하는 적극적 요소가 된다. 그러나 비디오아트에서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도 고정되고 단일한 실체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요소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롭게 변
화하는, 가변적이고 불연속적인 ‘과정’으로 경험된다. 또한 앞에서도 말했듯이 비디오아트에서 시간과 공
간은 서로 분리된 요소들이 아니라 서로 결합되어 일종의 다중감각적인 체험의 장을 형성한다.
70년대 초창기 비디오 아티스트들은 주로 작은 모니터를 이용해서 작품을 만들었다. 퍼포먼스와 종종
결합된 모니터 작업들은 공간 속에서 ‘거울’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비디오 이미지 그 자체의 힘에 의해 공간의 경험을 창조하는 방법은 비디오 프로젝션의 일반화와 함께 이루어졌다. 모니터는 크기가 작고 텔레비전과 외관이 유사하게 보이기 때문에 초기 작가들은 종종 모니터를 여러 대 겹쳐놓거나 해 서 멀티모니터의 ‘더미’를 만들었다. 그러나 레이저디스크가 보급되면서 프로젝터로 확대해도 선명한 영 상을 얻을 수 있게 되자, 이미지 자체의 크기를 통해 이미지를 공간화하는 작업은 80, 90년대에 와서는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 멀티모니터가 건축적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조각적인 느낌을 주는 반면, 비 디오 프로젝션은 확실히 거대한 공간의 느낌을 줄 수 있다. 프로젝터를 통한 공간의 극대화는 인간을 압도하는 신체를 그 공간 속의 한 장소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바라보는 주체로서의 관객의 관조적 거리 를 소멸시키고 단일한 자아의 감각을 해체한다. 또한 비디오아트는 하나 이상의 프로젝터를 이용해서 공간을 분열시키거나 같은 장소에 여러 이미지들을 동시에 투사할 수 있는 기술적 능력을 갖고 있다.
이러한 분열되고 파편화된 공간은 시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기계의 시간’에 대한 경험을 가져다준다.
예를 들어 부르스 노먼의 <인류학/사회학(Anthropo/Socio)>(1991)은 벽을 둘러쌀 정도로 거대한 영상 들을 통해 이미지의 공간화라는 비디오아트의 특성을 극대화하는 대표적 작품이다. 노먼은 3대의 프로 젝터와 6개의 모니터를 이용해 삭발한 남자의 얼굴모습을 방의 이곳저곳에 클로즈업으로 투사시킨다. 이 단순하면서도 공격적인 포즈의 영상들은 “밥 좀 주세요, 잡아먹어주세요, 인류학…살려주세요, 때려주 세요, 사회학…”이라는 외침을 위협적으로 반복하면서 이미지를 ‘본다’라고 하는 전통적인 경험을 붕괴시 킨다.
메리 루시에는 <기울어진 집(Oblique House)>(1993)에서 다큐멘터리라는 시간적 예술과 설치라는 공 간적 요소를 결합시킨다. 이 작품은 네 대의 모니터와 두 대의 프로젝터, 다섯 개의 레이저디스크 비디 오 채널, 그리고 오디오로 구성되어 있다. 루시에는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그 중 네 명을 택하고 이 ‘방’ 모양의 조형적 구성물의 네 귀퉁이에 설치한 모니터를 통해 이들이 지진의 충격 과 그 치유과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방영한다. 기억, 생존, 소멸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유 사-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은 모니터 위에 위압적으로 투사되는 거대한 바위더미의 영상과 이 ‘집’의 구 조가 갖는 깔끔한 조형적 성격으로 인해 전혀 다른 것으로 변형된다. 이 상반되는 요소의 충돌과 돌연 한 변형 앞에서 관객은 또한번 의식의 분열을 체험하게 된다.

2-2-4 언어/음향

비디오아트에서 언어 혹은 음향, 넓게 말해서 청각적 요소는 시각적 요소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청각 적 요소는 독백일 수도 있고 해설풍의 나레이션일 수도 있고 소음에 가까운 단순한 음향일 수도 있으며 동물의 소리나 시 낭송 등일 수도 있고 음악일 수도 있다. 화면을 해설해주거나 화면 속의 시공간 속에 서 나오는 영화의 음성과는 달리 비디오아트에 등장하는 음성은 영상과 합치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이 때 이미지와 음향의 불일치는 비디오아트의 경험에 또 다른 차원을 도입해준다.
예를 들어 비토 아콘치는 무대 위의 배우처럼 독백을 즐겨 도입하는데, 그가 내뱉는 말은 기계적인 반복, 목쉰 속삭임, 날카롭게 끊어지는 소리 등 다양한 형태로 언어를 파편화시킨다. 이 목소리들은 내 용을 전달하거나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발화행위의 주체인 인간은 오히려 주체 가 아니라 언어의 파편성을 전달하는 하나의 수동적인 통로가 되며 과거에는 객체 혹은 수단에 불과했 던(그렇다고 믿었던) 언어는 인간의 정신을 규정하는 능동적 힘을 갖는다.
보통 문자로 표현된 ‘언어’가 신체를 갖지 않은 정신적 요소로 이해되는 반면, 비디오아트에서 언어적 요소는 신체에 각인된 것이 된다. 즉 비디오아트에서 언어는 투명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불투명한 물질성을 담보하게 되는 것이다. 비디오아트의 목소리들은 신체와 분 리된 건조한 목소리가 아니라 롤랑 바르트적 의미에서의 ‘목소리의 결(grain)’ 혹은 라캉적 의미에서의 ‘실재계의 언어’라고 분류할 수 있다. 이 목소리의 결 혹은 실재계의 언어는 “내용을 갖지 않는다. 그것 은 다만 언어의 물질성이 느껴질 때, 언어가 의미에 저항하는 것이 느껴질 때 들리는 ‘마찰’로 나타날 뿐이다…그것은 의미에 대한 저항 혹은 의미의 실패를 기록한다.”(주6)
게리 힐은 발화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비디오 아티스트 중 하나이다. 게리 힐 의 <영화와 힘겨운 장소 사이에서(Between Cinema and Hard Place)>(1991)는 다양한 크기의 모니터 23개로 구성되어 있는 작품이다. 세 군데에서 나오는 이미지와 음향들이 컴퓨터의 도움으로 32개의 출 력장치에 하나의 영상으로 전송된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언어의 본질>에서 발췌한 구절을 낭독하는 음성이 들린다. 이 작품에서 발화행위와 이미지 전송과정은 일종의 유비적 관계에 놓이게 된다. 언어라 는 매체는 이 작품 속에서 비디오의 기계적 송신과정을 인간의 사고를 전달하는 일종의 정신적 통로로 변형시킨다. “힐의 비디오작품은 새로운 글쓰기의 형식에 관한 것이자 새로운 글쓰기 그 자체이다.” 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이 ‘새로운 글쓰기’는 비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신체에 각인되는 언어, ‘물질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글쓰기이다.
<다이얼 히스토리(Dial H-I-S-T-O-R-Y)>(1995-97)에서 조안 그리몬프레즈는 전세계 하이재킹의 연 대기를 유사-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보여준다. 르포르타주 장면과 작가에 의해 재구성된 이미지들을 뒤섞 는 이 작품은 돈 드릴로의 두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허구적 내러티브를 사운드트랙으로 사용함으로써 언어를 다시한번 파편화시키고 현실성이라는 낱말을 허구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전복시킨다.

3. 결론

이상과 같이 정리해본 것처럼, 현대문화의 물질성을 바탕으로 탄생한 새로운 예술인 비디오아트는 그 혼성적인 기원과 잡종적인 방법론으로 인해 하나의 단일한 미학적 원리를 정립하기 어려운 장르이다.
비디오아트라는 장르는 조형적, 기술적 공통성과 같은 내적 원리를 갖는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주체 성과 매체의 관계 사이에서 일어난 어떤 철학적 전환을 기록하는 것을 그 정체성의 근거로 삼는다, 마 샬 맥루한의 이론을 통해서 살펴본 것처럼, 비디오아트는 ‘전자시대’의 전형적인 매체로서 과거와는 다 른 기능을 한다. 그것은 바로 주체와 객체를 분리시키는 객관주의적 사고,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를 전복 시키고 그 전복을 우리에게 인식시키는 기능이다. 매체는 수동적인 대상이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존 재를 규정하고 변화시키는 능동적인 힘을 갖는다. 인간의 감각의 비율을 조절하고 감각의 방향을 지시 하는 비디오 매체 앞에 선 인간은 더 이상 관조하는 자아가 아니라 테크놀로지와 결합된 유사-기계적 존재이다.
오늘날 비디오아트는 유사-기계적 존재로서의 이러한 인간의 존재상황을 우리에게 인식시켜주는 철학 적인 예술이다. 그러나 이 철학성은 과거의 미술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우선 철 학성은 이 예술장르의 여러 속성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공통 근거이다. 또한 이 철학성은 모더니 즘 미술에서와 같이 ‘시각의 우위’에 의해 유지되는 인식의 철학성이 아니며 예술을 개념으로 환원시키 고자 하는 시도에 의해 규정되는 철학성도 아니다. 비디오아트의 철학성은 항상 물질적 기반을 가지며 그 기반은 신체, 시간, 공간, 그리고 언어(음향)이라는 매체적 요소들로 구체화해볼 수 있다. 비디오아트 가 가진 다양한 가능성 중의 일부인 이러한 매체적 요소들은 현대 테크놀로지의 힘에 의해 작품 속에 고전적인 미학적 원리를 붕괴시키는 차원을 도입한다. 비디오아트에서 신체는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주 체적 신체가 아니라 일종의 텅 빈 ‘장소’ 역할을 하며 파편적, 분열적으로 경험되는 시간과 공간은 단일 한 자아의 감각을 해체시키는 역할을 한다. 언어는 사고의 전달체가 아니라 신체에 각인된 불투명한 ‘장 애물’로 기능한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을 빌 것도 없이, 오늘날은 문화가 그 어느 때보다도 물질적 요건에 의해 결정 되는 시대이며 비디오아트는 그런 문화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예술이다. 그러나 비디오아트를 감상하 고 분석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물질적 성격은 단순한 비판이나 옹호의 대상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철학 적 예술로서의 비디오아트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물질적/정신적, 주체/객체라는 대립구도 자체가 이미 무너져버렸으며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휴머니즘 역시 예술과 문화를 논하는 데 있어서 이미 의미를 상실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인간성이라는 말 자체가 오늘날에는 이미 물질에 의해 규정받는 것으로 변 했기 때문이다. 비디오아트의 감상과 해석 혹은 비평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매체에 대한 객관주의적 사 고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전자시대의 문화가 과거의 인간관을 어떤 식으로 붕괴시켰는가, 그 붕괴와 새 로운 전환의 인식이 어떻게 작품 속에 ‘물질적으로’ 각인되어 있는가를 살펴보는 일이다. 새로운 테크놀 로지를 단지 기계적으로 반복하기만 하는 작품과 새로운 시대의 문화를 전면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작품 의 구별은 오늘날의 문화에 대한 이러한 전반적인 인식없이는 행해지기 어려울 것이다. 맥루한의 말대 로, 새로운 시대의 한가운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직 전 시대의 기준으로 예술과 문화를 판단 하고 평가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보아야 할 때이다.
* 박승호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6-26 00:33) Organisations regard business change as an important component of their organisations! collegewritingservice.org

Art-ing 상호 작용 예술

Art-ing 상호 작용 예술

신보슬(미학)

1. 또 하나의 세상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 공간 이외에 또 하나의 공간을 가능하게 하였다. 접속(connected)과 동시에 열리는 이 새로운 신천지는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가능했던 상상의 세계를 바로 우리 곁으로 가져다주었다.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던 할 수 있는 세상.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가 이룩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세상. 사람들은 유토피아에 도착한 것 같다. ‘접속되었습니다’라는 메시지는 유토피아를 알리는 환상의 목소리이다. 고민은 던져버리고 환희 웃으라고 모니터는 우리를 보며 깜박이고 있다. 과연 사이버 스페이스는 이상의 세계인가. 많은 학자들이 이에 반론을 제시한다. 민주주의적 자유로운 공간인 듯 보이는 이 환상의 땅은 서구 합리론의 극단으로 신체와 정신이 분열되어 정신만이 유희하는 공간이며, 주체가 분열되는 곳이라고 이야기한다. 전례 없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단순히 생산성의 증대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생활 깊숙히 침투해 들어와 인간 지각의 방식과 진리의 문제를 뿌리 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세상. 그 세상 한가운데에서 다빈치의 후예들은 ‘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는 맥루한의 유명한 구절에 충실하여 미디어의 본질. 미디어의 메시지를 읽어내고, 탐구하고 있다.

2. 예술. 재미있는 놀이 – 상호작용예술에 관하여

니체(F. Nietzsche)는 예술이란 ‘디오니소스적 충동과 아폴론적 충동의 합’이라고 했고, 크로체(B. Croce)는 ‘직관속에서 감정과 이미지의 선험적인 참된 종합’이라 했다. 베르그송(H. Bergson)은 ‘자연과 인간과의 교감의 길’이 바로 예술이라 했는가 하면, 수리오(E. Souriau)는 ‘어느 일정한 질서의 구성으로서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해서 사물을 창조해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이라 정의했다. 그러나 어떤 정의도 모든 예술이 지나온 모든 시대의 예술을 다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당대 온갖 영예를 누리던 예술관도 시대가 흐른 뒤 재평가 받는가하면, 그 반대의 경우를 찾아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예술에 대한 정의가 시대를 초월한 것은 아님을 증명해준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작품은 관람객과 만남으로 인해서 의미를 획득하고, 관람객이 작품을 마주함으로서 미적 경험으로 고양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던 간에 작품은 관람자와 소통을 이룰 때에야 비로서 가장 의미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예술은 언제나 관객과 소통하려 했고, 상호작용적이었기 때문에, 상호작용성이라는 것이 컴퓨터 예술의 고유한 특징은 아니라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상호작용성은 작품에 대한 소비, 즉 작품을 관람자의 주관적인 응시아래에 수동적인 놓여짐에 의해 이루어 졌다. 반면에 상호작용 컴퓨터 예술은 작품과 관람자, 그리고 예술가와 기술자/과학자 사이의 전통적인 경계를 허물어 내고, 작품과 관객 사이의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상호작용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상호작용 예술에 대해 논의하기 어려운 것은 논의하는데 사용할만한 상위 언어(meta language)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설령 예술이 언제나 상호작용적이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서구적 관점에서 시각 예술은 ‘상호작용성의 미학'(aesthetics of interactivity)이라는 전통을 가지고 있지 않다. 회화가 정지된 이미지(still image), 색상, 선, 형태와 재현적인 기하학 그리고 원근법 등에 대한 풍성한 성과를 통해서 이미지를 잃어내고, 영화는 영화적 언어로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실시간 상호작용의 미학을 위한 문화적, 미학적 장치는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논의의 어려움은 가중된다. 크래리(Jonathan Crary)가 주장했듯이, “예술작품의 의미는 감상자와 작품으로 구성된다”고 할 때, “관찰자의 기술”이라는 것은 “예술가의 기술”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예술가는 끊임없이 새로운 규준(canon)과 새로운 장르를 개발하기 위해서 분투한다. 그러나 상호작용적 경험의 역동성이 예술가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용자의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감상자가 이야기하기 위해서 필요한 언어가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술의 의미가 전달되기 어렵고, 나아가 의미 자체가 불가능한 ‘의미의 위기’ 상태에까지 이른다.
그러므로 상호작용 예술에 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호작용의 역동성에 대한 의미와 양상을 발견하고, 어떻게 미학적으로 적용이 가능한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미적으로 만들어진 상호작용의 역동성과 작품의 다른 요소들, 즉 물리적 대상이나 이미지, 그리고 사운드가 어떻게 하나의 통합적 미적 총체를 형성하게 하는 지에 대한 연구는 그 이후에 이루어 질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상호작용성’이란, 전기 스위치를 켜면 불이 들어오는 것과 같은 실시간에 이루어지는 쌍방향적 소통을 의미하지만, 보다 복잡한 지적, 인식적 복합체를 구성한다. 고속의 데이터 처리과정을 통해서 가능한 이런 능력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을 또다시 바꾸고 있다. 그리고 이런 변화들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변화로 이어진다.
상호작용적인 예술작품의 경향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진다. 먼저 아감(J. Agam)이나 소토(Soto)등의 작업에서 보이는 것처럼, 작품이 그 구조의 일부로서 포함하고 있는 매커니즘과 인간의 시각적 매커니즘의 대응에 의한 상호작용적 작품이 있고, 둘째로 가변적인 작품을 관객이 자유로이 변화시킬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세 번째의 경우는 작품이 외부환경의 변화에 반응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캘더(A. Calder)처럼 기계적인 반응을 모색하는 작가가 있는가하면 쇠페르(N. Shoeffer)와 같이 작품에 내장된 센서에 의한 전자적인 반응을 실험하는 작가도 있다. 끝으로 인간의 퍼포먼스에 반응하는 가상의 환경이 있다. 상호작용 컴퓨터 예술작품은 마지막 경우에 속하는 상호작용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잘쯔(D. Z. Saltz)는 이러한 상호작용성을 “(1) 감지장치나 입력장치가 어떤 사람의 행동의 특정 부분을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디지털 형식으로 변환시키면, (2) 컴퓨터 출력 자료는 구조적으로 입력장치와 관련되어 있어서 입력은 출력에 영향을 주게되고, (3) 그 출력자료들이 다시 실제 세계의 현상으로 변형되어서 사람들이 지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정의 내린다.
상호작용 컴퓨터 예술도 그 반응하는 방식에 따라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그 하나는 실제적이거나 개념적 혹은 가상적인 공간에 대한 조작을 통해서 탐험할 수 있는 구조(navigable structure)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공간을 일종의 건축물과 같이 재조직하고, 각각의 위치에 맞추어 하나의 시점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참여자는 공간을 탐험하는 과정에서 일련의 내용물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story)가 진행되는 과정을 통해 공간에 대한 독특한 방식의 읽기 방식을 경험한다. 항해할 수 있는 구조는 규칙적인 격자모양으로 교차되어 있는 네트워크 방식이나 단일한 이야기를 형성하는 과정, 혹은 많은 선택지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가는 과정을 통해서 공간을 경험하게한다.
항해 가능한 구조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는 도시의 지도모양을 이용한 쇼(Jeffry Shaw)의 《읽혀지는 도시》(The Legible City)이다. 이 작품은 스크린 앞에 고정되어 있는 자전거를 타고, 컴퓨터가 만들어낸 도시를 여행하는 간단한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도시는 건물들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알파벳 문자로 이어지기 때문에 참여자에게 색다른 지각 경험 방식을 제공한다.
관객들은 핸들조작이나 페달을 밟는 속도에 따라서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풍경을 여행하면서 일종의 ‘기호의 밀림’으로 은유되는 도시를 체험한다.
나뭇가지 모양의 구조물을 사용해서 참여자들이 점점 더 특수한 경험을 하게 하는 작업들로는 서먼(Paul Sermon)의 《지금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Think about the People Now)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현충일(Rememberance Day) 기념 행사가 있던 다음날, 오전 11시에 런던의 화이트 홀에서 한 남자가 “지금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외치면서 분신 자살했던 실제 사건을 녹화한 필름으로 만들어졌다. 작가는 녹화했던 자료들을 서로 연결되어 있는(interlink) 파일들로 재구성하여, 참여자가 컴퓨터 시스템을 사용해서 둘러보고 다닐 수 있게 만들었다. 관람자는 조이스틱을 작동해서 웨스트민스터 튜브 역(Westminster Tube Station)에서 출발하여 화이트 홀 주변을 돌아다님으로써 작품에 참여한다. 그 구조를 통과해 가는 동안 지나치는 엠뷰런스 소리를 듣지 못할 수도 있고, 가솔린을 뒤집어쓴 채 집회에 참여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할 수도 있다. 어쩌면 시위하는 군중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이건 참여자는 전적으로 자신의 결정에 의해서 화이트 홀 주변에서 벌어지는 64개의 상황들 중 하나에 속하게 된다.
서먼은 이 작품이 본질적으로 참여자의 결정에 따라서 적당한 순간(오전 11시에서 약 2분간의 침묵의 시간) 적절한 장소(화이트 홀)에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시간 속의 한 계기”(A Moment in Time)라고 해석한다. 이 작품은 또한 참여자가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한 잠재력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 구성(Social Construction)에 대한 개념으로 이끌어갈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참여자 자신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규정함으로써 일종의 역할극에 참여하는 경험을 하게 되고,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도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한다. 경험의 전체적인 재현, 즉 작품에 대한 메타 경험(metaexperience)은 이와 같은 형식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두드러진 특징이다.
상호작용 예술작품에서 구조를 여행하게 하는 특성은 마치 미로 속을 빠져나오는 것과도 비슷한 경험을 제공하지만, 콜파에르트(Eric Colpaert)가 설명하는 것처럼 이런 작품들은 미로와는 달리 “올바른 경로를 찾아가는가 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그런 경로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상호작용적 예술 작품들은 또한 다양한 관점을 제공함으로서 주관적인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는 해석의 주관성을 작품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작품과 상호작용을 하는 사람들은 작품의 맥락에 놓임으로써 개인적인 정체성을 세워간다. 여기에서 정체성은 참가자 자신이 제시된 가능성들 안에서 이루는 선택을 반영하고, 좀더 확대해서 해석한다면, 다양한 가능성들을 실험하면서 동일한 구조 안에서 대안적 읽기(alternative reading)를 통해서 형성된다. 관객의 참여가 작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함으로서 작가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감소한다. 하지만, 주어진 관점을 선택하는 행위를 통해서 참여자들이 어떻게 관련을 맺으며, 어떤 방식의 탐험이 가능한가하는 것은 전적으로 예술가들이 지닌 표현력에 달려 있기 때문에, 작가는 무관심적이나 부차적인 역할이 아닌 중심적인 역할을 여전히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술가는 참여자가 스스로를 창조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미디어를 만들고, 그 안에서 참여자는 일종의 창작자가 됨으로서 예술가와 기술자 그리고 관람자의 구분은 더욱 모호해진다. 크루거의 《비디오 플레이스》(Video Place)는 예술가가 완결된 작품이 아니라 경험 가능한 미디어를 만들어 내는 방식의 작업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다.
원래 예술가에서 출발한 크루거는 1969년 위스콘신 대학에서 《글로우 플로우》(Glow Flow)라는 컴퓨터 예술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상호작용 컴퓨터 시스템 연구를 구상했다. 이 프로젝트는 이후 《메타플레이》(Metaplay)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메타플레이》에서 관객이 방안에 들어가면 자신의 모습이 대형 스크린에 비추어진다. 작가는 다른 방에서 그 영상을 보면서 그래픽 타블렛에 영상의 흔적을 따라 그린다. 작가가 그린 영상이 관객 앞에 놓여진 스크린에 겹쳐짐으로서 관객과 작가사이의 의사소통을 이루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관객이 팔을 움직이면 작가가 그 형상을 따라 선을 그리고, 관객이 계속 움직이면 움직임에 맞추어서 계속 선을 그린다. 결국 나중에 스크린 위엔 움직임의 흔적이 남고, 그 다음에 들어온 관객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더해가고 이런 방식으로 우연히 방안으로 들어온 관객과 작가의 돌발적인 관계를 시도하게 된다.
크루거의 작품은 1975년 이후《비디오 플레이스》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비디오 플레이스》역시 1960년대 후반부터 인간과 기계(컴퓨터)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일련의 연구과정의 결실이었다.《메타플레이》에서 입증되었듯이 서로 다른 곳에 있는 두 사람이 서로 병치되어 나타나는 하나의 이미지를 바라보면서, 마치 한 장소에 있는 것처럼 상호작용한다. 사람들은 신체에 대해서 느끼는 것과 아주 흡사한 방식으로 자신의 이미지에 반응한다.(만일 참여자의 이미지가 실시간에 반응하는 경우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비디오 플레이스》의 개념은 여기에서 출발하였다. 일반적인 커뮤니케이션은 두 지점 사이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반면에,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은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두 부분에 동시에 가능한 정보를 구성하는 제 3의 장소를 창출한다. 제 3의 공간인 《비디오 플레이스》 안에서 물리적으로는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참여자들은 자신의 이미지가 병치되어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마치 같은 공간에 있는 것처럼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미국 100주년 기념으로 행해진 ‘전화의 소개’라는 프로젝트를 발전시킨 200주년 기념행사의 주제로 제안되었던 《비디오 플레이스》는 백남준이 기획했던 《바이바이 키플링》(Bye Bye Kiepling, 1986)에서처럼 인공위성을 사용하여 유럽과 일본에 설치되어 있는 《비디오 플레이스》를 통해서 예술가가 구성해 놓은 인과 법칙의 세계인 그래픽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경험을 구성해 보려는 시도였다. 일본, 영국, 미국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로 만나, 비디오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공을 주고받는다거나, 뉴욕에서 따르는 맥주를 동경에서 받아 마시는 등의 행동을 할 수 있는 환경, 인위적인 제 3의 공간을 만들어내려 했던 이 계획은 현실적인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1975년 밀워키 미술관에서 그 개념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비디오 플레이스》안에 들어서면 참여자는 20피트정도 앞에 비디오 프로젝션을 바라보고 서 있다. 이 프로젝션은 다른 컴퓨터 그래픽과 결합되어 있는 자신의 라이브 이미지를 보여준다. 참여자 뒤에는 커다란 반투명의 형광색을 발하는 판이 놓여 있어서 컴퓨터는 참여자와 배경을 구별한다. 또 다른 카메라가 프로젝션 스크린 아래에서 참여자를 바라보고 설치되어 있다. 참여자의 이미지는 컴퓨터에 의해서 디지털로 분석되어 몇단계의 처리장치기(processor)로 보내진다. 참여자가 어떤 행동을 취하면, 처리장치는 그 행동을 자세 혹은 움직임의 비율등으로 분석하고 이에 대한 반응을 결정해 낸다. 어떤 경우에는 이미지의 색이 변하기도 하고, 또 독특한 소리를 만들어지기도 한다.

각각의 신체의 움직임은 제한된 미적 매체(resticted aesthetic medium)이다. 사실상 당신의 신체는 예술작품을 만드는 도구가 된다. 이러한 상호작용의 목적은 미적 창조물을 만드는 즐거움을 소통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매체들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관객의 신체가 움직임에 의해 조절되는 역동적 이미지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전통적인 고정된 매체에서 훈련받는 예술가들이 이러한 즐거운 결과를 만들어 내는 데에 더 탁월하다고 할 수는 없다.

기계와 인간 사이의 일대일의 인터페이스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지만, 몇 가지 하드웨어가 추가된다면, 여러 사람들이 비디오플레이스 안에 들어간다거나, 원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마치 한곳에 있는 것처럼 상호작용할 수도 있다. 참여자들과 컴퓨터의 이와 같은 상호작용 통해서 참여자들이 창조성에 대한 강한 경험을 한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크루거는 《비디오 플레이스》기술과 서덜랜드(Ivan Sutherland)에 의해 만들어진 HMD, 또는 3차원 영상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에서 ‘인공 현실'(artificial reality)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인공 현실’이라는 개념은 레니어(Jaron Lanier)가 1989년 ‘가상 현실'(virtual reality)이라고 명명한 것과 1984년 깁슨의 공상과학 소설에 나타난 ‘사이버 스페이스’을 포괄하여 만들어진 ‘인공적 반응 환경'(artificial responsive environment)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인공 현실로서의 《비디오 플레이스》는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가 아니라 여러 가지 경험들이 가능하고, 새로운 예술 장르들이 만들어질 수 있고, 기존의 예술 장르들은 새롭게 재창조될 수 있는 미디어로서 기능한다. 인공 현실과 같은 미디어를 통해서 회화는 2차원적인 평면이 없이 3차원에서 직접 그릴 수도 있다. 메사츄세츠 대학의 멀로리 (Rober Mallory)는 빛이 공간 안을 움직이듯, 두 가지 스테레오 시간의 노출을 받아들여 3차원에서 빛으로 그림을 그려 보임으로서 이와 같은 가능성을 입증했다. 마찬가지로 조각도 물리적인 재료나 중력의 제약에서 벗어나 제작될 수 있다.
공연 예술은 일반적으로 공연하는 사람과 관람하는 사람이 엄격히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상호 작용 예술과는 반대적인 입장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상호작용 예술은 관람객을 무대 환경 사이로 끌어들여 참여자로 만듦으로써, 공연 예술의 새로운 미적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예를 들어, 무용은 무용수들이 음악에 의해 만들어진 패턴에 따라 춤을 추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인공 현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 예술에서는 그 과정이 전복되어 음악이 무용수의 동작에 맞추어 진다. 무용수들이 자신의 신체를 움직여 음악을 만들어 내면, 여기에 상응해서 시각적 이미지들이 함께 펼쳐진다. 무용수는 마치 자신의 신체적 동작을 악기처럼 이용해서 ‘환경을 연주’한다. 또한 레이저 광선을 이용해서 동작을 추적해 가면, 광선의 그물망 안에 무용수를 드러낼 수도 있다. 무용수는 새로운 환경 안에서 테크놀로지의 비밀을 밝혀 내고, 그 비밀에 반응하고, 그것을 통제해가면서, 테크놀로지를 통해 스스로를 구성해 가고 표현한다. 관객과 무대 무용수가 네트워크화되면, 양자 모두 좀 더 복잡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탐험하게 될 것이다. 이런 유형의 공연은 전통적인 기준과 태도로는 적절히 감상되어질 수 없다. 새로움을 수용하고, 즐거워하며,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관객이 없이는 공연이 이루어질 조차 없다.
공연 예술의 한 분야인 연극도 인공 현실 안에서 새롭게 나타난다. 관객과 배우 사이에 존재했던 물리적인 단절은 관객의 의자에 부착된 감지장치에 의해서 파괴된다. 극의 진행에 따라 나타나는 관객의 청각적이거나 시각적인 반응은 공연 안에 포함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관객은 작품과 자신이 대화중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극중 한 인물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극장의 개념 역시 변화한다. 배우들은 동일한 물리적 공간이 아닌 지리적으로 분산된 공간에 있지만 《비디오 플레이스》를 통해 하나의 작품을 공연할 수 있다. 서로 다른 근원지에서 송신된 이미지들이 포개져서 구성되는 것이 《비디오 플레이스》공간 안에서 하나의 단일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배우들이 마치 서로 다른 문을 통해서 하나의 방에 들어오는 것처럼 각 지역의 《비디오 플레이스》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의 공간 안에 함께 있는 것처럼 지각한다. 런던에 있는 배우와 서울에 있는 배우가 하나의 작품을 공연하면, 워싱톤에 있는 관객이 이를 감상한다. 관객은 실제 장면과 전자적 장면이 혼합된 가상의 인공 환경을 바라보면서 반응한다. 완전한 인공 환경에서만 이루어진 공연이라면, 관객을 리얼리티 고글을 사용해서 작품을 여행하고 돌아다닐 수도 있다. 따라서 관객들은 하나의 작품을 보았지만, 서로 다른 작품을 관람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줄거리(story)에 대한 비중도 줄어든다.
인공 현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연은 정해진 줄거리가 없고, 우발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종종 재즈 연주에 비유된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참여자의 즉흥적인 행동을 만들어내면, 배우들 역시 즉흥적으로 반응하거나 배우들이 참여자에게 어떤 배역을 할당해주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이런 유형의 체험은 배우와 참여자 모두에게 새로운 연극의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상호작용 예술작품들은 항해하는 구조이던지 아니면 상호작용 미디어의 형식이건 간에 상호작용을 하는 사람 자신에게 반영한다. 《비디오 플레이스》, 탄넨바움(Ed Tannenbaum)의 《회상》(Recollection), 비비드 그룹(Vivid Goup)의 《만다라》(Mandala)와 같은 작품들에서 이러한 특징은 두드러진다. 상호작용을 하는 참여자의 이미지나 실루엣은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맥락안에서 함께 작용하며, 실질적인 힘으로 나타난다. 관람자는 비디오 프로젝션 위에 나타난 자신의 이미지 재현을 바라본다. 이 재현은 마치 거울이나 그림자와 같이 참여자의 움직임에 따라서 변경되며, 예술가가 공간에 미리 마련해 놓은 여러 가지 가능성과 운영상의 소프트웨어에 따라서 변형한다. 작품은 변형되거나 재구성된(recontextulize) 반영(reflection)과 행위로 이루어진다.
반영에는 거울과 같이 동일하게 반사하는 반영과 본래의 이미지를 왜곡시키고 단순화시켜 나타내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먼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반영은 나르시시스(Narcissus) 신화에서 시작된다. 나르시시스는 연못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깨닫지 못하고 연못 위의 젊은이가 자신의 사랑에 답하지 않는다고 절망하였다. 나르시시스 신화는 미디어와 관련해서 더 빈번히 거론된다.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이라고 선언했던 맥루한은 “나르시시스” 라는 말이 ‘마비됨’을 뜻하는 그리스어 나르코시스(Narcosis)에서 유래한 것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거울이라고 하는 수단으로 이루어진 자기 자신의 확장이 그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그는 확장된 자기, 또는 반복된 이미지의 자동 제어기구로 변화했다. 숲속의 요정 에코는 나르시시스의 말을 단편적으로 이용해서 그의 사랑을 얻으려 했지만 이루지 못한다. 그의 감각은 마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확장에 자기를 맞추어 놓고, 그것과 밀착하여 하나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 신화의 요점는 인간은 자기 이외의 것으로 확장된 자기 자신에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잡히고 만다는 사실이다.

한편 왜곡된 유형의 반영은 오비디우스의 『변신론』에 나오는 요정 에코(Eco)의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에코는 쥬피터가 다른 요정들을 고르는 동안 주노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서 그녀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주노는 에코의 속셈을 알아차리고서 크게 화가 나, 에코에게서 말을 하는 능력을 빼앗아버렸다. 그래서 에코는 그녀에게 말을 거는 사람의 마지막 단어만을 반복하게 되었다. 어느날 에코가 숲속에서 나르시시스를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는 나르시시스가 한 말의 끝부분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상호작용 예술가들은 마치 에코가 상호작용의 수호신이라도 되는 듯, 주어진 것을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는 활동에 골몰하고 있다.
연못에 비추인 나르시시스의 반영은 완전한 ‘거울과 같은 반영’을, 조금씩 지연되고, 왜곡되는 에코의 말은 ‘왜곡된 반영’을 보여준다. 거울과 같이 정확한 반사는 중재되지 않은 직접적인 피드백을 통해서 자기 몰입(self-absorption)이라는 닫혀진 시스템을 만들어내지만, 변형된 자기 몰입은 자기와 세계간의 대화로서, 스스로에 대한 다른 누군가의 이미지와 관련성을 검토하고, 의문시하며, 변형시킬 수 있게 한다. 대부분의 상호작용 컴퓨터 예술은 실제와 동일한 똑같은 반사가 아니라 에코와 같은 지체되고, 왜곡된 반영을 만들어냄으로서, 참여자가 단순히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숙고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준다.
상호작용을 하는 사람과 변형된 반영 사이의 관계는 입체적이다. 3차원의 공간을 살펴볼 때 오른쪽 눈이 바라보는 이미지와 왼쪽 눈이 바라본 이미지들은 조금씩 다르지만, 두 관점 사이의 긴장이 머리속의 상대적인 깊이에서 해소된다. 마찬가지로 상호작용 예술작품에서 왜곡되어 나타나는 반영은 유사한 입체적인 긴장을 만들어 내어 또 하나의 시점에서 만들어진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제시해 준다.
참여하는 사람의 변형된 실루엣이 비디오 스크린에 그려진 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작품 중 하나로 로커비(David Rokeby)의 《아주 예민한 시스템》(Very Nervous System)이 있다. 이 작품에서 컴퓨터와 비디오 카메라, 이미지 처리 장치, 신서 사이저, 사운드 시스템들이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 그 공간 안에서 참여자의 동작이나 움직임 등이 즉각적인 소리, 음악을 만들어 내게 되고 관람자는 작품에 참여함으로서 신체를 낯설게 하고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를 갖는다.
상호작용적 예술작품은 아직 초보적인 실험 단계이기 때문에 아직 해결해야 할 많은 어려움들을 가지고 있다. 창작에 있어서의 문제는 이러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아이디어들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기술적 뒷받침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첨단 기술장비를 사용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기술적 보조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경제적인 부담 역시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은 개인적인 작업보다는 기관이나 단체의 후원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작품이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유형의 상호 작용성이 제시되었을 때 관람자의 적절한 반응을 유도해야한다는 문제가 있다. 특히 작품에서 제시하는 유형들은 비교적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관람자들이 적절한 반응을 유도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대다수의 관람객들은 조심스럽고 회의적인 시선으로 작품과 마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작품이 상호작용적임을 증명해 주길 요구한다. 항해할 수 있는 작품에서는 작품에 대한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명백한 상호작용성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상호작용성을 위해서는 관객의 기대도 적절하게 예상되어 조절되어야 한다. 만일 한 행동에 대한 반응이 유형화된다면, 처음의 놀라움이나 긴장감은 쉽게 식상할 것이다. 참여는 단지 관람객의 예상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전락하게 된다. 반대로 예상에 완전히 어긋나는 반응은 관람자의 관심을 유발시키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상호작용 컴퓨터 예술은 작품이 작가에 의해서 완결된다는 전통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과정으로서의 예술을 제안하고 관람객을 끌어들임으로서 새로운 미적 경험을 영역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3. 나는 참여한다. 고로 존재한다.

예술이 자연의 모방이라면, 컴퓨터는 자연을 충실하게 모의하는 도구로서 다른 어떤 예술적 도구보다 우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정교한 기술이 예술이라면, 컴퓨터가 제공하는 기술은 인류의 역사상 최고의 정교한 기술임에 분명하다. 또한 예술은 일종의 놀이이다. 물론 모든 놀이가 예술인 것은 아니지만, 예술적 체험에서 오는 즐거움은 놀이와 유사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컴퓨터도 하나의 놀이로서 예술적 즐거움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예술이 가상의 현실이라면, 즉, 가상적인 것을 만들어서 가상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몰입되어질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면, 컴퓨터는 최고의 몰입환경을 만들어내는 미디어로 예술일 수 있다. 현실을 추상화시켜 미적으로 만들고, 증폭시키는 예술적 가상은 무엇보다 컴퓨터 안에서 완벽하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컴퓨터 예술은 기존의 예술 작품이 가지고 있던 ‘물질성’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예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왔다. 《비디오플레이스》, 《지금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또는 《읽혀지는 도시》등의 상호작용적인 작품들에서 보았듯이, 예술가들은 완결된 대상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들은 새로운 경험, 새로운 관계성을 구성하는 작업에 골몰한다. 관람자가 참여하지 않으면, 작품은 아무 의미가 없다. 작품의 의미는 작품과 참여자의 상호작용성이 이루어지는 순간 성립하기 때문에, 대상성 보다는 관계성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된다. 상호 작용, 상호 대화, 다중 감각성들에 대한 문제의식과 정서적, 정신적 상태 그리고 시간적, 공간적인 차원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이다. 그러므로 이런 상호작용적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개념적이다. 참여자의 행동이 환경으로부터 반응을 유도해내고, 이때 나타나는 반응은 일상적으로 예상되는 결과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참여자들은 생각하기를 강요당한다. 환경에 참여하는 동안 참여자는 계속해서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을 개념화한다. 관계가 변하면, 그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개선하거나 혹은 변화의 유형에 함께 묶여있는 또 다른 것들을 생각해간다.
상호작용 컴퓨터 예술에서는 ‘행동과 반응’이 주요 문제이기 때문에, 참여자의 행동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 그러나 행위성에 대한 실험은 상호작용 컴퓨터 예술에서 새롭게 시도된 것은 아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행위성에 주목하였다. 예를 들어 드 쿠닝(William de Kooning)은 정신의 행위를 그림으로 옮겨내었고,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은 자신의 육체적인 행위를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하지만 상호작용 예술에서 예술가들은 자신의 행위가 아닌 또다른 육체의 움직임, 즉 참여자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움직임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는 등 행위의 주체에 대한 범위를 확대시켜서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행위를 중심으로 한 상호작용성은 육체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가져왔다. 상호작용 컴퓨터 예술작품에서 참여자의 이미지와 행동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그로 인해서 새로운 방식의 미적 경험이 발생한다. 생존을 위한 도구로서의 육체가 아닌 육체 자체를 바라보는 시선을 제안한다. 컴퓨터 테크놀로지는 종종 육체를 배제한 정신의 유희를 조장하고, 육체와 정신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한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컴퓨터 미디어를 적극 사용하는 상호작용 예술 작품은 육체 그 자체를 경험하게 한다. 육체가 없이는 어떤 상호작용성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육체는 아주 주요한 계기이다. 비록 스크린 위에 나타나는 육체의 이미지는 만화같이 단순화되거나 실루엣만 나타나는 식으로 왜곡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참여자는 단순화된 육체의 이미지를 가지고 육체를 새롭게 경험하면서 작품과 소통한다. 이러한 경험은 수동적인 미적 관조가 아니라, 언어나 또 다른 상징체들의 매개가 없이 컴퓨터가 만들어낸 이미지들과 참여자 사이의 즉각적이고도 직접적인, 능동적인 의사소통의 과정, 더 나아가 새로운 지각을 통해 나타나는 새로운 미적 경험으로 자리한다.
상호 작용적인 컴퓨터 예술은 관객과의 의사소통 “과정”을 중시함으로서 작품으로서의 전통적인 예술 개념이 지니고 있는 권위를 파기하려 한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종종 20세기 초반에 성행하였던 퍼포먼스(performance)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퍼포먼스는 그것을 행하는 집단에 따라서 그 특징이 조금씩 차이가 나기 때문에, 명확한 규정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퍼포먼스는 예술이 가지고 있는 구속에서 벗어나 관객들이 일상에 매몰되지 않고 깨어있게 하며, 그러기 위해서 예술가와 관객이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장(field)을 마련해야 한다는 이상을 공유하였다. 그들은 “대문자 A로 시작하는 예술(Art)이 갖는 엄숙, 신성, 고상, 심각성을 파괴”하고, 삶과 예술, 종교가 하나로 어울어진 곳으로 되돌아가는 총체적인 삶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연극이나 오페라, 무용 등의 전통적인 공연 예술이 무대와 객석이라는 이분법적이고, 수동적인 관조를 제안하는 반면에, 퍼포먼스는 고대의 제의(ritual)와도 같은 원형적이고, 능동적인 관조를 제안한다. 퍼포먼스는 프로시니엄 아치(proscenium arch)라는 형식을 깨고, 직접적으로 참여하게 하여 역동성을 체험할 수 있게 하면서, 주제와 객체의 이분법이 소멸시켰다.
퍼포먼스의 이러한 주요 특징들은 ‘플럭서스'(Fluxus) 그룹의 작가이자 이론가인 켄 프리드만이 제시한 11개의 규준이 잘보여준다. : ①세계주의 ②인생과 예술의 통합 ③실험주의, 과학적 공동작업, 우상파괴 ④우연성 ⑤놀이정신 ⑥단순성과 절제 ⑦함축성 ⑧예증주의 ⑨특수성 ⑩시간성 ⑪음악성
상호작용 컴퓨터 예술 역시 예술가(창작자)와 관람자의 이분법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퍼포먼스의 역사와 맥락을 같이 한다. 전세계적인 통신망은 예술의 세계화를 이룩하였다. 컴퓨터가 만들어낸 단순한 이미지들에 대한 참여자의 반응은 다양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같은 작품 안에서도 참여자들은 각자의 결정과 반응에 따라 서로 다른 경험을 한다. 그것은 마치 놀이처럼 직접 참여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고, 골치 아프고 심각한 경험이 아닌 즐거운 경험이다. 가상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미적 체험에서는 새로운 개념의 공간성과 시간성이 강조되면서 과정에 주목한다. 어디에 도착하는가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분야인가도 중요하지 않다. 효과적인 관계를 구성하고 효과적인 소통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다양한 예술 장르가 함께 어울어지기 때문에, 장르의 구별 자체가 무의미하다. 작품은 하나의 거대한 종합예술, 총체 예술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퍼포먼스가 우연성 마저 계산에 넣고 있는 반면, 상호작용 예술은 비의도성, 무작위성, 계산되지 않음의 특징이 더욱 강조되어 있다. 따라서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상호작용 예술은 해프닝(Happening)에 더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해프닝은 완전한 우연성에 내맡긴 것으로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까지 활발하게 벌어진 형식이다. 해프닝은 비연극적이고, 탈영역적인 연극 형식, 우발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해프닝 역시 주제, 소재, 행위의 변화에 따라서 다양한 형식으로 전개되는데,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없애려는 시도가 일반적인 경향이다. 해프닝적 회화는 행위자체를 표현으로 삼아 행위성을 강조하였다. 미래파와 다다의 영향이 짙게 배어나는 회화에서 행위성의 강조는 직접적으로 폴록과 케이지(John Cage)로 대표되는 뉴욕 화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한때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올덴버그(Class Oldenburg)는 회화와 조각의 결합을 꾀하면서 대중의 행동을 작품에 끌어들였다. 그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해프닝을 현실 전체의 원동력으로 받아들여, 다시 변경된 현실을 강조하기 위한 욕망으로 삼았었다. 예술가가 일단 경험적 상황을 구성하면, 그 이외의 모든 행위와 반응, 과정, 결과는 그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참여자의 우연적 행위에 전적으로 내맡겨진다.
그러나 퍼포먼스와 해프닝은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물고, 예술의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관객에게 다가가려 했던 목표에 도달하는데 실패하였다. 미술관을 벗어나 열린 공간으로 나온 행위들은 현실과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그들의 행위에 등을 돌렸다. 행위 예술가들의 바램과는 반대로 관람객들은 퍼포먼스와 해프닝 안에서 함께 소통하기를 주저하였다. 하지만, 상호작용 예술은 하나의 시스템 안에 서로 관련되어 있는 요소들을 구성하는 작품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참여하는 놀이와 같은 요소로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에, 참여자들은 주저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사람이 아닌 기계를 상대로 한 상호작용은 상식에서 벗어난 상황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인공 환경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은 일상이 아니라는 확신에서 오는 안도감은 관람객들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상호작용성을 즐기고 더욱 능동적으로 개입하게 한다.
상호작용 예술은 넓게는 퍼포먼스의 맥락 안에서,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일종의 해프닝의 연장에서, 예술과 기술의 접목을 통해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모색한다. 이 예술적 상황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도,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지각방식을 제공해줌으로서 예술과 기술, 작품과 관객, 예술가와 관람자 사이의 역동적인 관련성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4. 또 다른 가능성을 향해서.

예술은 이제 더 이상 대상의 재현에 머무르지 않는다. 예술은 적극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고, 세상을 구성해가는 작업이다. 상호작용 예술 작품들은 전통적인 예술계의 틀에서 벗어나 많은 것들을 실험해간다. 예술과 기술을 접목시키고, 관람자를 적극적으로 개입시키며, 공간적 한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창출해 내기도 한다. 일상적으로 지나치는 신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예술개념과 많은 부분 상충하는 컴퓨터 예술, 특히 상호작용 예술은 아직 확고한 예술장르로 자리잡지 못했다. 예술이 아니라는 목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영화가 예술로 자리잡는데 100여년의 시간이 걸렸다. 컴퓨터의 역사는 겨우 50년 정도이고, 컴퓨터 예술이라는 말이 등장한지는 불과 몇 십 년 밖에 되지 않았다. 컴퓨터를 통한 예술이 가능하냐 아니냐 하는 공허한 논쟁보다는 컴퓨터의 예술적 응용가능성들을 실험하고,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한 준거틀을 마련해 감으로써 예술이 보다 풍부한 의미를 갖도록 하는 일이 더욱 시급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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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영상과 자율적 이미지

디지털 영상과 자율적 이미지

조광석

최근 컴퓨터의 발달과 함께 영상문화에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단순히 컴퓨터의 진화로만 생각할 수 없는 멀티미디어라고 하는 복합적인 기계설비의 진보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는 미술분야에서 특이한 현상을 보게된다. 이미 사진이라는 기계화된 영상 때문에 미술은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받기도 했고, 그것과 다른 시각을 추구했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등장한 비디오설비를 작가들은 적극적인 매체로서 활용하게 됨으로써 미술에서는 소위 비디오아트라는 돌연변이를 낳게된 것이다. 이러한 미술의 출현은 좀더 다양한 기술의 수용을 이루게된다. 말하자면 최근의 첨단 기술의 수용이 자연스럽게 이루게되는 것이다. 멀티미디어를 실행하기 위한 체계적 해결방식은 일단 이미지의 디지털화의 전환과 그에 따르는 공간 개념의 변화가 있게 된다. 이러한 변환과정의 결과는 미술이라는 전통적 예술개념과 다른 작품의 해석과 이해가 나타나고 생산과 소비체계의 순환 방식이 경제적 논리를 거부할 수 없게된다.
비디오아트의 출현은 단순히 비디오 매체의 출현 때문만은 아니다. 그때 이미 있었던 비재현적 방식으로 오브제의 사용을 차용하게되고 그와 함께 감상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발생시킨다. 즉 근대적 물질생산 방식아래 예술은 제작 방식의 전환으로 감상자 개개인에게 현실적 사건에 대한 개념적 파악의 제시로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영화와 같은 영상 예술이 드라마틱한 서술방식에서 출발하여 집단적 프로젝트성격을 지닌 TV로 진화되는 과정은 대중의 문화소비체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그들 나름의 예술적 취향을 형성하게된다. 즉 벤야민이 말하듯이 오늘날의 경제조건아래서 예술의 생산과 수요방식은 전환이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하부구조-예술 생산과 소비구조의 변화는 일련의 예술개념의 변화를 보게된다.
영화의 본성은 카메라라는 기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영상의 수용체계가 발전된 동영상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르네상스의 원근법을 기계적 수단을 차용하기 때문에 회화적 범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영화는 회화적 시각의 연장에서 벗어나 효율성과 합리성을 기반으로 근대세계의 속도감을 재현하고 있다. 이미지의 활용에서도 기계적 재현으로 나타나는 영상의 직접성은 생활경험을 파편화하고 일상생활을 표면 위로 부상시킴으로써 감상자에게 새로운 유대감을 형성하게된다. 영상의 표피성의 결과는 일반 대중에게 쉽게 수용할 수 있고 작품의 내용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되고 좌절된 산업노동자나 도시근로자, 즉 비지성적 이상을 지닌 보통사람들의 꿈을 허위적으로 충족시켜주는 통속화를 면하기 어렵게 된다. 따라서 공통의 관심사가 형성되고 공동의 소비가 이루는 체계 안에서 예술적 취향은 단순성을 찾게된 것이다.
영화 체계에서 발전된 비디오는 TV라는 공중 매체와 연계되면서 좀더 복합적인 영상소비의 동질성을 보게된다. 따라서 비디오 작품에서는 다른 영상예술에서보다 더욱더 현실 참여와 즉흥성이 나타난다. 그렇지만 비디오가 미술적 범주에서 출현했을 때 기존의 미술과 연계로 인하여 예술적 지위의 애매함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 그중 하나가 작품 자체가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스스로 순수한 내재적 법칙에 의해 사회와의 관계에서 자율적인 위치를 찾는 비디오 미학의 자율성을 추구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작품에 표현된 이미지를 통해 사회의 현상을 직접적으로 반영하여 비판과 총체적인 교환적 가치를 찾는 것이다. 앞의 경우는 순수미학의 추구에 따른 일반 대중과의 격리현상을 보게된다. 기존의 미술이 취하고있던 사회 내에서의 이데올로기와 함께 전위적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다. 후자는 작품이 사회의 규범과 병행하며 사회적으로 유용한 가치를 추구하는 방법으로 기존의 미술작품과 공존하며 비디오의 본성인 영상의 전자구성으로 관객에게 적극적 개입이 가능하게 하고 있다.
후자와 같은 비디오작품 제작 방식이 컴퓨터와의 결합은 또 새로운 전환의 시점을 보게된다. 영상매체에서 컴퓨터의 사용은 기존의 영상체계 위에 제작 방식에 있어서 영상의 디지털화이다. 영상의 디지털화는 이미지의 조작의 개연성을 남겨주고 있다. 영상이 전자구성으로 전환되는 현상은 이미지 재현의 동일선상에 위치하지만 가상적 이미지의 출현을 보게된다. 그리고 시각상의 영상 가치에 대한 적응이 초기 단계에는 직접적인 경험과 동일선상에서 조회되고 수용되지만 점차 본래의 경험과 관계없는 가상의 공간으로 진입하게된다. 이미 영화에서 익숙히 사용되었던 몽타주도 그러한 심리적으로 이미지의 가공성을 드러내지만 디지털에서는 조직적이고 기계화된 영상처리에서 이미지자체가 만드는 상황적 기호로 대치된다.
디지털 영상에서는 이제까지 르네상스적 입체적 공간인식과 다른 시간적 공간이식으로 전환한다. 결국 디지털 영상은 스크린 상에 이미지투영이 아니라 개개인이 경험하는 사유체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동영상(시간의 변화에 따른 공간인식)과 심적 공간개념의 문제가 된다. 따라서 디지털 영상을 보는 것은 기존의 영화에서와 다르게 일상의 시각경험과 구분되고 있다. 영상을 보는 행위는 영상 위의 세계를 재구성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시각으로 지각될 수 있는 의식적인 이미지 재현의 위치를 평면 밖으로 이끌어 내어 사유함으로써 지각될 수 있는 가(simulation)적인 공간으로 전개된다. 그 가상적 공간은 영상과의 관계에서 영상 위의 실체처럼 보는 방식과 영상 위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대상이 만드는 세계를 보는 것, 영상 위의 맥락으로 보는 방법이 있다. 여기에서 이미지는 단순히 대상의 충실한 복제물이 아니다. 그것은 영화영상과 달리 회화에서처럼 사실성에 대한 특수한 복제성을 벗어나 이미지의 재구성에 대한 암시가 존재한다. 따라서 영화가 기계적 재현을 넘어서 인위성을 부여받게된 것은 몽타주를 통해서이라면 비디오는 기계적 영상의 지위를 디지털로서 예술적 인위성을 회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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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y-Made와 영상이미지

Ready-Made와 영상이미지

조광석 (미술평론가, 경기대 교수)

20세기 미술사의 흐름에서 중요한 이슈는 Ready-made의 출현과 영상이미지의 사용이라 볼 수 있다. 이 두 요소는 미술, 특히 회화적 표현의 한계에 대한 발상을 바꾸어놓은 계기가 되었으며 작품제작 방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의 기반은 사회적인 요인과 미술 내적인 원인이 함께 한다.
사회적 요인으로서는 산업혁명이후 변화된 경제구조와 그에 따른 시민들의 예술수용의 변화를 이루게된 것이다. 한편 이미 깊게 뿌리를 내린 회화의 문제점을 재확인하게 하고 미술 작품의 소비방식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였다.
20세기동안 미술경향의 중요한 전환동기는 사회변화에 따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확산은 이제까지 소외되어왔던 소시민들에게도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고 점차 그들의 취향을 예술에 반영하게된 것이다. 그리고 풍요를 기약하는 대량생산된 상품과 그것의 소비를 촉진시키는 상술의 발전은 생활환경을 변화시키게 된다.

작품내용에 있어서 변화의 근거는 재료와 그것을 다루는 기술의 변화에 관련이 있으며, 그러한 미술 작품에 대한 평가도 서서히 진화를 하고 있음을 말한다. 흔히 새로운 technology를 사용하는 미술 작품의 성향은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들은 미술 작품을 이제까지와 다른 시각효과를 통하여 우리시대의 욕구를 단순한 삶의 반영 이상으로 끌어올리려는 시도라 평가된다. 여기에서 정보제공을 위한 기능적인 목적으로 개발된 매스미디어는 예술에 다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사회에서 매스미디어는 점차 그 자체가 소비의 주체로서 확산 되어가게 되어 작가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으로 전환된다. 매스미디어의 출현은 정보를 유포하며 수용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도였으나 점차 수용자의 모든 관심을 독점하는 현상을 보게된다. 메시지가 소비의 대상으로 전환되고 매스미디어를 통한 메시지의 유통과정이 상호 교환적이며 오히려 소비자의 취향을 조종하는 역행되는 현상이다.

근래에는 매스미디어를 통한 메시지를 생산자가 상업적 목적으로 일방적으로 대량 유포시키게되며 메시지의 수용자 쪽에서는 자기 방어적 선택을 위해, 정보의 수용 욕구를 함께 반영하는 상호보완적 상황에 이르게된다. 이와 같은 상황을 비판적으로 대응하는 작가의 출현을 보게된 것이다. 소위 비디오 아티스트라 불리우는 작가들이다.
이들의 작업은 ‘비디오 아트’라고 일컬어지는 영상예술의 등장을 보게 했다. 비디오-아트에서는 텔레비전 모니터가 작품으로 사용되고 모니터 안의 영상 이미지와 함께, 모니터는 그 자체가 일상적인 사물(objet)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 새로운 오브제로서 모니터는 영상이미지와 함께 시각적인 상황을 공유하게 되어 더욱 더 상상적 세계로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초기 비디오-아트의 경우 영상이 방영되는 환경을 작품으로 포함시키지 않고 그 영상 이미지만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영화처럼 내용의 흐름에 집착하게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미술 작품에 등장하는 비디오-아트는 최소한 비디오가 방영되는 장소나 모니터를 작품 안으로 포함시킴으로써 일상적인 영화에서 나타나는 이야기 중심의 영상 이미지와 비디오-아트 이미지의 애매함을 벗어나게 된다.
여기에서 영상 이미지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은 동영상의 흐름으로 인한 이미지의 변화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특히 동시에 녹화되고 재현되는 비디오의 발전으로 영상 이미지에서는 실제 삶을 그대로 촬영하여 재현된 허구로서 받아들이기보다는 실제와 동일하게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대상에 대한 재현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회화와는 다르게 현실 자체에 대한 단순한 흉내내기가 아니라, 이미지의 사실성을 고착화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는 일반적인 사건을 기록하는 스냅 사진의 사회적 기능에서 파생되고 있다. 우리는 기록 사진의 이미지를 통해 마치 현장을 포착하듯이 실제의 증거물로 확실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같은 영상예술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공중파 방송으로서 TV의 출현이다. 일반 가정에 보편적으로 TV가 보급되면서 영상문화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고 미술에서도 극단적인 변화를 이루게된다. 이미 새로운 시각예술로서 자리를 잡은 영화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있던 TV는 녹화방식의 개발과 근래에 도입되기 시작한 디지털화의 작업으로 이제까지 영상에 대한 이해와 전혀 다른 시뮬레이션으로 정착되고있다.

미술내적 변화로서 회화의 한계는 19세기까지 문화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해왔던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의 쇠퇴, 신흥 지식인들의 확산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있다. 전통적 회화는 기본적으로 일회적 가치에 기반을 두고있다. 작품은 작가의 손에 의해 직접 제작 된 기능적 손의 역할에 의해 결정되어지었다. 작품의 제작은 작가의 천재적 재능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며 수공업적 생산 방식에 의해 일품회화라는 아우라를 만들고 있었다.
여기에서 작품의 소유와 감상은 철저히 개인적 능력에 의존하게된다. 그것은 어느 면에서는 지적 우월성을 추구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게된다. 결국 귀족이나 부르주아처럼 사회특권층에 대한 우월성을 옹호의 자세라 볼 수 있다. 이는 19세기까지 사회의 모든 변화를 주도하고있던 지식 상류층의 문화로 형성된다.

이러한 문화적 성향은 20세기 동안 모더니즘으로 일컬어지면서 지적 이데올로기를 확산하지만, 그 한계는 추상미술과 같은 장르에서 확실하게 나타난다.
추상미술은 미술계에 주도적인 경향으로 자리를 잡게되지만 실제 감상자에게는 수용하기 어려운 추상미술의 확산은 주로 20세기 중반에 중요한 지위를 형성하지만 그 발단은 이미 19세기 인상주의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이는 모더니스트들에게는 모더니즘의 역사적 근거를 제공하는 기반이 되지만, 다른 면에서는 추상미술이 19세기의 잔재로 평가하게된다. 따라서 20세기말까지 그 위력을 발휘하고있으며 현재의 다양한 미술형식에 영향력을 보여주는 추상미술은 19세기 패러다임에 넣어야할 것이다.

반면 Ready-Made는 대량생산이라는 생산 방식으로 작가의 일품제작을 무시한다. 이는 산업사회의 의식구조의 반영이면서 기존의 질서를 넘어서게 하고 있다. 이는 작품의 대량 복제와도 관련이 되지만 이미 작가의 제작 기술에 대한 무시에서 출발하게 된다. 여기에는 작가의 수공적 손재주가 없이도 작품제작은 하나의 질서로 나타나게된다.
물론 초기 전위작가들이 단순히 제시하였던 ‘선택된 오브제(Object Trouv )’는 작가의 기존의 예술과 사회에 형성된 질서에 대한 반발적의도가 강하였지만 전후(戰後) 새로운 세대들은 오히려 능동적 자세로 수용하게된다. 20세기 초반에 출현한 Ready-Made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알레고리를 완전히 제거한 것은 아니다. 그것의 수용 방식에서 다른 가치를 발견해내는 것이다. 즉 고도로 발전된 산업사회에서 일반적 소비와 예술소비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20세기동안 이룬 문화 예술의 변화는 소수의 수용자에 의존하는 주관주의 예술에서 수용자의 확대를 추구하여 경제적 수익을 우선적인 가치로 두는 경향이 나타나게된다. 따라서 새로운 예술은 다수의 참여가 가능한 예술의 형식을 요구하게되고 그것은 경제적 가치와 일치된 것으로 평가될 것이다. Ready-Made와 영상이미지는 ‘세기말’과 ‘밀레니엄’의 정서에서 나타나는 부정적 측면을 벗어나 문화의 수용자에게 희망적 사건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현재의 상황은 서구 물질문명에 대한 절망감을 안고있으며 자연과 인간 본성으로의 회귀라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예술 형식으로 진행하게 하고 있다. 이 Ready-Made와 영상이미지는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이분법을 벗어나고 있다. 작가는 작가중심에서 수용자중심으로 전환하게 되고 저급문화의 활성화, 수용자중심의 기회주의, 파괴적 문화의 불가피한 수용, 창작적 문화의 소멸, 인종차별적 경향, 사회 결합의 약화, 하위 개념의 확산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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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적 예술, 사이보그적 생태: 전자매체시대의 몸의 새로운 숙명

사이보그적 예술, 사이보그적 생태: 전자매체시대의 몸의 새로운 숙명

김원방(미술평론, 미학)

우리는 끊임없이 살아있는 형태 속에서 그 가변성의 극단적 한계를 추구한다. – H. G. Wells

유인원, 사이보그, 여성, 이들은 모두 서구의 진화론적, 기술적, 생물학적 서사에 있어 동요하는 위상 속에 있었다. 이들은 문자 그대로 ‘괴물’이다. 이제 괴물들은 ‘의미’한다. 우리는 예감에 차있고 소박하지만은 않은 이 괴물들이(에 관해) 만드는 지식들에 대한 생물정치학적, 생물테크놀로지적, 페미니즘적 이야기들을 다변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힘에 있어 차별화되고 고도로 배척되는 괴물들의 존재방식은 가능한 다른 세계들의 징표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분명 우리가 책임지고 있는 세계의 기호들이다. – D. Haraway

권력에의 의지란 차이를 수용하는 힘이다. – F. Nietzs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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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국내의 테크놀로지 관련 논의, 특히 미학적 논의의 장에 있어, ‘사이보그’란 개념은 좀 생소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 글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바는, ‘사이보그’라는 것을 미래 기술의 어떤 특수한 변종적 현상으로 다루거나, ‘Science Fiction’ 계통의 대중문화적 취향을 옹호 또는 비판하거나, 혹은 ‘테크놀로지’가 주도권을 잡고있는 현 예술과 문화의 흐름 속에서 ‘사이보그 예술’이라는 새로운 쟝르의 도래를 알리려는 것도 아니다. 이 글의 목적은, ‘테크놀로지-인간-예술’의 세가지 개념의 연쇄를 ‘사이보그적 생태성’이란 용어로 재정의하고, 그 세목을 살피고, 그럼으로써 한편으로는 기술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새로운 진화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사이보그 개념을 통해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던 미학과 세계관으로 회귀함으로써, 하이테크놀로지의 온갖 재현물들로 구성된 기이한 미래와 이제는 전혀 쓸모없어 보이는 과거를 이어주는 통로를 마련하는데 있다. 즉 우리는 사이보그란 것을 단지 공상과학이나 만화가 만들어낸 괴이한 구경꺼리가 아니라, ‘삶과 예술이 가능해지는 조건’이라고 하는 확장된 은유로 해석하려는 것이다.

‘사이보그(cyborg)’의 어원은 잘 알려져 있듯이 ‘cybernetic organism’으로부터 온 신조어이며, 인간의 지능에 의해 촉발된 인공적이고 확장된 육체에 적용되어 말하여 진다[1]. 즉 그것은 인간(유기체)과 기계가 결합되어 같이 작동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계-인간’의 결합적 상태에서 양자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은 많은 과학자들과 문학가들에 의해 일찌기 이야기되어 왔으며 맥루한(Macluhan)은 미래의 매체문화 속에서의 사이보그적 생태를 예견한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전자매체들의 일반화를 통해 우리는 이미 ‘사이보그적 생태계’의 깊은 곳에서 살고 있다. 습관적으로 우리가 지니고 다니는 물건들과 의복들, 그리고 헤드폰, 오디오, 휴대폰, 호출기, 캠코더, PDA, 모뎀, 계산기, 심지어 ‘Data glove’에 이르기까지, 이것들은 몸과의 통합체계 속에서 기능하며, 우리는 기계와 상호호환되고, ‘단백질’과 ‘실리콘’이라는 두개의 범주는 통합되어 버린다. 나의 신경계는 지속적으로 디지털망에 접속되고, 변형과 확장이 가능한 사이보그가 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더욱 더 의류와 비슷하게 된다. 전자매체적 환경 속에 동화된 이러한 존재를 인간인가 기계인가를 구별하는 것이 더욱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이보그적 존재는 “단순한 조합(일반적 도구의 경우에서와 같은) 이상의 상태이다. 사이보그는 기계란 것이 의식의 도움을 받지않고, 신체의 동질적 통제(homeostatic control)의 상태 속에서 작동하는 그러한 특이한 관계를 수반한다.”[2]소위 신체의 ‘morphing(변형)’, ‘borging(사이보그화)’ 등의 표현은 그러한 상호접합과 변형의 상태를 의미하기 위해 생겨난 신조어들이다. 사이버 문화에 있어 신체란 것은 외부성에 의해 침투가능하며, ‘근대적 신체’, 혹은 ‘비트루비우스적(Vitruvian) 신체'[3]의 통합성과 신성함은 티타늄 합금으로 된 무릅관절이나 ‘전자 팔’, 합성혈관 등의 보철(prosthesis)에 의해 침해당한다. 이러한 보철적 생태성은 의학적 대체물뿐만 아니라 건축적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어 나가며, 디지털 시대의 건축가와 도시설계가들은 주변의 공간이 바로 전자정보로 가득찬 보철행위의 영역, 즉 ‘사이보그적 공간’이란 관점에서 환경과 육체의 관계를 재지형화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를 맡게 되었다.[4]

대중문화의 영역에서는, 특히 80년대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SF영화들, 그 예로 영화 < 로보캅>, <론머맨>, <터미네이터>, <기억상실증에 걸린 죠니/Johnny Mnemoniac> 등을 통해 폭발적인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단지 음울한 사이버 펑크적 ‘테크노-디스토피아’를 ‘볼꺼리’화한 외양을 지니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화 속에서의 ‘후기인간(post-human)’의 출현에 대한 예감과, ‘변질된 인간’이 내포하는 상실의 멜랑콜리를 드러내주고 있다. 고전적인 SF문학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의 ‘사이버펑크 문학’ 속에서 사이보그적 존재들은 비록 오래된 패러다임으로부터는 벗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폭력적이고 남성중심주의적인 미래를 상정하며, 그러한 사이보그의 감정과 느낌은 ‘인간주의적’ 차원 속에서 함몰되어 버린다.

우리가 사이보그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로 삼고 집중적으로 참고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다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에 의해 정의된 사이보그인데, 그 이유는 비록 그것이 후기자본주의의 가장 암울한 기호전쟁 속에서 사이보그를 찾아내고 있긴 하지만, 이로부터 인간과 기계,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가장 급진적인 대화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고갈될 수 없는 정치적 행동의 가능성을 갱신해내기 때문이다.

[담론적 몸으로부터 사이보그적 몸으로: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우리가 몸이란 것이 삽입되고, 칠해지고, 쓰여진다 라고 말할 때, 그것은 몸에 대한 담론 – 즉 몸이 문화적 결정론의 맥락 속에서 재현되고, 몸이 문화적 기호의 매개체가 되는 과정에 대한 – 을 행함을 의미한다[5] . 서구문명을 통해서 여성은 너무나 오랜 동안 ‘객체화된 살’로 환원되어 왔으나, 후기구조주의와 페미니스트들의 몸 정치학에 대한 관심은 전통적 몸 개념을 ‘재현의 전투장소’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특히 80년대 초 이후로, 우리의 신체에 대한 지식이란 것은 몸이 자연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생산되는 것이라는 관점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성차화(gendered)된 몸의 문화적 구축’과 투쟁하려 한 페미니스트들의 시도는 다시 한번 과학과 기술에 의해 급격한 전환을 맞게 된다. 기술과 과학이란 것을 합리성의 남성적 숭배라고 비난하던 초기 페미니즘 비평들은 이제 “새로운 과학과 기술의 전개(유전공학 같은)와 그리고 지식과 진리의 사회적 구조화라는 철학적 프레임워크들이 얽혀 만드는 질문의 다발에 자리를 내주었다.” [6] 정보화시대의 여성적 신체와 기술의 접합을 응시하면서, 해러웨이나 나오미 울프(Naomi Wolf) 등의 페미니스트들은 몸 전반, 특히 ‘여성적 몸’에 대한 깊은 고정관념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몸(특히 여성의 몸)이란 것은 한때, 특히 80년대의 일종의 ‘광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속에서는, 담론의 재현적 효과로만 간주되고 종국에는 사라지는 단계에까지 이른 적이 있기도 했다. 이러한 ‘몸의 포스트모던적 사라짐’은 기술과 매체의 폭발 속에서 몸이 증발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아서 크로커(Arthur Kroker)의 맥루한적 설명을 따르면, 오늘날 ‘자연적 몸(natural body)’은 사라지고, 기술적으로 생산된 ‘모조물적 몸’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현재의 문화를 지배하는 바, 몸에 대한 광적인 문제의식 – Aids, 약물중독 등 – 은 통제와 안전에 대한 사회적 불안의 기호들로 나타난다. 그러한 ‘광적인 몸’은 “몸이란 것이 극단적으로 다시 부활되고, 가공적 주체성의 마지막 폭발처럼 나타나는 그러한 문화의 쇠락을 가르키는 징표이다” [7] . 그리하여 몸은 단지 ‘시대에 뒤떨어진(obsolete)’ 것이 되었고, 수많은 기술적 확장들에 의해 대치된다는 것이다. ‘광적인 몸’의 수사학적 범람은 기술적 장치에 의한 대체를 통해 자연적 몸의 사라짐으로 이어지고, 다시 그것은 ‘사회성(the social)’의 사라짐 – 즉 종말론 속에서 함께 일상을 살아나가는 데에서 생기는 사회적 유대성 – 의 최종적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A manifesto for Cyborgs, 1985)’은 우리 생활에서 이미 지배적인 신기술의 편재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기본 전제를 고수하면서도, 동시에 나아가 기술을 새로운 사회적 변화를 위해 차용하고 합병하라는 제안이다. 몇몇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테크놀로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울한 숙명론적 입장들과는 반대로, 더욱 진보적이고 정치적인 의제(agenda)로 짜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독해는 기본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것이 ‘후기자본주의논리의 문화적 지배인자’로 규정한 프레데릭 제임슨의 생각을 기본적으로 따르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전반기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은 공장, 파워 플랜트 등 하이모더니즘의 기념비들을 통해 시각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기술이란 것은 더이상 동일한 재현의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8] 전화, 라디오, 텔레비젼, 컴퓨터 네트워크에 이르기까지 퍼져있는 우리의 소통망을 ‘재현할 수 없음’, 이것은 곧 오늘의 다국적 자본주의의 전체적 세계시스템을 재현하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전체적 인식의 지도(cognitive mapping)를 발명하고 투사해야 한다는 과제가 새로이 주어진다”[9] .

해러웨이는 전통적으로 남성적(macho)이고, 군사산업적이던 사이보그에 대해 페미니즘 내부의 입장에서 보아도 매우 도전적이고 일탈된 읽기를 시도한다. 많은 기존의 페미니스트들, 예를 들어 클라우디아 스프링거(Claudia Springer) 같은 경우, 터미네이터나 로보캅 같은 존재는 단지 어떤 향수, 즉 남성적 우월성이 당연히 인정되던 시대, 기술이란 것을 단지 남근적 힘을 되찾기 위한 은유로서 필요했던 시대의 노스탈지어를 표현한다고 보았다[10] . 또한 문화이론가 스콧 버캣맨(Scott Bukatman)은, “로보캅이나 터미네이터 같은 존재들이 ‘인간의 쇠퇴’라는 불안의 지속을 내포하고 있고, 따라서 그 목적은 원래의 인간성을 재정의하려는 것이다. (…) 우리의 존재론은 표류한다”라고 말하면서 사이보그적 이미지의 역기능을 비판적으로 드러낸다.”[11]

사이보그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관점들에 대해 해러웨이는 선언한다: “사이보그는 우리의 존재론이며, 정치학이다.”[12] 로보캅이나 기타 무장한 사이보그들처럼 결국은 인문주의적 목적을 지향하는 군사산업적 목적의 사이보그와는 달리,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는 모호한 혼성적 융합과 차이의 지속에 의해 동요하는 ‘미래의 인격화(personification)’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기계와 유기체, 문화와 자연, 모조물과 원본, 공상과학과 사회적 현실을 한개의 몸 속에 화해시킨다. 잠재적이고 금기된 융합의 쾌락 속에서 태어나며, 부분성, 내밀함, 변태성을 단호히 수용하는 하나의 ‘유토피아적 괴물’로서의 해러웨이적 사이보그는 해결되거나 억압되기를 거부하는 차이(성, 인종을 포함한 모든 것의)의 살아있는 심볼이다[13] . 해러웨이가 “우리는 모두 사이보그이다”라고 선언할 때, 그녀는 이 말을 유기체와 기계 사이에 조합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학적 의미로,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리는 이제 통합된 산업적 사회가 아니라 다형태적(polymorphous) 정보시스템이 관통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라고 하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요약하면 기술이란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든 대립적 양극성을 전치시키고 있다는 의미이다.

“20세기 후반의 기계들은 자연과 인공, 마음과 몸, 자기발전과 외적 디자인, 그리고 유기체와 기계들에 적용되던 많은 구별들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기계들은 혼란스러울 정도로 생생하고,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정체해 있다. 우리의 과제는, 서구적 자아를 구조화하는 위계적 이원론의 대립, 그 안에서 가능했던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의 명료한 구분을 붕괴시킴으로써 잠재된 가능성들을 새로이 감싸는 작업이다.”[14]

이러한 기조 속에서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은 기술과 과학을 적대시하는 기존의 페미니즘들을 비판한다. 기존의 페미니즘들은 앞서 말한 이항대립의 억압적 구조를 전복하려 하였으되, 이것은 단지 각각의 대립에 있어 열등한 것을 복권시키려는 시도에 머물렀다. 소위 ‘Ecotopian 페미니즘’, ‘New Age goddess 페미니즘’, 그리고 카사 폴리트(Katha Pollitt)가 ‘차이의 페미니즘(difference feminism)’이라고 부르는 것 등, 여성의 ‘내재적’ 감성이나 특성들을 주장하는 페미니즘말이다. 여성이란 여기서 ‘어머니 대지(mother earth)’로서 상징화되고, 문화나 정신보다는 자연(몸)에, 합리성보다는 직관에 조율되어진다. 그러나 해러웨이에 의하면, 계몽주의적 의미의 자연이나 몸, 그 어느 것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 모두, 인공심장과 유전학적으로 개량된 옥수수의 시대에는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었다. 자연과 몸, 그리고 주어진 것들 모두를 문화적 구축물로 보는 20세기 후반의 기술논리(techno-logic)는 이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을 붕괴시킬 뿐만 아니라, 모든 기존의 유기체적, 자연적 입장들에 대한 재고를 요청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신 뿐만 아니라, 여신도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과학과 기술의 사회적 관계를 통해 내밀하게 재구조화되는 세계에서의 여성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기존의 페미니즘은 ‘反-과학형이상학’이나 ‘테크놀로지 악마이론’같은 것을 무력화시킬 수단을 제공할 수 없다.”[15]

“‘페미니즘적 체현(embodiement)’이란 것은 , 여성적인 몸이건 다른 것이건, 육화된 몸의 고착된 위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장(field)들의 매듭들, 운동의 내적 굴절, 물질기호학적 장에서의 의미의 차이들에 대한 책임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체현이란 것은 그어떤 의미있는 보철인 것이다. (…) 페미니즘은 다른 과학들과 테크놀로지를 사랑한다. 즉 해석, 번역 그리고 부분적 이해의 과학이나 정치 같은 것 말이다. 번역이란 것은 항상 해석적, 비판적, 부분적이다. 바로 여기에 대화와, 합리성과, 객관성의 바탕이 있게 된다. 그것은 권력에 예민한(다원주의적이 아닌) 대화이다. (…) 과학과 테크놀로지 역시, 폐쇄된 모델에 의해서가 아니라, 반박되고 반박할 수 있는 것을 그 규준적 모델로 하여 만들어져야 한다.”[16]

발라드(Ballard)는 이 말들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간략히 요약한다: “과학과 기술이란 것은 이제 우리들 주변의 모든 것을 다중화한다. 즉 우리가 말하고 사유하는 언어를 지배할 정도로 말이다. 우리는 그러한 언어를 사용하든지, 아니면 벙어리가 되어야 한다.”[17] 해러웨이가 강조하는 바, 테크놀로지와 과학의 사회적 관계들을 책임진다는 것은, “反-과학의 형이상학과 테크놀로지의 악마론을 거부함으로써, 일상의 경계들을 재구축하는 능숙한 과제를 떠맏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타자와의 부분적 접합(connection)과 우리의 부분들과의 소통을 통해서이다. 이 말은 과학과 테크놀로지만이 인간적 행복의 가능한 수단이거나, 지배의 모태라는 의미가 아니라, 사이보그적 이미지들이야말로 우리가 여태까지 자신의 몸과 도구를 설명해 온 이원론의 미궁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18]
사이보그는 허구의 문제이면서도 동시에 실제적 경험의 문제이다. 사이보그는 문화적 독해의 바탕을 이루는 지배의 관계들을 드러냄으로써, 그 어떤 텍스트화의 확실성도 전복한다. 그럼으로써 사이보그는 ‘물질적 몸’을 다시 긍정하고, 포스트모더니즘 내에서의 ‘몸의 사라짐’을 비판한다. 사이보그는 ‘담론적 몸(discursive body)’을 물질적인 몸과 ‘접속’시킨다. 결국 사이보그는 몸이란 것을 문화적 구축과 물질적 실제라는 두가지 지점으로부터 동시에 접근함으로써 기존의 페미니즘에 도전한다. 몸이 자연적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구축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몸이 단지 물질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면서도, 또한 역으로 몸이란 것이 단지 담론적으로 구축된 것 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19].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자연 대 문화’라는 대립의 붕괴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몸 테크놀로지 시대에 있어 여성에게 ‘부과된 몸’이란 것은 단지 다양한 의미의 체계로 이루어진 인공물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이버-사이보그적 생태성]

전자매체문화는 사이보그를 비롯하여 새로운 생태적 장의 열림을 수반한다. 사이보그란 인간과 그 자연적 환경 사이에 컴퓨터를 비롯한 기계가 개입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생태 속에서 유기성과 비유기성, 물질성과 비물질성, 인간의 지능과 인공적 지능들은 서로 합류하고 조합된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가변적인 몸의 시대를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생태학을 우리는 총칭하여 ‘사이버 생태학(cyber-ecology)’ 혹은 ‘사이보그적 생태학(cyborgian ecology)’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적 유기체와 인공적 유기체 사이에 일어나는 가변적 상호작용의 과학을 말한다. 캐서린 헤일즈(Katherine H. Hayles)에 따르면, “인간경험의 기본요소들이 변질되면서 그 경험들은 단지 구축된 것으로서 드러나기를 그친다. 경험의 가장 근원을 형성하고 있다고 믿겨져 왔던 인간의 주체란 것은, 그 역시 해체, 재구축되며, 이로써 자신의 본질을 변질시킨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이러한 ‘후기인간(post-human)’의 존재를 예고하고 밑그림을 그려왔다.” [20]우리는 바로 그러한 사이버-사이보그적 생태 속에서 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가변성이란, 사이보그의 은유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인식과 지각 자체가 ‘cyborganic’해지는 유동적 생태모델을 말한다. 그것은 감각이 경계없이 퍼져나가고 접속되는 변형, 혹은 돌연변이(mutation)의 문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돌연변이는 감각의 새로운 지평이며 ‘초-기관적(meta-organique)’인 상태이다. [21]세계에 대한 ‘cyborganique한 지각’이란 바로 그것이다. 여태까지의 몸은 일종의 고립된 ‘섬-몸(island-body)이었다면, 이제는 ‘몸-바다(body-ocean)’ – 동시에 유기적, 전자적, 정보적인 – 와 같은 것이 된다는 것이다.[22]

이러한 사이버공간의 생태 속에서는 몸의 유기적, 기계적, 정보적 물질성이 우리의 지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몸의 ‘지속적 미끄러짐’이 우리 지각을 지배한다. 단지 정보의 흐름과 재조합으로만 간주되는 사이버스페이스의 모델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본질도 없다. 살아있는 존재야 말로 실은 사이버스페이스의 ‘성스러운 원전’인 것이다. 사실 우리의 몸은, 기계가 현실에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화면 또는 거울이 된다. 우리의 몸은 물리적 우주가 기계를 위한 의미와 현실을 지니게 되는 그런 기호의 연쇄물이다. 즉 우리 자신에 의해서, 매체적 공간은 비로소 잠에서 깨는 것이다.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해 서사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우리 몸의 현존인 것이다. 이러한 인식적이고 현상학적인 생태구조를 올리비에 디엔스(Olivier Dyens)는 ‘인식적 사이보그(cognitive cyborg)’라고 부르면서, ‘사이버스페이스’와 ‘사이보그’의 두가지 유사개념을 완전히 합류시킨다. 왜냐하면 그러한 몸과 사이버스페이스의 만남은 단순히 물리적 몸이나 물질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반(半)인간적, 반(半)기계적인 인식구조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알뤼께르 로잔 스톤(Alluquere Rosanne Stone)이 이미 말했듯이, 유기체와 기계 사이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성적이고 인식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몸은 사이버스페이스의 모태(matrix)가 된다는 것이다. 로잔 스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디지털적으로) ‘다시 계산된’ 육화, 그 밀도있는 욕망의 공간… 즉 사이버스페이스에 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그 공간을 ‘신체적으로(physically)’ 짊어진다는 의미이다. ‘사이보그’가 된다는 것 혹은 이 사이버네틱한 위험하고도 유혹적인 공간을 꿰메어 나가는 과정은, 바로 ‘여성성’을 꿰메어 나가는 과정이다. 그리하여 사이버스페이스는, 솝책(Vivian Sobchak)의 말대로, 몸의 영혼을 벗겨내고, 동시에 그 영혼을 번쩍이는 표면과 현란한 색을 지닌 사이보그로 다시 만들어냄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사이버네틱한 행위(cybernetic act)’이다.”[23]

그리하여 사이버스페이스는 ‘정신의 풍경(mindscape)’이상의 것이 된다. 그것은 디엔스(Dyens)의 표현을 빌면, 일종의 ‘memescape’이라고 할 수 있다.[24] ‘memescape’는 ‘memes’ 지리학과 같은 것이다. 즉 인식(cognition)의 가소성(plasticity)이루어내는 풍경인 것이다. 사이버스페이스는 그러한 방식으로 생태적 풍경으로서의 memescape를 우리의 몸에 삽입하고 산종한다. 그리하여 “참여자는 사이버네틱한 로봇이 제기하는 지각들의 ‘수용자-수용체(receiver-receptacle)’가 된다. (…) 주체는 존재하기를 멈추고, 폴 비릴리오(Paul Virilio)가 말하듯이 하나의 ‘운동’이 된다. 몸은 ‘자기’라고 하는 감각을 잃어버리고, ‘환경’이란 개념 역시 재정의 된다. 몸은 충만함과 고독함 사이에서 모호하게 된다. 운동의 ‘수용자’로서의 몸은 자신이 바로 그 매체(medium)가 된다. [25]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새로운 시대, 즉 ‘기계우주(machine-universe)’와 ‘생물학적 장치(bioapparatus)’의 시대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이보그적 예술]

사실 ‘사이보그 예술’이란 쟝르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예술은 그 자체가 이미 항상 사이보그적이기 때문이다. 사이보그 생태성과 관련하여 이제 우리가 예로 삼고자 하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작가 스텔라크(Stelarc)는 사이보그적 기술을 소재로 하여 사이보그적 체험과 생태를 더욱 밀접히 가시화한 경우로서 참조될 만하다. 하지만 그것이 ‘사이보그 예술’이란 쟝르의 창조를 알리는 전형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마치 ‘퍼포먼스 예술’이 미술사 속에 자리잡기 전에도 몸은 이미 항상 확장된 현상학적 조건 속에서 작동하여 왔다는 평범한 논리에 따르는 것이다.

68년부터 70년대에 이르는 동안 스텔라크는 소위 ‘감각의 방(Sensory Compartment)’이라고 하는 밀폐된 설치물을 제작하였다. 이 설치물 안에서 참여자(혹은 사용자)는 빛, 운동, 소리 등에 의해 심하게 간섭 받는다. 그가 만든 고글이 달린 헬멧은 착용자의 입체적 시각(두개의 눈에 의해 가능한)을 혼란시키고, 이미지들이 중첩된 거울의 집 같은 세계로 몰입시킨다. 이러한 초기 작업의 동기는 매우 맥루한 적인 전제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몸이란 것은 일종의 생리학적 하드웨어에 불과한 것이며, 이러한 생리학적 하드웨어가 바로 그 지적인 의식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따라서 당신이 이 하드웨어를 변경한다면 역시 변질된 지각에 이르게된다는 각성을 주는 것”이 작업의 주 목표였다. [26]스텔라크는 이러한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보철(prosthesis)의 미학을 발전시킨다.이후 그의 행위들은 전선과 센서 등 매우 복잡한 첨단 하드웨어들로 가득차게 된다. 몸을 증폭시키고, ‘레이저 눈’과 ‘제3의 팔’, ‘자동 팔’을 만드는 등, 그의 몸은 인간-기계의 혼성적 존재로 갱신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의 단말기적 존재가 되어나가고 있다고 하는 은유를 시각화한다. 존 셜리(John Shirley)는 해러웨이적 어조로 스텔라크에 대해, 그의 작업이 사이버펑크적인 후기인간에 대한 갈망의 체현이며, 공포와 영광으로 결합된 키메라이며, ‘전(前)인간성’과 이제 태어나려 투쟁하는 내일의 인간성의 종합이다”라고 규정한다.[27]

스텔라크의 사이보그적 퍼포먼스 중에는 플라스마가 들어있는 유리관으로 가득찬 설치물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있다. 이 플라스마는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생체신호들에 응답하여 방전되고 명멸한다. 일종의 새장과 같은 구조물이 그의 어깨에 고정되며, 이것이 아르곤 레이저 파동을 발산하는데, 그것은 스텔라크의 몸에 붙은 심장박동기(electrocardiograph)의 신호, 눈의 깜빡임, 얼굴근육의 변형, 머리의 운동 등의 신호에 일치하는 것이다. 작품 에서는 자신의 주변에 설치된 비디오 카메라들이 행위를 촬영하고, 그 이미지들이 여러 개로 분리된 큰 스크린에 투사된다. 그 이미지들은 중첩되고, 얼어붙고, 병치된다. <제 3의 팔(the 3rd hand) >에서는 작가의 오른팔에 플라스틱 인조소매가 부착되어 있고 이것이 제 3의 사이보그 팔로 연결된다. 그 ‘사이보그 팔’은 이상한 소리를 발산하며, 금속 손가락은 허공을 잡으려 애쓰기도 한다. 이것은 전체적으로는 스텔라크의 배근육과 다리 사이에서 오는 ‘근전도(electromyogram)’의 신호에 따라 작동하는 정교한 로보트이다. 그것은 290도의 방향으로 회전하고, 물건을 잡아 들어올리고, 약간의 기초적 촉각을 갖춘 피이드백 시스템이다.

맥루한에 의하면, 기술에 의한 ‘몸의 연장’ 혹은 ‘자기 절단(auto-amputative)’의 전략은, 극도로 자극을 받은 신경체계가 ‘기술의 속도와 부하의 빠른 증가’라는 문화적 촉매에 대해 행하는 반응이다. 스텔라크 역시, 정보시대의 과도한 속도는 이미 신경체계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맥루한의 관점을 따라간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두개의 눈과 1400cc의 뇌를 가지고 생멸의 원리에 지배받는 우리의 몸이 과연 생물학적으로 적합한 몸인가를 의문시해야할 때이다. 그것은 이제 정보의 양, 복잡성, 질에 전혀 적응할 수 없다. 지구라는 행성의 가장 중요한 압력은 중력이 아니라, 정보의 흐름이 되었다. 이제 정보는 ‘후기진화적 몸(post-evolutionary body)’의 형태와 기능을 조형해 나간다.”[28]

그리하여 극소화하고 신체적으로 호환가능한 기술의 발전에 의해, 언젠가는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 하나의 ‘종(species)’이 되는 날이 오리라는 것이다: “기술이 몸을 침범할 때 진화는 끝난다. 일단 기술이 각각의 개인에게 자신의 독자적 발전과 진화의 가능성을 제공하기 시작할 때, 종의 일관성은 더이상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29]” 이러한 인간-기계의 공생은 단순히 SF적 상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된 ‘문화적 제의(cultural rituals)’, 예를 들어 소위 ‘현대적 원시인들(modern primitives)’ 들이 행하는 ‘몸 장난’, 즉 몸의 일부를 변형시키는 행위들과 깊은 관련성을 가지며, 나아가 중세 유럽에서의 과학과 마술의 연금술적 결합같은 것을 보여준다.무사파르(Musafar)는 “우리는 현재 마술과 테크놀로지와 과학을 결합하는 지점에 있으며, 물리학자의 이론을 들으며 연금술을 상상해낸다”고 말한다. [30]이 말은 “리얼리티에 대한 몸의 주관적 총체성을 파편화한 기술은, 이제 그 파편화된 체험들을 재결합하려 하고 있다”라는 스텔라크의 말과 직결되며, 그것은 자아와 타자, 문화와 자연간의 단절이 있기 전의 시대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사이보그적 생태성은 사이보그적 로보트를 도구로 한 예술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사이버 공간과 접속되고 몸과 시선의 변형을 수반하는 작업들은 모두 다 기본적으로 사이보그 적이다. 여기서 예로 들고자 하는 또하나의 작품은 카트린 이캄(Catherine Ikam)과 루이 플레리(Louis Fleri)가 공동으로 제작한 상호작용적(interactive) 설치작품이다.

<타자/Autre>라는 제목이 붙은 이 작품은 1992년 몬트리올에서 열린 <미래의 이미지 전>에서 처음 보여진 작품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어두운 방에는 대형 비디오 스크린이 있으며, 이 스크린 위에는 하나의 ‘얼굴'(컴퓨터로 합성된)이 투사된다. 방의 가운데에는 줄끝에 달린 센서가 있고, 관객은 이 센서를 사용하여 이 ‘타자’와 상호작용할 수 있다. 그 센서를 사용하기에 따라 얼굴은 커지거나 작아지며, 또는 돌리고, 숙이고, 변형되기도 한다. 즉 그것은 ‘살려고’ 시도한다. 이 설치의 특징은 바로 관객으로 하여금 그 얼굴을 직접적으로, 원하는대로 콘트롤하지 못하게 하는, 프로그래밍의 우발적 측면이다. 사실 관객은(혹은 대화자는) 종종 그러한 얼굴의 변화에 대답하려고 시도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다.

이러한 작품은 이미 본질적으로 사이보그적 생태에 잠겨진 세계이다. 왜냐하면 우발적으로 변화하는 디지탈 얼굴 위에는 어떤 공포가 나타나지만, 이 공포는 꼭 내것 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우리 자신의 독립적 고뇌의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 사이버스페이스의 ‘침묵’은 우리 자신에게도 투사된다. 그것은 하나의 인식적 공간(혹은 ‘memescape’), 무거운 감정으로 차 있는 공간인 것이다. 어떤 고독감과 절망감이 작품 속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 우울함은 우리에게는 한편 이질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기체-기계’라는 관계 속에 속하기 때문이다. 에드몽 쿠쇼(Edmont Couchot)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미지는 더이상 닫히고 침투할 수 없는 공간이 아니라, 열려진 세계이다. (…) 마치 그 이미지들은 자신이 이미지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이다. (…) 의미는 더이상 코드와 해독, 진술, 전파, 수용과 독해 속에서가 아니라, 이미지와 보는 자의 혼성 속에서 발생한다.[31]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감정은 상업화된 테크놀로지 산업들이 인식시키듯이 기쁨이나 공포인 것만은 아니며, ‘침묵과 절망의 가상성’에 더욱 밀접히 연관된다. 여기서 ‘가상성(virtuality)’이란 것이 단지 후기산업사회 테크놀로지의 산물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자. 가상성이란, 멜랑콜리 속에서 얽혀진 추억이며 기억이란 점에서, ‘예술의 기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상성이 바로 우리를 예술과 함께 그리고 예술 속에서 있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가상적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은 결코 ‘비현실적(unreal)’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他-실제적(alter-real)’, ‘超-실제적( meta-reel)’인 것이다.

“실재(reality)란 것은, 우리 삶의 의미가 발견될 수 없고, 보거나 만질 수 없는 그런 공간이나 장소에서 나타날 때 가상적이 된다.” [32]

가상성이란 것은 우리의 보호막이며, 우리의 숙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후의 혹은 이전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빠질 수 있게 하기 때문이며, 우리에게 사회와 예술과 역사를 구축하게 하며, 우리의 한정됨에 대한 아픔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가상성에 의해 우리는 엔트로피적 세계에 대해 감정적, 인식적 질서를 준다. 우리가 가상성 속에 빠져들 때, 우리는 하나의 세계를 다시 만들려 하고, 우리의 채워질 수 없는 욕망으로부터 우울함을 만들어 낸다. 가상성이란 것은 그 자체가 다른 시간에 젖어있는 신화이며, 멜랑콜릭한 시간이다. 불행히도, 많은 테크놀로지 예술과 문화들의 경우 단지 정보자체에만 집중하며 이러한 멜랑콜리에는 무심한 경우가 많다. 하나의 예술작품은 그것이 만일 침묵의 자리(분노의 침묵, 절망이나 기쁨의 침묵)를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떤 초월도 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특징과 성격은 테크놀로지 예술에서 종종 부재하고 있고, 너무 시끄러운 것,즉 정보를 가상화시켜 전개시키는 데만 열중하고, 그것을 침묵시키는데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있다. 작품 <타자>에서는 우발적이고 예측불능한 것이 현존한다. 바로 그러한 침묵 속에서 새로운 소통의 형태(상호대화적인)가 설립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식적 사이보그’의 생태성이다.

[변신과 사이보그]

이상 열거한 사이보그적-사이버스페이스적 생태성이란 기본적으로 ‘변신'(매우 ‘이질적 종합’으로서의
‘metamorphosis’)이며, 그 멜랑콜릭함이란 그러한 변신상태의 멜랑콜리이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그러한 생태성을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도래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 몸에 충만한 잠재성과 현재성의 형태로 주어져 있는 조건을 살펴봄으로써 사이보그의 개념이 지니는 철학적 함의에 대해 약간은 가설적으로 정리하고 끝맺으려 한다. 그것은 바로 ‘변신’과 ‘타자의 긍정’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수반하는 특유의 긍정적 ‘힘’에 관한 것이다.

들뢰즈-가타리가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분석을 통해 논한 ‘변신’의 개념은, ‘이질적 접합의 원칙’의 실제적 과정을, 실제적으로 ‘다른-것이-됨’의 과정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말벌은 난초의 재생산 장치의 부분이 되며 동시에 난초는 말벌을 위한 성적 기관이 된다. 각자가 되는 ‘그것’은 ‘그것’이 생성되는 만큼 변한다는 점에서 ‘이중적인 교차’이다.

“변신은 재현이나 모방이 결코 아니다. 변신은 포획이고, 소유이고 덤태기이다. (…) 중요한 것은 어떤 한 이미지의 재현이 아니라, 기호체계의 한 조각을 포획하는 일이다.”[33]

이는 하나의 단일하고 동일한 생성, “서로 절대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두 존재들의 비평행적 진화”이다.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는 곤충으로 변하기보다는 ‘곤충이-되는-인간’으로 머무른다. 이러한 곤충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탈주선’을, 상황을 변화시키는 수단을 찾았음을 의미한다[34]. 카프카는 진술하는 주체(카프카 자신)와 진술의 주체(글 속의 ‘나’)로 스스로를 이중화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중체를 내세워 사람들과의 직접적인(즉 ‘real’한) 만남을 피하며, ‘편지기계’가 계속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장애물들을 발명한다. 여기서 카프카의 ‘이중적으로 변신된 주체’는 기계와 가상공간과의 접합에 의해 혼성화되고 부유하는 사이버 주체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사이보그적 변신이 무생물이나 자연적인 것으로 이미 ‘재현’된 것들과 접합함으로써 그 이분법의 무한한 붕괴를 지향하듯이, 카프카적 변신은 현실이라고 하는 그 재현된 세계의 직접성을 피하고 대신 가상적 벌레와 접합함으로써, 그 ‘편지기계’는 가상/현실의 대립을 넘어 무한히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사이보그란 것이 “재현된 목적론이 없는 궁극적 존재상태”라는 해러웨이의 말은, ‘타자’와 ‘차이’가 우리에게 유발하는 ‘공포’를 끊임없이 수용하고 그 자체로서 긍정하는 힘의 지속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니이체의 ‘비극의 정신’으로 회귀하는 듯하다. 니이체는 ‘비극의 정신’을 궁극적인 긍정의 정신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연과 필연(을 모두 긍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성, 생성된 것, 존재 이 모두를 긍정하며, 복수성, 복수적인 것, 통일된 것 이 모두를 긍정하기 때문이다. 비극이란 ‘주사위 놀이’이다.”[35] ‘사이보그적 변신’이란 바로 그러한 니이체적 의미의 우연과 차이의 긍정을 바탕으로 한, 총체적 변형과 변신을 지향하는 것으로 확장해석될 수 있으며, 들뢰즈는 그러한 니이체적 변형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변형(transmutation, transevaluation)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1. ‘권력에의 의지’ 속에서 질의 변화: 가치란 것은 어떤 부정(negatif)적인 것(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긍정의 힘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유의 장소 자체가 바뀌는 것이다. ‘(차이에 의해 영구히 고립된) 다른 세계(autre monde)’라는 자리는 없다. 가치의 요소 자체가 그것의 위치와 본성을 바꾼다.

2. 권력에의 의지 속에서 각 요소들의 변환: 즉 부정성(negatif)은 긍정의 권력(puissance)으로 변화한다. 부정성은 긍정에 복종한다. 그것은 삶이 자기 안에서 반동적인 것을 보존하는 형태가 아니라, 이제 반대로 삶이 자신의 모든 반동적 형식들을 희생시키는 행위이다.

3. 권력에의 의지 속에서의 ‘긍정의 군림’: 오직 긍정 만이 독립적 힘으로서 지속한다.

4. 힘(forces)들의 관계의 전복: 긍정은 힘들의 우주적 생성처럼, 긍정적 생성을 형성한다. 반동적 힘들은 부인되고, 모든 힘들은 긍정적이 된다.(…)”[36]

‘사이보그-니이체’의 연결쌍은 니이체의 긍정과 비극정신이 그리이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 왔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소급적 연쇄가 가능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비극의 사상가이다. 그는 삶이란 것을 근원적으로 천진난만하고 정당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실존이란 것을 유희의 본능을 통해 이해하였고, 실존을 종교적이거나 도덕론적인 것이 아닌 하나의 ‘미학적(esthetique)’인 현상으로 생각했다. (…) 그는 세계의 이원론을, 심지어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나아가 그는 생성을 긍정으로 간주했다[37]. 생성을 긍정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생성 밖에는 없다’라는 뜻이며, 다음으로 ‘생성을 긍정한다는 뜻’이며, 마지막으로 ‘생성의 존재(etre)’를 긍정하고, 생성이 존재를 긍정하고, 존재가 생성 속에서 긍정된다는 뜻”이다.”[38]

[결론]

사이보그적 예술과 생태에 대한 논의는 결코 사이보그를 비롯한 기이한 테크놀로지 예술을 부추기는 사고로 해석될 수도, 되어서도 안된다. 그것은 마치 “몸적으로 예술을 하자”, “몸을 권장하자”라는 모토처럼 모순되고 실행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몸이란 것은 예술의 소재처럼 생각될 수 있는 어떤 객체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와 사유의 조건이며 그 장(field)이기 때문이다. 테크놀로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태까지 반복되어 이야기 된 대로, 테크놀로지란 것은 이제 우리의 존재와 행동과 사유의 조건이 된다. 이러한 뉴미디어의 도래 이전에도 이미 기술이란 것은 항상 그러한 조건으로서 작동해왔다.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도래함으로써 드디어 처음으로 주체/객체의 이분법이 무너진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생각은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역사화’, ‘객체화’시키는 위험을 내포한다.

권력과 재현의 사유구조에 지배당하는 우리의 의식은, 최소한 의식 상으로는 기술에 대한 권력주의적 담론에 지배당하면서도 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러한 ‘조건으로서의, 신체의 일부로서의 기술’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존재하고 사유해 왔다. 내가 여기서 제안하는 것은 사이보그 로보트같은 것을 소도구로 사용하는 예술도, 예술 속의 사이보그도 , 테크놀로지를 쓰는 예술도, 예술 속의 테크놀로지도 아니다. 그보다는 기존의 모든 예술 속에 내재해 왔던 테크놀로지적 존재조건 혹은 사이보그적 존재조건을, 그리고 예술의 사이보그적 ‘역능성'(puissance)을 말하려는 것이다. ‘사이보그 예술’, ‘테크놀로지 예술’이란 새로운 쟝르는 없다. 예술 자신이 이미 그리고 항상 전적으로 사이보그이고 테크놀로지였기 때문이다. 결국 사이보그는, ‘예술의 근본적 힘을 재수행하는 힘’을, 그리고 그러한 ‘재정의를 위한 인류학적, 생태적, 정치적, 미학적 충동과 실현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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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이보그’란 용어는 1960년 과학자 만프레드 클린(Manfred Clynes)이 만들어낸 것이다. 무릅관절처럼 대체가능한 인공적 신체기관에 관한 의학기술의 진보는, 유기체적 기관과 기계적 사물 간의 상호의존성을 증폭시킨다. 나아가 이러한 기계적 장치들이 인간의 기능적 신체의 일부로 화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이보그적 기계인간에 대한 상상은 이미 그 전부터 발견되며, 그 예로서 아서 클라크(Arthur C. Clark)의 란 소설에서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정신을 기계에 이전시켜 스스로를 사이보그로 변환시킨다.

[2] David F. Chanell, The Vital Machine: A Study of Technology and Organic Life, New York, Oxford Press, 1955, p.129, (Mark Dery, Escape Velocity: Cyberculture at The End of The Century, New York, Grove Press, 1996,p.230에서 재인용)

[3] 다빈치의 잘 알려진 작품이 재현하는 이러한 신체는 바로 신체의 완벽한 형태성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 믿음이란 “몸과 그 형태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단일한 것이다”라는 내용의 것이다.

[4] ‘건축과 도시공간 속의 신체’라는 주제에 대한 입문적 논의로서는 Richard Sennett, Flesh and Stone: The Body and the City in Western Civilization, NY, W.W. Norton and Company, 1994를 보라.

[5] 기본적으로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로부터 출발하여 그 이후, 브라이언 터너(Bryan Turner), 캐서린 갤러거(Catherine Gallagher), 토마스 래커(Thomas Laqueur), 에밀리 마틴(Emily Martin) 등의 이론가들에 의해, 몸, 문화, 사회의 상호연루 속에서 몸이 담론화하고 ‘담론적 몸(discursive body)’가 생산되는 과정이 논하여 졌다. 이들에 있어서의 ‘몸 정치학’, ‘몸 테크놀로지’에 대한 비평적 설명으로는 다음을 보라: Anne Balsamo, Technology of The Gendered Body: Reading Cyborg Women,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1996, pp.19-40

[6] Anne Balsamo, “Feminism and Cultural Studies”, Journal of the Midwest Modern Language Association 24, no.1 (spring 1991), p.64 (Mark Dery, Escape Velocity…, p. 237에서 재인용)

[7] Arthur Kroker, Technology and the Canadian Mind: Innis/McLuhan/Grant, New York, St.Martin’s, 1984, p.27 (Balsamo, 위의 책, p. 28 재인용)

[8] Frederic Jamerson,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정정호, 이소영 편, Postmodernism: An Introductory Anthology, 한신출판사, 1990,p.232(원전 New Left Review, No.146, 1984)

[9] 같은 책, 같은 페이지.

[10] Mark Dery, Escape Velocity…, p.243, 재인용.

[11] 같은 책, 같은 페이지.

[12] Donna J. Haraway, Simians, Cyborgs, and Women: The Reinvention of Nature, New York, Routledge, 1991, p.150

[13] 같은 책, p.152

[14] 같은 책, p. 174

[15] 같은 책, p. 162, 181

[16] Haraway, “The Actors Are Cyborg, Nature Is Coyote, and The Geography Is Elsewhere: Postscript to “Cyborgs at Large”, in Constance Penley and Andrew Ross (ed.), Technoculture, ‘Cultural Politics, Volume 3’, Oxford,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1, p.23

[17] J. G. Ballard, Crash, New York, Vintage, 1985, pp. 3-4.(Mark Dery, Escape Velocity…, p.245 재인용)

[18] Simians, Cyborgs, and Women…, pp.100-101

[19] Anne Balsamo, Technology of…, p.34

[20] Katherine H. Hayles, Chaos Bound. Orderly Disorder in Contemporary Literature and Science, Ithaca and London, Cornell University Press, p.266 해러웨이는 우리가 이미 그러한 ‘후기인간’이 되어가고 있음을 선언한다: “20세기의 마지막 시점, 이 신화적 시대에서, 우리는 모두 기계와 유기체로 이루어진 키메라(Chimera, 그리이스 신화 속의 혼성괴물 -필자주)이고, 이론화된 잡종들이다. 즉 우리는 안드로이드, 사이보그인 것이다. 우리의 존재론은 사이보그의 그것이고, 사이보그는 우리의 정치학을 결정한다. 사이보그는 상상력뿐만 아니라, 물질적 현실의 압축된 이미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가지 중심의 융합은 모든 역사적 변형을 구조화 한다” (A cyborg Manifesto, p.150)

[21] 브랜윈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포괄적 설명을 덧붙힌다: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현대적 원시주의(귀뚫기, 문신, 신체변형)와, 그리고 인간의 몸을 후기인간적 가능성의 조건에 적합하도록 변형(morph)시키는 새로운 ‘기술신화(techno-mythology)’의 출현, 이 양자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신화에서 인간의 몸은 해커들에게 열려있고, 인간성과 기술이 새롭고 활발한 관계 속에 짜여지는 그러한 조율점이 형성된다. ” (Gareth Branwyn, “The desire to be wired”, Wired, vol 1, no.4, september-october, p. 62)

[22] Marcos Novak같은 사이버 이론가는 ‘액체적 건축(liquid architecture)’라고도 규정했다.

[23] Alluquere Rosanne Stone, “Will The Real Body Please Stand Up?: Boundary Studies about Virtual Cultures”, in Michael Benedikt(ed.), Cyberspace First Steps, Cambridge, MIT Press, p. 109

[24] Olivier Dyens, “L’emotion du cyberespace”, in Louise Poissant(ed.), Esthetiques des arts mediatiques, II, p.399-400. 디엔스는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유명한 정보생태론적 개념인 ‘memes’를 빌려오고 있다.

[25] 같은 이, 같은 책, p. 400. 이러한 자기반영적 생태성, 혹은 타자로의 접합이 지니는 힘과 관련하여, 리오따르(J. F. Lyorard)가 라깡적 어조로 한 말을 예로 들어보자: “거울 속의 괴물이 그 어떤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고 칠 때, 보르헤스는 ‘재현하는 자’와 ‘재현되는 것’ 사이의 동형성(isomorphisme)이나 이형성(heteromorphisme)에 대해 사색하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괴물들을 하나의 ‘힘’들로 상상한다. 그는 황제나 폭군이 일반적으로, 괴물들을 억압하고 그 투명한 벽 안에 가둘 때에만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상상한다. 주체라는 존재는 이러한 칸막이 벽 안에서만, 그리고 반대편에서 단지 재현된 상태로 억압되어 있는 유동적이고도 치명적인 힘을 복속시킴으로서만 가능한 것이다.”(J.F. Lyotard, Assassinat de l’experience par la peinture, Monory, Paris, Le Castor Astral, p. 13)

[26] 맥루한이 말한 바 있다: “우리의 감각의 확장은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 즉 우리가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이러한 비율이 바뀔때, 인간도 바뀐다.” (Marshall McLuhan, The Medium is the Message: An Inventory of Effects, New York, Bantam, 1967, p.41)

[27] Mark Dery, Escape Velocity…, p.154-155

[28] Stelarc, “Prosthetics, Robotics and Remote Existence: Postevolutionary Strategies”, Leonardo 24, no.5, 1991, pp.591

[29] 같은 글. p.591

[30] Kristine Ambrosia and Joseph Lanz, “Fakir Musafar Interview”, in Apocalypse Culture, Adam parfrey(ed.), New York, Amok Press, 1987, p. 111 (Dery의 같은 책,p.167)

[31] Edmont Couchot, “Sujet, Objet, Image”, Cahiers internationaux de sociologie, 82 (janvier-juin 1987), p.85-98 (Olivier Dyens, “L’emotion du cyberespace”, p.410 재인용)

[32] David Rothenbert, in Catherine Richards and Nell Tenhaaf(ed), Virtual Seminar on the Bioapparatus, The Banff Center for the Arts, 1991, p.19

[33] Gilles Deleuze, Felix Guattari, 소수집단의 문학을 위하여: 카프카론, 문학과 지성사, 조한경 역. 1992

[34] “동물변신, 그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동작을 가능하게 하며, 모든 가능한 도피선을 긋게 해주며, 문턱을 넘어서게 해주며, 오직 그 자체로 의미있는 연속적 응집성 속에 이르게 해준다. 동물 변신은 모든 형태, 모든 의미화, 기표 기의를 와해시켜서 비형태, 비영토화의 물결, 무의미의 기호에 자리를 내준다. 카프카의 동물들은 신화 또는 원형과 결코 관계하지 않는다. 카프카의 동물들은 오직 경사(傾斜)없는 밀도높은 자유영역과 조응한다. 그곳은 내용이 형태를 벗어버리고, 표현이 표현을 가능하게 한 기표를 벗어던지는 곳이다” (“소수문학…”, 28쪽)

[35] Gilles Deleuze, Nietzsche et la philosophie, Paris, PUF, 1962, p.41

[36] 같은 책, p.201

[37] 이 점에서 볼 때, 사이보그는 ‘항상 생성 속에 있는 존재’이며,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는 관점이 항상 견지되어야 할 것이다.

[38] 같은 책, p.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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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art.centerworld.net/discourse/sub.asp

* 박승호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6-26 00:33) http://www.cellspyapps.org